20세기 이야기

바실리 칸딘스키 ‘청기사’ 그룹 결성

↑ 칸딘스키 최초의 추상작품 ‘첫 번째 수채 추상’(50×65㎝, 1910년, 파리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칸딘스키에게 음악은 사운드로 그려지는 완벽한 추상 언어

20세기 초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새로운 미술 양식이 유럽에서 꿈틀거렸다. 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로 대표되는 야수파와 입체파가 20세기 초를 화려하게 장식하더니 급기야 점, 선, 면, 색채 등 순수 조형만으로 구성된 이른바 추상회화가 등장했다. 대상의 재현·모방이라는 전통 미술의 굴레에서 벗어나 추상회화의 물꼬를 튼 사람은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였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가 자신의 일생이 바뀌게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한 것은 1910년의 어느 날이었다. 해질 무렵 화실에 들어섰을 때 문득 눈부시게 빛나는 그림이 눈에 들어왔는데 놀라운 것은 그림에서 대상의 묘사와 주제는 보이지 않고 단지 불타는 듯 밝은 색채만 보였던 것이다. 더욱 그를 놀라게 한 것은 그림을 자세히 보려고 가까이 다가간 순간 그림이 거꾸로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무엇보다 그 그림이 자신의 그림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튿날, 하루 전의 감동을 되살려 보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좀처럼 전날의 감동이 살아나지 않았다. 그날의 체험을 통해 칸딘스키가 깨달은 것은 “그림의 내용과 상관없이 오직 색채만으로도 감정을 전달할 수 있고 객관성이나 대상의 묘사라는 것은 불필요할뿐더러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칸딘스키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중국과 접경한 동시베리아 출신으로 동양인의 피가 섞여 있었고 어머니는 모스크바 토박이였다. 모스크바대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전공하면서도 미술에 관심이 많아 미술 전시회 관람을 취미로 삼았다.

 

자신의 회화에 음악성 부여하려고 노력

이런 칸딘스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운명적인 인상파 전시회가 모스크바에서 열린 것은 1895년이었다. 칸딘스키는 그 전시회에서 들판에 쌓인 건초를 그린 모네의 그림 ‘건초더미’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가 그림에서 발견한 건 사물에 대한 구체적인 재현이 아니더라도 색채와 형태만으로 얼마든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칸딘스키는 그 무렵 제안이 들어온 대학의 법학 교수직을 뿌리치고 1896년 12월 30세의 늦은 나이에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위해 독일의 뮌헨으로 떠났다. 초기에는 뛰어난 사실적 묘사력을 보여주다가 점차 인상파와 야수파의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추구했다. 칸딘스키는 색체 자체의 본성과 그 효과를 표현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1901년 미술학교 겸 그룹인 ‘팔랑스’를 개설했다. 제자 중에는 가브리엘레 뮌터라는 여성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추구하는 회화적 방향에 끌려 10년간 조력자이자 연인으로 지냈다. 팔랑스는 1회(1901)와 2회(1902) 전시회를 열었으나 모두 혹평을 받아 1904년 활동을 중단했다.

칸딘스키는 1903년 모스크바에서 개인전을 열고 1905년 프랑스의 ‘살롱 도톤전’에 그림을 출품하며 화가로서의 활동을 본격화했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부터는 대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거나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대상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감동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기는 식으로 화풍을 바꿔 나갔다. 예를 들어 나무를 보았을 때, 화가의 내면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평화’였다면, 평화스럽다는 내적인 감동을 화면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나무라는 구체적인 대상은 없애고 화가의 감정만을 그림에 남기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화가가 일방적으로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만을 표현하게 되면 자칫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의미한 낙서나 얼룩으로 비칠 위험성이 있었다. 이런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칸딘스키는 색채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표현하려고 애를 썼다. 칸딘스키는 예술이 장식과 구별되려면 예술가의 감동에 바탕을 둔 ‘내적 필연성’이 있어야 하며, 감각적으로 조형화된 예술가의 감동이 미술을 감상하는 사람에게 감동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예술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구체적 대상은 없애고 화가의 감정만 그림에 남겨

칸딘스키는 또한 자신의 회화에 음악성을 부여하려고 노력했다. 음악이 현실의 소리를 재현하지 않아도 듣는 이의 영혼에 호소하는 것처럼 회화에서도 색채, 형태, 구도만으로 보는 이에게 호소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음의 높낮이가 다르고 악기마다 독특한 음색이 있듯이 색에도 각각의 특징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음악은 사운드로 그려지는 완벽한 추상 언어였다.

