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스페인 민주주의의 수호자’ 후안 카를로스1세 즉위

“내 시체를 넘고 가라.” 쿠데타 주동세력들에게 후안 카를로스1세가 일갈하면서 상황이 일변했다. 새벽1시, 군복차림으로 TV에 나타난 카를로스가 “폭력으로 민주과정을 방해하려는 자들의 행위를 용납할 수 없다.”며 단호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기세등등하던 1981년의 쿠데타는 풍선처럼 터졌다. 쿠데타는 물거품이 되었고, 민주주의는 되살아났다. 프랑코가 죽고 이틀이 지난 1975년 11월 22일, 카를로스가 44년만에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했으나 국민들의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37세의 젊은 국왕이 36년간의 프랑코 독재가 남겨놓은 구 질서에 도전할만한 의지와 용기를 갖고 있는지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더구나 카를로스는 프랑코가 지명한 후계자였다.

프랑코 사후, 스페인은 ‘프랑코없는 프랑코체제’를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자유화·민주화의 길을 선택할 것인지 중대한 갈림길에 놓여있었다. 정치적 소용돌이를 잠재우고 새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카를로스에게 주어진 책무였고 역사적 소명이었다. 카를로스는 이들 세력을 적절히 조화시켜 차근차근 민주화·자유화의 길을 밟았다. 1976년에는 정치범을 석방시키고 젊고 능력있는 아돌프 수아레스를 총리로 임명, 오랜 독재체제에 메스를 가했다. 1977년에는 41년만의 첫 민주적 총선도 무난히 치러냈다. 국민들은 점진적 민주화를 표방하는 민주중도연합의 수아레스를 선택했다. 신헌법이 제정됐고, 사회노동당(1982년)·국민당(1996년)·사회노동당(2004년)으로 좌우 정당이 번갈아가며 집권함으로써 민주적 양당체제가 구축됐다. 이 기간 유럽연합과 나토에 가입하고 바르셀로나 올림픽(1992년)도 치렀다. 어느덧 마르크스주의와 프랑코주의는 서서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카를로스의 탕평정책이 든든히 뒤를 받쳐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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