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베니토 무솔리니 로마 입성… 이탈리아 파시즘의 시작

“정권을 넘겨주지 않으면 로마로 쳐들어갈 것이다.” 1922년 10월 베니토 무솔리니가 나폴리에서 열린 파시스트 대회에서 이렇게 외쳤을 때 검은 셔츠를 입은 수 천명의 추종자들이 일제히 호응했다. “로마로!”. 1차대전이 끝났어도 이탈리아의 사회분위기는 여전히 암울했다. 250만 명의 제대 군인이 쏟아져 나오면서 실업이 확산됐고 인플레는 경제를 압박했다. 무솔리니는 이같은 분위기를 틈타 1919년 결속력이 강한 전위대 조직 ‘전투 파쇼’를 결성하고 파시스트의 날을 꿈꿨다.

무솔리니의 야망을 충족시켜줄 호기가 찾아든 것은 1922년 여름이었다. 사회당이 총파업에 돌입했고 정부는 곧 무너질 것 같았다. 10월 28일 저녁, 수 만명의 파시스트 대원들이 로마 교외에 도착했을 때 정부는 비상사태를 준비하며 국왕의 재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의회는 군소당파로 사분오열돼 있었고 국왕은 파시스트 병력에 대한 과장된 보고로 겁을 먹은 탓인지 파시스트 격파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 시각, 무솔리니는 진격이 실패할 경우 스위스로 망명할 생각으로 로마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 사태를 관망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그에게 총리직을 요청하는 전화가 걸려왔고 그제서야 무솔리니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10월 30일 당당하게 로마에 입성한 무솔리니는 이튿날 역대 최연소 총리에 올랐다. 어처구니없는 무혈 쿠데타의 승리였고, 무솔리니 생애에서 가장 의기양양했던 순간이었다. 반대당이 해산되고 언론이 정부의 선전기관으로 추락했지만 국민들은 그를 믿고 따랐다. 끊임없는 파업과 소요에 시달리다 파시즘의 현란한 선전기술에 서서히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경제가 안정궤도에 오르고 지난날의 영광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독재정치에 복종하겠다는 태도였다.

한동안 질서가 회복되고 일련의 사회개혁과 공공사업계획도 성공적으로 추진됐다. 그러나 국민들이 서서히 파시스트의 실체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파시즘의 종양이 이탈리아 전역에 퍼져있었다. 히틀러는 동반자였고 후원자였다. 함께 스페인 내란(1936년)에 개입해 프랑코를 지원한데 이어, 강철동맹(1939.5)을 체결하고 2차대전에 참전(1940.6)함으로써 이탈리아를 파멸로 내몰았다. 국민의 오판이 부른 결과치고는 댓가가 너무 혹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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