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봉오동 전투의 주역’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카자흐스탄에서 국내로 봉환된다는데… 그는 이국 땅에서 풍찬노숙하며 일본군과 무력투쟁을 벌였던 ‘게릴라전의 비조’였다

↑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한 홍범도 장군(왼쪽)과 최진동 장군이 대회장 밖에서 만나 환담을 나누고 있다. 홍범도가 차고 있는 권총은 레닌에게서 받은 선물로 알려져 있다.

 

by 김지지

 

문재인 대통령이 2020년 3월 1일 서울 배화여고에서 열린 101주년 3·1절 기념사를 통해 청산리 전투와 함께 항일 무장독립운동사의 대표적 전승(戰勝)으로 꼽히는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해 안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유해는 2021년 8월 15일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항일운동에 뛰어든 것은 갑오동학혁명과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홍범도(1868~1943)를 이해하려면 그에 대한 제3자의 기록이 없어 ‘홍범도 일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또 하나 문제는 홍범도가 직접 작성했다는 ‘친필 일지’가 남아 있지 않고 필사본만 전해지고 있어 이마저도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홍범도 일지’ 필사본에 따르면, 홍범도는 평남 평양에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났다. 7일 만에 어머니가 죽고 8세 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 가난이 대물림되었다. 머슴살이, 막일꾼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가 잠시 절에 들어가 간단한 한자와 한글을 깨우쳤다.

홍범도를 항일운동에 뛰어들게 한 것은 갑오동학혁명과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1895년 11월 강원도 회양과 김화의 경계 고개인 단발령에서 봉기하고 일본군 10여 명을 습격해 무기를 획득한 뒤 포수와 빈농 40여 명으로 의병 부대를 조직했다. 그 후 함경도 안변으로 이동, 북상하던 유인석 의병 부대와 연합해 일본군과 수 차례 전투를 벌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이후 은신할 목적으로 산포수 생활을 하면서도 의병대 활동을 이어갔다. 1904년 가을에는 함남 북청의 일진회 사무실을 습격해 30여 명을 척살했다.

영화 ‘봉오동전투'(2019년 개봉) 장면. 오른쪽은 최민식이 특별출연한 홍범도 장군.

 

신출귀몰하는 게릴라전의 비조

망국적 상황에서 포수들의 반일 의식을 부채질한 것은 1907년 9월 일제가 공포한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의 강제 시행이었다. 단속법은 총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산포수들의 생존을 위협했다. 홍범도는 1907년 11월 산포수, 화전 농민, 광산 노동자, 해산군인 등 70여 명을 모아 항일 의병전에 나섰다.

홍범도군은 신출귀몰하는 게릴라전의 비조였다. 1907년 11월 함남 후치령을 시작으로 함경도 삼수·갑산과 운파령 등에서 일제의 군경과 수십 차례 격전을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당시 함경도 사람들 사이에는 ‘홍대장 가는 길에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 군대 가는 길엔 비가 내린다’는 내용의 ‘날으는 홍범도가’가 유행했다. 하지만 일제의 대대적인 토벌에 밀려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1908년 11월 러시아령 연해주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고 13도의군에 참여했다. 13도의군은 의병 지도자들이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의 의병을 하나의 군단으로 통합하고 작전과 지휘를 단일 계통으로 통일하기 위해 1910년 6월 우수리스크 부근의 추풍에서 결성되었다. 홍범도는 함경도의 무산, 갑산, 종성 등으로 진공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동지 대부분이 체포되자 홀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일제는 홍범도를 체포하기 위해 아내와 큰아들을 인질로 삼았으나 홍범도가 꿈쩍도 하지 않자 부인과 아들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홍범도(오른쪽)와 함께 연해주에서 항일활동을 펼친 엄인섭 의병장

 