칸딘스키가 특히 우정을 나눈 음악가는 오스트리아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였다. 칸딘스키는 쇤베르크를 예술적 동지로 생각해 서신을 통해 자신의 회화론을 설명하면서 음악과 같은 열정을 회화에서도 펼칠 수 있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에 쇤베르크가 공감의 답장을 보내오면서 둘의 우정을 이어나갔다. ‘인상Ⅲ-콘서트’(1911)는 쇤베르크의 무조음악(無調音樂)을 듣고 제작한 작품이다. 작품의 중앙에 그랜드피아노를 연상시키는 검은색 삼각형과 환호하는 청중의 단순화된 형태에서 구상의 흔적이 남아 있긴 하지만 완전한 추상으로의 점진적인 이행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칸딘스키는 1909년 그와 뜻을 같이하는 화가들과 ‘뮌헨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12월 첫 전시회를 열었다. 그러나 대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이 때문에 내부 갈등이 불거져 1911년 12월 제3회 전시회를 앞두고 칸딘스키는 몇몇 화가들과 함께 협회를 탈퇴했다. 대신 작곡가 쇤베르크, 화가 프란츠 마르크·파울 클레 등과 의기투합해 1911년 12월 18일 ‘청기사’라는 이름으로 첫 전시회를 뮌헨에서 열었다. 청기사 그룹은 프랑스 입체파의 미학을 도입해 색채와 형태를 과장함으로써 독일 인상주의와 사실주의를 뒤엎고 표현주의 회화의 막을 열었다는 데 미술사적 의미가 있다.

청기사 그룹은 1912년 2월 2번째 전시회를 열고 1912년 5월 ‘청기사’란 제목의 연감도 제작했는데 책의 구성과 편집이 독특했다. 화가들의 글과 그림, 쇤베르크의 악보, 시대와 분야를 망라한 도판 등으로 연감은 총체적인 하나의 예술 작품에 가까웠다. 청기사 연감은 계속해서 발간할 계획이었지만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하고 1916년 마르크가 전사함으로써 단 1권에 그치고 말았다.

 

이론의 영역에서도 20세기 추상미술을 선도

칸딘스키는 실천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이론의 영역에서도 20세기 추상미술을 선도했다. 1912년 독일어로 쓴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해’가 대표적 이론 작업으로 꼽힌다. 이 책의 서론에서 밝힌 “모든 예술작품은 그 시대의 아들이며, 때로는 우리 감정의 어머니이기도 하다”는 문장은 지금도 많은 예술 이론가들이 인용하고 있다.

칸딘스키는 회화를 성립시키는 3가지 원천을 외부 자연으로부터 받은 직접적인 ‘인상’, 무의식적이고 자연발생적인 ‘즉흥’, 장기간의 작업을 통해 형성된 내적인 감정의 표현으로 형성되는 ‘구성’으로 구분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린 그림들이 ‘즉흥’, ‘구성’, ‘인상’이라는 제목의 연작이다.

칸딘스키가 그린 최초의 추상작품은 1910년 작 ‘첫 번째 수채 추상’(50×65㎝)으로 알려져 있다. 이 그림은 칸딘스키가 자신만의 순수한 내적 필연성에 따라 그린 ‘즉흥’ 연작 가운데 하나다. 그림을 보면 구체적인 대상이나 이미지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선과 색채의 율동만이 난무한다. 이것은 혁명이고 충격이었다. 칸딘스키를 상징하는 기하학적인 도형 추상이 빈번하게 나타난 것은 ‘구성’ 연작에서다.

칸딘스키는 1914년 1차대전 발발 후 모스크바로 돌아갔다가 1917년 러시아혁명 후 혁명정부에서 미술 관련 일을 맡았다. 그러나 볼셰비키 정부의 예술 정책과 틈이 벌어지면서 1921년 러시아를 떠나 1922년부터 1933년까지 발터 그로피우스가 주도한 독일의 ‘바우하우스’에 참여함으로써 20세기의 현대 디자인에도 공헌했다. 그러던 중 1933년 바우하우스를 폐교시킨 나치 정권을 피해 파리로 피신하고, 그의 작품이 나치에 의해 ‘퇴폐예술’로 낙인찍혀 작품이 몰수당하는 등의 수모를 겪었다. 2차대전 후 파리가 나치의 수중에 들어가기 전 스위스로 망명했다가 그곳에서 1944년 12월 13일 작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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