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매년 4월 15일은 美 메이저리그에서 ‘로빈슨 데이’라는데… 주인공 재키 로빈슨이 누구이길래

↑ 재키 로빈슨의 타격 모습. 등번호 42번은 미 메이저리그 모든 구단이 영구결번했다.

 

by 김지지

 

1947년 4월 15일은 미국의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날

1908년 흑인 복서 잭 존슨이 흑인 최초로 세계 헤비급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차고 1936년 제시 오언스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육상 4관왕에 올라 히틀러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도 미국의 백인 대중이 보고 즐기는 스포츠에는 여전히 흑인의 진입을 가로막는 높은 장벽이 쳐 있었다.

장벽은 2차대전이 끝나고 대중문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한 194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허물어졌다. 1946년 NFL(미식축구)이 흑인 선수를 받아들인 것을 시작으로 MLB(프로야구·1947), PGA(골프·1948), NBA(농구·1949)가 문호를 개방했으며 1958년 NHL(아이스하키)이 마지막으로 흑인의 진입을 허용했다. 이로써 미국에는 흑인 스포츠 시대가 만개했다.

1947년 4월 15일은 미국의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날이다. 장차 미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 최초의 흑인 신인왕, 최초의 흑인 MVP, 최초의 흑인 올스타, 최초의 흑인 명예의 전당 헌액자로 이름을 떨칠 재키 로빈슨(1919~1972)이 메이저리그 경기에 처음 출전한 날이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로빈슨은 미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가 아니라 20세기 최초의 흑인 선수다. 1884~1887년 사이에 15~20명의 흑인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뛴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1887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구단주 겸 선수이던 캡 앤슨의 선동으로 흑인 선수들이 모두 쫓겨나면서 메이저리그에는 흑인 선수들이 사라졌다. 흑인들은 1920년 5월부터 프로 선수로 다시 등장했지만 그들이 치고 달릴 수 있는 무대는 흑인들끼리만의 ‘니그로리그’였다.

재키 로빈슨

 

“인생은 구경만 하는 스포츠가 아니다”

로빈슨은 조지아주에서 소작농의 막내로 태어나 UCLA(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 시절 야구는 물론 육상, 농구, 수영 등에서 두각을 나타낸 만능 스포츠맨으로 활약했다. 그는 인종차별에도 결연히 맞섰다. 2차대전 때인 1942년 장교 양성 학교에 입학하려다가 거부당했지만 끝내 입학을 관철해 중위로 복무했으며 몽고메리 버스보이콧 운동(1955)이 있기 한참 전인데도 버스에서 흑인 자리로 옮기는 것을 거부해 군법회의에 소환되기도 했다. 인종차별을 하는 백인 동료 장교와도 싸움을 벌이다 불명예 제대할 뻔하기도 했다.

로빈슨은 1945년 제대 후 니그로리그의 캔자스시티 모낙스에서 야구 인생을 시작했다. 그때 로빈슨의 가능성을 눈여겨본 사람이 브루클린 다저스(현 LA 다저스)의 구단주 브랜치 리키였다. 그가 로빈슨을 불러 “어떤 모욕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선수를 원한다”고 하자 로빈슨이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입단이 성사되었다. 사실 당시 로빈슨 말고도 입단 제의를 받은 흑인 선수가 더 있었으나 그들은 극심한 인종차별에 지레 겁을 먹고 입단을 포기한 반면 로빈슨은 “인생은 구경만 하는 스포츠가 아니다”라며 과감히 차별에 맞서 새로운 역사를 썼다.

로빈슨은 1946년 브루클린 다저스 산하 마이너리그팀인 몬트리올 로열스에 소속되어 타율과 타점에서 리그 1위에 오르며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러자 리키는 이듬해 로빈슨을 메이저리그 선수로 승격시켜 1947년 4월 15일 다저스의 홈구장 에베츠 필드에서 열리는 보스턴 브레이브스와의 개막전에 출전시켰다. 등번호는 42번이었다.