1919년 북간도에서 대한독립군 창설

홍범도는 연해주에서 활동하는 각종 독립단체의 간부로 활동하는 한편 노동판의 짐꾼이나 금광의 땅군으로 일하며 번 돈으로 무기를 구입하고 의병을 모집해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1915년 9월 북만주의 밀산 지역으로 이동해 학생들을 가르치고 청년단체를 조직하고 동포들과 연대를 다졌다. 그러던 중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다. 그 무렵 두만강 건너편의 북간도는 독립군들의 주무대였다. 특히 3·1운동 후에는 많은 독립군이 이곳을 거점으로 국내 진공작전을 펼쳐 독립군의 성지나 다름없었다. 10여 개의 독립군 단체가 북간도를 무대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창설되고 있을 때 홍범도 역시 1919년 5월 이곳에서 ‘대한독립군’을 창설해 총사령관이 되었다.

대한독립군은 1919년 8월 압록강을 건너 함경남도 혜산진의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한 것으로 이름을 떨쳤다. 3·1운동 후 만주와 러시아령에서 편성된 독립군 부대들의 국내 진공작전 중 최초의 공격이었다. 1919년 9월에는 함경남도 갑산군에 침투, 일제의 통치기관을 급습하고 10월에는 평안북도 강계의 만포진을 거쳐 자성군까지 진출, 일본군 70여 명을 살상하는 승전보를 알렸다. 이는 독립군 부대가 국내로 진공해 이룬 최초의 승전이었다.

 

김좌진 등과 함께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 승리로 이끌어

홍범도는 무기와 병참이 부족해지자 1919년 10월 대한독립군 100여 명을 이끌고 중국령으로 이동해 주로 나자구에 주둔하다가 1920년 5월 두만강변의 국경 지대에서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 연합, ‘대한북로독군부’라는 대규모 연합부대 진용을 갖췄다. 대한북로독군부는 길림성 왕청현 봉오동을 근거지로 삼아 최진동이 총지휘를 맡고 홍범도는 군사령관을 담당했다. 당시 52살이던 홍범도는 31살인 김좌진을 비롯해 최진동·안무 등과 함께 1920년 6월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의 연합작전에 의한 승전이고 이를 계기로 무장투쟁의 열기가 더욱 고조되었다는 점에서 1920년대의 본격적인 무력 항일투쟁의 신호탄이었다.

충남 홍성군 홍성역 앞에 있는 김좌진 장군 동상. 손이 가리키는 곳은 북만주 방향이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1920년 10월에도 김좌진(1889~1930)과 함께 청산리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김좌진·홍범도 연합부대는 어랑촌 전투를 끝내고 소부대로 나눠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서도 맹개골 전투, 만기구 전투, 쉬구 전투, 천보산 전투 등을 벌이며 일본군에게 타격을 가했다. 일본군의 야습을 받고 인근 절벽으로 피신했다가 적이 방심한 틈을 타 재야습을 가해 일본군의 사기를 완전히 떨어뜨린 10월 25일 밤의 고동하 전투 역시 항일투쟁사에 길이 빛나는 치열한 전투였다. 10월 26일 새벽 홍범도 부대가 고동하 골짜기 전투에서 마지막 승리를 장식함으로써 청산리 전투로 통칭되는 6일간의 크고 작은 전투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청산리 전투 승리 후 북로군정서 군대가 기념 촬영했다. (1920년 10월)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1937년 11월 카자흐스탄으로 이주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에는 일제의 토벌을 피해 1921년 1월 다른 독립군 부대와 함께 국경을 넘어 러시아령 이만에 집결했다. 독립군 연합부대원 중 홍범도와 220명의 대원은 1921년 3월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스보보드니)로 이동한 반면 김좌진, 김규식, 이범석 부대원 380명은 자유시로 가지 않고 다시 중국령으로 돌아갔다. 홍범도는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을 때 가해자인 한인 이르쿠츠크 공산당 편을 들었다. 이 때문에 이후 민족주의자보다 공산주의자로 분류되었다. 자유시 참변 후 홍범도는 휘하 병력과 함께 이르쿠츠크 소재 소련군 제5군단 합동민족여단에 편입되어 제1대대장으로 활동했다.

