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멕시코의 34년 철권 통치자 디아스 쫓아낸 멕시코 혁명 발발

34년 철권 통치자 포르피리오 디아스가 멕시코를 근대적인 공업국가로 변모시킨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외국자본을 도입하고 농민의 희생을 발판으로 이룬 경제성장이다보니 하층민들의 삶은 늘 힘들고 고단했다. 개발독재에 대한 반발이 잇따랐고, 1910년의 대통령선거 때는 젊은 변호사 마데로가 디아스의 대항마로 등장한다. 디아스가 또다시 부정선거로 승리하자 프란시스코 마데로는 망명지 미국에서 반(反)디아스 운동을 펼쳤다. 1910년 11월 20일 오후6시, 멕시코인들의 총궐기를 호소하는 마데로의 외침에 따라 멕시코 혁명이 봉화를 올린다. 혁명은 남부의 에밀리아노 사파타와 북부의 판초 비야가 본격 가담하면서 활기를 띠었다. 사파타는 ‘멕시코의 전봉준’이었고, 판초 비야는 ‘멕시코의 임꺽정’이었다.

1911년 5월 디아스가 쫓겨나고 마데로가 대통령이 되면서 혁명은 성공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하층민들의 생활상은 여전했다. 대지주 출신의 마데로가 기득권 세력과 소극적인 타협을 추진한 것이 주된 이유였다. 사파타와는 토지문제를 둘러싸고 의견대립이 팽팽했다. 사파타에게 혁명은, 농민들의 토지를 지키고 빼앗긴 토지를 되찾는 것을 의미했다. 농민군이 다시 일어서고 치안까지 악화되면서 반동의 조짐이 보였다. 1913년 2월 쿠데타로 마데로 정권이 전복되고 반혁명 정권이 들어서면서 멕시코에는 다시 유혈이 낭자했다. 흩어졌던 혁명세력들이 다시 결집해 카란사가 실권을 장악했으나 사파타의 토지개혁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었다.

사파타는 판초 비야와 손을 잡고 카란사와 전선을 형성했다. 양쪽 모두 혁명을 꿈꿨지만 이상이 달랐다. 사파타는 자치적인 농촌 공동체를 추구했고 카란사는 중앙집권적인 근대화를 추진했다. 혁명과 혁명의 반목이었다. 격돌은 불가피했다. 초기 싸움에서는 사파타가 승기를 잡았으나 지방 유토피아 실현에 집착하고, 현실적인 중앙 정치권력의 실체를 깨닫지 못한 것이 사파타의 비극이었다. 결국 카란사가 대통령이 되고 사파타는 게릴라 투쟁을 전개하다 1919년에 피살된다. 1994년의 봉기로 유명해진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은 사파타에서 딴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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