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日 에도막부에 반대하는 反 막부 세력, 메이지 천황 중심의 신정부 수립 선언

일본 메이지유신의 초입에는 천황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675년만에 이뤄진 천황의 부활이 천황의 의지라기보다는 권력다툼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도쿄만 앞바다에 출현하고 5년 뒤 불평등한 미일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250여 년간 절대권력을 행사해온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시대는 석양빛이 완연했다.

막부(幕府)체제에 불만을 품어온 반막부 세력들은 개국을 반대하고 천황을 옹립하기위한 ‘존왕양이론(尊王攘夷論)’를 내세워 막부를 간접 비난했다. 사쓰마번(가고시마현)과 조슈번(야마구치현)이 중심에 있었지만 여전히 건재한 막부에 맞서기 위해서는 명분과 권위가 필요했다. 오랜 세월 숨죽이고 지내온 천황이 해결책이었다. 천황이 거주하는 교토궁(京都御所)의 조정대신들도 ‘존왕토막(尊王討幕)’의 기치를 올리며 바쁘게 움직였다. 반막부파가 천왕의 왕정복고를 꾀하자 막부의 ‘공무합체(公武合體)파’가 새로운 전술을 들고나왔다. 쇼군이 국가통치를 포기하고 통치권을 천황에게 바친다는 이른바 ‘대정봉환(大政奉還)’이었다. 이는 천황과 에도막부가 화합하여 쇼군의 권위도 살리고 천황가의 왕정복고도 이루자는 유화책이었지만 실은 형식만 천황체제로 삼고 실권은 쇼군이 계속 장악하겠다는 기만책이었다.

1867년 10월 14일(음력) 쇼군이 대정봉환을 상표(上表)하고 천황이 수용할 뜻을 밝히자 반막부세력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칫 겨우 되찾게 된 천황가 친정의 실권을 다시 막부 정권에 빼앗길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당시 천황은 15세에 불과한 메이지(明治)였다. 그러나 천황가에는 난세의 풍운아 이와쿠라 토모미가 있었다. 대정봉환에 허를 찔린 토모미는 천황의 이름으로 에도막부를 타도해도 좋다는 가짜 밀칙을 내렸다. 그리고 사쓰마·조슈번 세력과 함께 무력으로 막부 세력 제거에 나섰다.

첫 단계로 1867년 12월 9일(음력), 반막부파 세력이 ‘왕정복고의 대호령(大號令)’을 선언했다. 쇼군의 막부정권을 즉각 완전 해산시키고 메이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신정부를 수립한다는 선언이었지만 이 역시 가짜 명령서였다. 막부 세력이 굴복할리 없어 내전으로 이어졌다. 결국 천황군이 막부군을 토벌함으로써 메이지시대가 역사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내전에서 전사한 신정부군(천황군)을 위해 사당을 지은 것이 오늘날의 야스쿠니 신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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