1922년 1월에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1차 극동인민대표자회의(혹은 원동인민대표자회의, 원동약소민족 대회, 극동민족대회, 극동피압박인민대회, 동방근로자대회,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의 등으로도 불림)에 김규식, 여운형, 조봉암 등 50여 명의 독립운동가와 함께 참석했다. 당시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이 주최한 이 대회에는 한국·중국·일본·몽골 등에서 148명의 대표가 참석했다. 홍범도는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접견하고 권총 1자루와 금화 100루블, 레닌이 친필서명한 ‘조선군 대장’이라는 증명서를 선물로 받았다.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자회의 개회식 사진. ‘전세계무산계급연합기래(全世界無産階級聯合起來)’라는 한자 표어 아래에 ‘공산당은 원동(遠東·극동) 해방에 선봉대니’라는 한글 구호가 적혀 있다.

 

1922년 1월 극동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한 홍범도(가운데)

 

1923년 군복을 벗은 후 연해주의 집단농장에서 일하다가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1937년 11월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했다. 1938년 4월 크질오르다에 정착한 뒤에는 밤에는 고려극장의 수위로 일하고 낮에는 정미소의 근로자로 살며 말년을 보냈다. 그런데도 기개는 잃지 않았다. 1941년 독·소 전쟁이 벌어졌을 때 일본의 동맹국 독일을 무찔러야 한다며 73살 고령임에도 ‘현역 징집’을 간청할 정도로 항일 투쟁에 적극적이었다. 1943년 10월 25일 75세를 일기로 카자흐스탄에서 생을 마감했다.

오늘날 홍범도와 김좌진 두 장군은 우리나라 항일무장투쟁사에 우뚝 솟아 있는 두 거봉이자 영웅으로 인정받고 있다. 다만 출신과 사후 평가에서는 사뭇 대조적이다. 김좌진이 부유한 부르주아였다면 홍범도는 뼛속까지 가난했던 프롤레타리아였다. 남한에서는 김좌진을 청산리 전투의 신화적 인물로 평가하지만 북한과 연변학계에서는 홍범도를 더 높이 추앙한다. 이유는 홍범도가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는 등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한 반면 김좌진은 민족주의 노선을 고수하다 공산당원에게 피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청산리 전투가 두 사람의 연합작전에 의한 승리였는데도 남한은 김좌진을 부각하고 북한은 아예 홍범도의 단독작전으로 소개한다.

홍범도(왼쪽)와 김좌진 장군

 

홍범도 이해하려면 ‘홍범도 일지’ 필사본에 의존해야 해

홍범도와 관련한 ‘일지’는 몇 종류가 있다. 첫째는 홍범도 자신이 메모 형식으로 기록한 ‘목필책’이다. 이 목필책은 홍범도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한 뒤 1938년부터 1940년 사이의 어느 때에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크질오르다의 고려극장 희곡작가 태장춘과 그의 부인 이함덕이 이 목필책을 토대로 삼아 홍범도와 나눈 대화 내용을 정리한 것이 ‘태장춘판(이함덕판) 홍범도 일기’다. 태장춘은 연극 ‘홍범도’의 희곡을 완성해 1941년 고려극장 무대에 올렸다.

1950년대 후반 우즈베키스탄에 거주하고 있는 이인섭이 고려극장의 배우이자 당서기 김진에게 홍범도에 관한 자료를 부탁했다. 김진은 1958년 4월 ‘태장춘판’을 이인섭에게 보냈다. 이인섭은 난필의 태장춘판을 1958년 6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깔끔하게 정리해 ‘조선 의병대장 홍범도 수기’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인섭판 홍범도 일기’다. 1959년 여름 이인섭은 모스크바에 거주하고 있는 소설가 김세일을 찾아가 이인섭판과 태장춘판을 건네주며 홍범도의 생애를 소설로 쓸 것을 권유했다. 김세일은 이것을 참고해 1959년부터 1965년까지 소설 ‘홍범도’를 카자흐스탄 한글신문 ‘레닌기치’에 연재했다.

