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치머만 전보와 아르투르 치머만 주미 독일대사
독일, 영국의 항복 끌어내기 위해 무제한 잠수함 작전 전개
1차대전이 발발하고 영국이 독일을 상대로 해상봉쇄를 취하면서 독일의 모든 선박은 발트해와 북해에 발이 묶였다. 독일은 위기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U보트’로 불린 잠수함을 총동원했다. 개전 당시 독일이 보유하고 있는 U보트는 29척에 불과했으나 전과는 혁혁했다. 1914년 9월 5일 259명의 승조원을 태운 영국의 순양함 ‘패스파인더’를 침몰시키고 9월 22일 영국 순양함 3척을 연달아 격침해 2,200여 명의 승조원 중 1,459명을 수장했다. 당시 영국 해군 참모총장인 피셔 제독은 “넬슨 제독이 평생 전투로 희생시켰던 병사보다 더 많은 병사가 하루 만에 죽었다”며 탄식했다.
독일은 U보트 공격의 잇따른 성공에 고무되어 1915년 2월 영국 근해 전체를 전쟁 지역으로 선포하고 이른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선언했다. 영국 국적 선박은 물론 제3국 선박도 영국으로 전쟁 물자를 수송한다고 간주해 격침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독일은 1915년 한 해에만 74만 여t의 선박을 격침했다. 영국의 호화 여객선 ‘루시타니아호’(3만 2,000t)도 그 해에 격침했다. 독일의 U보트는 1,959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태우고 미국 뉴욕을 출발해 영국 리버풀을 향해 가던 루시타니아호를 향해서도 1915년 5월 7일 아일랜드 근해에서 2발의 어뢰를 발사해 128명의 미국인을 포함한 민간인 1,198명을 숨지게 했다. 루시타니아호는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격분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공격을 즉각 중단하지 않으면 미국도 참전하겠다”며 독일에 경고하자 독일은 미국의 참전을 우려해 1915년 9월 U보트에 의한 무차별 공격 중단을 선언하고 다시 종래 방식대로 해상 공격을 전개했다.
당시 윌슨 대통령은 1차대전 발발 이래 3국 협상(영국·프랑스·러시아) 측의 참전 호소에도 불구하고 “유럽 전쟁은 미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전쟁이고 그 원인도 우리와는 상관 없는 것”이라며 참전을 거부하고 중립 정책을 견지하고 있었다. 미국만 참전하면 전쟁은 당연히 3국 협상 측에 유리했으나 윌슨은 오히려 전쟁 당사국들에게 강화조약을 맺으라고 압력을 가했다. 독립 이래 미국 대외 정책의 기본 원칙이었던 고립주의의 연장선이기도 했지만 윌슨 개인의 이상주의적 경향도 작용했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순수한 무역 거래라는 미명 아래 3국 협상 측에 막대한 양의 전쟁 물자를 팔아 실리를 챙겼다. 반면 소비 식량의 20%를 수입에 의존하는 독일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 포기 후 강화된 영국의 해상봉쇄로 최소 수십만 명이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었다.
독일의 치머만 전보는 미국을 아메리카 대륙에 묶어두겠다는 복안
결국 독일은 1917년 1월 불리한 전황 타개를 위해 무제한 잠수함 작전 카드를 다시 꺼내 들었다. 전쟁 지역에서 발견되는 3국 협상 측과 중립국의 모든 선박을 경고 없이 침몰시키면 6개월 내에 영국의 항복을 끌어낼 수 있다고 계산한 것이다. 설사 미국이 군대를 모집하고 훈련시켜 전장으로 투입한다 해도 이미 전쟁은 끝나 있을 것으로 자신했다.

바로 그럴 때 ‘치머만 전보 사건’이 터졌다. 사건은 1917년 1월 17일, 영국의 해군정보부가 독일에서 미국으로 발신된 전보 하나를 가로채면서 불거졌다. 암호를 풀어보니 평소와 달리 독일의 외무장관 아르투르 치머만, 주미 독일대사 요한 폰 베른스토르프 백작, 멕시코 주재 독일공사 하인리히 폰 에크하르트 등의 이름이 등장해 영국 해군정보부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당시 영국은 침몰한 독일 구축함과 독일 첩보요원에게서 독일의 암호책을 확보하고 있었으나 독일은 이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1월 16일 발신한 전보의 발신자는 치머만 독일 외무장관이었고 미국 주재 독일대사를 경유한 멕시코 주재 독일공사가 최종 수신자였다. 내용은 이랬다. “2월 1일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시작한다. 그럼에도 미국이 계속 중립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 성공하지 못할 경우 멕시코에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동맹을 제의한다. 함께 전쟁 수행 및 평화 체결, 넉넉한 재정 지원, 멕시코가 미국에 빼앗겼던 텍사스주·뉴멕시코주·애리조나주를 회복할 때 지원. 멕시코가 일본을 설득해 일본이 3국 협상 측에서 빠져나와 하와이를 공격하도록 유도. 세부 사항은 공사가 알아서 할 것.”
즉 미국이 중립을 지키지 않고 참전할 경우 멕시코가 대미전(對美戰)에 가담한다면 멕시코가 미국에 빼앗겼던 텍사스주·뉴멕시코주·애리조나주의 영토를 되찾는 데 독일이 지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할 경우 미국을 아메리카 대륙에 묶어두겠다는 복안이었다. 주미 독일대사는 전보를 받고 1월 19일 멕시코 주재 독일공사에게 이 내용을 전송했다.