로빈슨을 괴롭힌 것은 백인들의 실력이 아니라 그를 협박하고 위협한 인종차별이었다. 초기에는 욕설을 퍼붓거나 발길질을 하는 상대 선수, 불공정하게 경기를 진행하는 심판, 원정 경기 때 숙소와 식사 제공을 거부하는 호텔로 인해 괴로움을 겪어야 했다. 심지어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감독은 소속팀 선수들에게 로빈슨에게 고의적으로 부상을 입히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로빈슨

 

피 위 리즈의 어깨동무는 메이저리그 역사의 분기점

그러던 중 같은 팀 소속 피 위 리즈의 어깨동무 이후 선수들과 팬들이 그를 포용하면서 로빈슨은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어깨동무 내용은 이랬다. 1947년 5월 14일, 브루클린 다저스가 신시내티 레즈와 원정경기를 하는 날 경기장 분위기는 경기 전부터 살벌했다. 레즈의 홈구장인 크로슬리 필드를 찾은 6600여 명의 관중은 재키 로빈슨이 필드에 나서자 일제히 야유를 퍼부었고, 곧이어 니그로라는 말을 합창했다. 게다가 레즈 선수들마저 재키 로빈슨에 대한 폭언을 퍼부으며 경기를 거부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경기장 분위기가 최악으로 치달을 무렵 유격수로 출전한 로빈슨의 동료선수 피 위 리즈가 자기 자리를 떠나 1루수 재키 로빈슨으로 다가가더니 글러브를 벗고 로빈슨을 끌어안았다. 두 사람이 가볍게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것을 본 관중 사이에 순간 정적이 감돌았고 경기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속개되었다.

이날은 메이저리그 역사의 분기점이 되었다. 수많은 미국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백인 피 위 리즈가 흑인 재키 로빈슨을 끌어안은 이 사건은 미국 전체에 대단한 충격파를 던졌다. 특히 피 위 리즈는 당시 노골적인 인종차별 정책을 펴던 켄터키주의 중심도시 루이빌 출신이었다.

로빈슨은 이를 악물고 야구에만 전념해 데뷔 첫해에 타율 0.297, 12개 홈런, 48 타점, 29 도루를 기록하며 도루왕을 차지하고 그해 처음 제정된 신인왕을 거머쥐었다. 로빈슨의 활약에 힘입어 다저스는 7년 만에 내셔널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1949년은 로빈슨 최고의 해였다. 0.342의 타율로 수위타자에 오른 것을 비롯해 도루는 리그 1위, 타점과 안타는 2위, 득점은 3위를 기록해 내셔널리그 MVP를 수상했다. 자신을 저주하던 백인 야구인들에게 “날 싫어하든 좋아하든 사람대접만 해달라”고 싸워가며 이룬 성취다.

왼쪽 사진은 로빈슨(우측)과 피 위 리즈 동상이고 오른쪽 사진은 로빈슨 전기영화 ’42’의 한 장면. 오른쪽이 동료선수 피 위 리즈

 

메이저리그 전 구단이 등번호 42번을 영구결번으로 결정

1956년 시즌이 끝난 후 구단주가 37살이 된 로빈슨을 뉴욕 자이언츠로 트레이드하자 로빈슨은 1957년 1월 은퇴를 선언했다. 그때까지 10시즌을 뛰며 올린 성적은 통산타율 0.311에 137 홈런, 1,518 안타, 734 타점, 197 도루였다. 다저스는 그의 활약 덕에 10년간 6번이나 리그 우승을 차지해 월드시리즈에 진출하고 1955년에는 창단 처음으로 월드 시리즈 우승의 기쁨까지 맛보았다.

은퇴 후 로빈슨은 개인사업을 하면서 흑인들을 위한 일자리 찾기에 매진하고 NAACP(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 간부로 활동하며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열성적인 지지자로 흑인 인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62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고 1972년 등번호 42번이 브루클린 다저스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브로드웨이에서는 그의 인생을 다룬 뮤지컬인 ‘The First’가 제작되었으며 미국 우편국은 로빈슨의 우표를 발행했다. 2013년엔 영화 ‘42’가 개봉했다.

1997년 4월 15일에는 메이저리그 전 구단이 등번호 42번을 영구결번으로 결정함으로써 인종차별에 정면으로 맞선 그의 진정한 용기를 빛내주었다. 이후 매년 4월 15일 ‘로빈슨 데이’엔 모든 메이저리그 선수가 42번 유니폼을 입고 인종차별 벽을 깬 로빈슨을 추모하며 야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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