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까지 서양미술은 고전주의, 낭만주의, 인상주의 등 각 유파를 거치면서 기법이나 소재 면에서는 차이가 있었어도 공통적인 정서는 사실주의였다. 그러나 세기말 전통적인 회화개념에 반기를 든 젊은 작가들의 등장으로 서양미술의 전통은 곧 벽에 부딪혔다. 20세기 문턱을 넘어서기 전인 1884년, 프랑스 미술협회가 주관하는 관전(官展)에 불만을 품은 진보적 화가들이 독립미술가협회를 조직해 무(無)심사제의 ‘살롱 드 앙데팡당전’을 독자적으로 설립한 것이 변화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무심사 원칙으로 ‘앙데팡당전’의 작품 수준이 들쭉날쭉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대안으로 1903년 ‘살롱 도톤’이 설립됐다. ‘살롱 도톤’은 실험적인 작가에게 문호를 개방하면서도 심사위원제를 두어 일정한 작품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05년 10월 18일, 제3회 ‘살롱 도톤’이 개막됐을 때 제7전시실에는 전과는 다른 분위기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훗날 ‘입체파’로 불린 마티스, 드랭, 블라맹크, 루오 등의 작품이었는데 전시실 중앙에는 15세기풍의 청동상이 전시돼 있었다. 이들이 ‘포비슴(Fauvism)’ 즉 ‘야수파’로 불리게 된 것은 조각품을 본 미술평론가 루이 보셀이 신문에 “야수(포브) 가운데 있는 도나텔로(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의 조각가)”라고 평한 것이 계기가 됐다.
야수파를 대표하는 마티스는 눈에 보이는 시각 세계를 그대로 묘사하지 않고 거기서 느끼는 자신의 감정을 강렬한 색채와 세련되지 못한 형태 감각 그리고 대담한 붓터치 등으로 표현해냈다. 그의 관심은 색채와 형태가 지닌 원시적인 순수성과 생명력을 그림에 불어넣는 데 있었다. 야수파의 등장은 20세기 최초의 전위 회화운동이었고 모더니즘의 기점이기도 했다. 근대미술의 일대 전환점을 마련한 야수파였지만 특정 이론이나 주장에 의한 주의나 유파가 아니었기 때문에 1908년 입체파 운동 이후 각자 독자적인 화풍으로 분열되어 짧은 활동기를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