영국 해군정보부, 암호 가로챈 것을 독일이 눈치챌까봐 조심스럽게 접근
전보를 해독한 영국 해군정보부의 암호 해독 담당 윌리엄 레지널드 홀 제독은 전보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영국이 독일의 암호를 해독했다고 눈치채지 못하게 하면서 전보를 미국에 전달하는 방법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독일이 영국의 암호 해독을 눈치챈다면 독일은 앞으로 같은 암호를 쓰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새로운 암호 해독을 위해 또 몇 년이 걸릴지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전보 공개는 곧 암호 해독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전보를 공개하지 않으면 미국의 참전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고민에 빠진 홀 제독은 독단적으로 전보를 공개하지 않고 자신의 금고 속에 넣어두었다. 2월 1일 시작될 독일의 잠수함 작전에 맞서 미국이 참전한다면 다행이지만 그래도 참전하지 않는다면 그때 전보를 공개할 생각이었다.
주미 독일대사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 돌입 8시간 전인 1917년 1월 31일, “2월 1일부터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전개한다”고 미국에 정식으로 통보했다. 워싱턴은 충격에 휩싸였으나 윌슨 대통령은 여전히 “어느 쪽도 승리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중립을 고집했다. 이처럼 미국의 참전 의사가 분명하지 않았는데도 치머만은 만일을 위해 2월 5일 멕시코 주재 독일공사에게 “지금 멕시코에 동맹을 제안하라”고 전보를 보냈다. 홀 제독은 이 전보도 가로챘다.
홀 제독은 윌슨 대통령이 여전히 전쟁에 개입할 의사가 없음을 알고 전보를 미국에 전달하기로 했다. 미국이 참전하지 않으면 영국은 악화하고 있는 전황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 이번에도 독일이 암호 해독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것이 숙제였다. 홀 제독은 주미 독일대사가 미국에서 멕시코로 보낸 전보를 확보해 이것을 미국에 전달하면 영국이 중간에서 암호를 가로챈 사실을 독일이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멕시코 내 영국 요원이 미국에서 멕시코로 보낸 전보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홀 제독은 멕시코에서 가로챈 전보를 2월 19일 아서 밸푸어 영국 외무장관에게 보고했다. 전보는 2월 23일 영국 주재 미국 대사를 거쳐 24일 워싱턴으로 보내졌다. 전보를 받아든 윌슨은 미국의 뒤통수를 때리는 이런 전보를 보내놓고 겉으로는 평화공세를 취해온 독일의 기만 행위에 분노했다. 전보 내용은 3월 1일자 각 신문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런데도 독일의 치머만은 미국 정부가 전모를 알고 있을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 자신이 전보를 보냈음을 시인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미국의 참전, 20세기를 ‘미국의 세기’로 만들어
모든 게 사실로 밝혀져 미국인 가운데 4분의 3이 참전을 지지하고 있을 때 3월 18일 3척의 미국 선박이 경고 없이 독일의 U보트의 공격에 또다시 침몰하는 사건이 벌어짐으로써 미국의 참전은 기정사실화되었다. 윌슨은 의회에 나가 “민주주의 수호와 세계의 항구적인 평화를 위해 미국의 참전이 불가피하고 이 전쟁이 지구상의 모든 전쟁을 종식시키는 최후의 전쟁이 될 것”이라고 역설하며 참전 승인을 요청했다. 의회는 1917년 4월 6일 하원 373 대 50, 상원 82대 6의 압도적 다수로 윌슨의 대독 참전 결의안을 승인했다. 이로써 미국은 1차대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바야흐로 진짜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 지상부대의 유럽 전선 투입은 지연되었다. 전쟁을 선포했을 때 미 육군의 보유 병력이 19만 명에 불과한 데다 신병을 선발하고 훈련시키는 데만 최소한 6개월이 걸리고 그들을 유럽으로 보내는 데도 1개월이 걸리기 때문이다. 6월 중순경 180여 명의 선발대가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으나 전선에 투입되지 않고 훈련만을 반복해 프랑스인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연말쯤에 가서야 17만여 명이 유럽에 파견되어 비로소 미군은 제대로 된 진용을 갖췄다. 미국은 전쟁 기간 200만여 명의 병력을 유럽 전선에 파견, 이 가운데 5만여 명이 전사하고 20만여 명이 부상했다.
미국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초기 전황은 독일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미국 경제가 전시체제로 전환된 1918년에 이르러 전세는 역전되었고 1918년 9월 독일이 최후의 방어선으로 설정한 힌덴부르크 방어선마저 무너지면서 결국 1차대전은 3국 협상 측의 승리로 끝났다. 그때까지 독일은 975척의 U보트를 건조해 총1,482만t의 상선을 침몰시켰다.
참전은 20세기를 ‘미국의 세기’로 만들었고 미국의 위상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다. 116억 달러의 전쟁 채권을 포함해 1920년 말에는 270억 달러의 해외 자본을 갖게 되어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 되었다. 19세기 말 연평균 12억 달러였던 수출도 1차대전 중에는 연평균 65억 달러를 웃돌았으며 전후에도 47억 달러 이상의 활황을 유지했다. 전쟁 전 19억 달러에 못 미쳤던 금 보유량도 전후 몇 년 사이에 46억 달러로 늘어나 전 세계 금 보유량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바야흐로 미국의 세기가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