홍범도와 새 아내 이인복. 가운데는 이인복이 데려온 손녀 예카테리나

 

‘홍범도 일기’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사람은 핀란드 헬싱키대 출신의 언어학자 고송무였다. 그는 1989년 5월 소련을 방문했을 때 김세일의 소설 ‘홍범도’와, 태장춘판을 필사한 홍범도 일기(김세일판)를 김세일에게서 넘겨받았다. 고송무가 국내로 가져온 소설은 1990년 11월 김세일 저 ‘역사기록소설 홍범도’(전 5권)로 발간되었고 ‘홍범도 일기’는 부록으로 게재되었다. 오늘날 홍범도 일지 중 홍범도 자신이 쓴 목필책은 소실된 상태이고 태장춘판(복사본), 이인섭판, 김세일판만이 남아 있다. 김세일판은 이인섭판에 비해 오자와 탈자가 많고 첨삭된 부분도 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이인섭판을 홍범도 일기의 원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1995년 정신문화연구원이 발간한 ‘한국독립운동사 자료집-홍범도편’은 태장춘판(복사본)을 근거로 한 것이다.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은 김세일이 소장하고 있다가 기증한 이인섭판(1958.6 필사)이다.

 

카자흐스탄에서 유해 봉환 늦어지는 이유는

우리 정부는 2019년 4월 카자흐스탄 현지에 묻혀 있던 독립운동가 계봉우 지사와 부인 김야간, 황운정 지사와 부인 장해금 등 모두 4위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했다. 카자흐스탄에서 독립유공자의 유해를 모셔온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카자흐스탄에 묻혀 있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국내로 봉환하지 못했다. 당연히 1순위가 돼야 할 카자흐스탄 최초의 독립운동가 유해 봉환에서 홍범도 장군이 탈락한 ‘이변’이 벌어진 것이다. 왜 그랬을까.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 있는 홍범도의 묘역 (출처 이우현 국회의원)

 

사실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문제는 카자흐스탄과 수교 이래 수십 년째 풀리지 않는 난제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0년 구 소련과 수교한 이래 역대 대통령은 모두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을 타진해왔다. 구소련 붕괴 후에는 그 대상이 카자흐스탄이 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 역시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을 카자흐스탄 측에 요청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신 북방정책’을 내건 문재인 대통령 역시 2019년에는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에 실패했다.

가장 큰 문제는 홍범도 장군과 북한과의 ‘연고’였다. 홍범도 장군의 고향이 북한의 평양인데다 북한은 남한과 달리 만주 일대의 무장독립운동을 정통으로 보고 있다. 홍범도 장군은 고려공산당 내 이르쿠츠크파와 상하이파의 내분으로 발생한 ‘자유시 참변’(1921) 직후 소련군에 정식 편입됐고, 1927년에는 소련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한 전력도 있다. 현지 고려인 동포 조상들의 70%가 평안도, 함경도 등 북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도 작용하고 있다. 한국 정부 역시 홍범도 장군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해왔다. 박정희 정부 때인 1962년에는 홍범도 장군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했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6년에는 해군의 1800t급 최신 잠수함을 ‘홍범도함’이라고 명명했다. 2018년에는 홍범도 탄생 150주년 기념우표를 발행하기도 했다.

최근이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봉환할 최적기란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 이는 북한과 카자흐스탄이 1992년 수교했으나, 북한이 1998년 카자흐스탄 현지 대사관을 철수하면서 빈껍데기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카자흐스탄의 ‘칸’으로 불리는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이 대표적인 친한파(親韓派)라는 점도 우리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4월 카자흐스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한국 국민은 2019년 또는 늦어도 봉오동전투 100주년인 2020년에는 홍범도 장군 유해를 봉환했으면 좋겠다는 열망이 뜨겁다”고 말했을 때 카자흐스탄 대통령이 “양국 관계와 국민 간 교류 등을 감안해 2020년 봉오동 전투 행사 때까지 해결될 수 있도록 직접 챙기겠다”고 밝힌 것이 이번 유해 송환의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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