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앙리 마티스
야수파의 등장은 20세기 최초의 전위 회화운동이자 모더니즘의 기점
19세기 말까지 서양미술은 고전주의, 낭만주의, 인상주의 등의 유파를 거치면서 기법이나 소재 면에서는 차이가 있어도 공통적인 정서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 재현하는 사실주의였다. 예술가들은 푸른색 하늘이나 초록색 잔디처럼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그렸고, 또한 그렇게 그린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말 전통적인 회화 개념에 반기를 든 젊은 작가들이 등장하면서 서양미술의 오랜 전통이 벽에 부닥쳤다. 20세기 문턱을 넘어서기 전인 1884년, 프랑스미술협회가 주관하는 관전(官展)에 불만을 품은 진보적 화가들이 독립미술가협회를 조직해 무심사(無審査)를 표방한 ‘살롱 드 앙데팡당전’을 독자적으로 설립한 것이 변화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무심사 원칙 때문에 앙데팡당전의 작품 수준이 들쭉날쭉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1903년 시작된 ‘살롱 도톤’전이다. ‘살롱 도톤’전은 실험적인 작가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면서도 심사위원제를 두어 일정한 작품 수준을 유지했다. 1905년 10월 18일부터 11월 25일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3번째 ‘살롱 도톤’전에는 1,600여 점의 작품이 출품되어 성황을 이뤘다. 전시장은 작품의 성격에 따라 여러 공간으로 구획되었다. 그중 제7전시실에는 앙리 마티스(1869~1954)를 비롯해 앙드레 드랭, 모리스 블라맹크, 앙리 망갱 등 비슷한 화풍의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마티스는 ‘살롱 도톤’전에 10점을 출품했다. 그중에서도 자신의 두 번째 아내 아멜리 파레르를 모델로 한 ‘모자를 쓴 여인’(25×26㎝)이 가장 파격적이었다. 마치 어린애가 그린 것같은 크고 화려한 모자는 물감을 칠했다기보다 물감을 덕지덕지 붙인 모습이고, 얼굴은 녹색, 연보라색, 파란색으로 칠했으며 목에는 빨강과 주황을 마치 낙서하듯 칠했다. 윤기 나는 머리카락은 주홍색 물감을 한두 번 칠해 마무리했는데 눈썹과 입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상반신에는 마치 마감세일에서 건진 옷더미 같은 것을 걸쳐놓았으며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배경에는 네 다섯 가지 물감을 엉성하게 칠했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최고의 예술가가 아니라 벽에 페인트를 테스트하는 일이 더 익숙한 실내장식가가 30분 만에 뚝딱 완성한 그림 같아 보였다. 모델인 아내도 한껏 꾸민 화사한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푸른색 계열로 거칠게 그려진 그림을 보고 화를 냈다.
원색을 화면에 거칠게 문질러서 지저분해진 초상화는 여인을 우아하고 감미롭게 묘사하던 기존의 초상화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회화의 전통을 파괴한 초상화는 주최 측마저 전시를 꺼릴 만큼 충격적이었다. 평론가들은 전통미술이 추구한 미적 가치를 짓밟은 마티스의 행위에 경악했다. “예술가들이 한 동이의 물감을 대중의 얼굴에 퍼부은 것 같았다”고 혹평한 평론가도 있었다. 관람객들도 야유를 퍼붓고 경멸했다. 강렬한 색채, 세련되지 못한 형태 감각, 길들여지지 않은 표현 방식 등이 자연의 사실적인 재현에 익숙해 있던 동시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마티스는 살롱 도톤전을 방문했다가 관람객의 태도를 보고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초상화의 주인공인 아내에게도 근처에 가지 못하게 했다.
미적 가치를 짓밟은 마티스의 야만적인 행위에 경악
마티스와 함께 출품한 드랭, 블라맹크의 그림들도 마티스의 그림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들의 작품도 한결같이 강렬한 색채, 자유분방한 붓, 느슨한 구성으로 파격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전통적인 명암법이나 원근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서구 전통미술에서 볼 수 없었던 직접적이고 강렬한 색채를 부각했다.
드랭이 1905년 여름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콜리우르로 바캉스를 떠나 그곳에서 완성하고 ‘살롱 도톤’전에 출품한 ‘콜리우르 항의 배들’(38×46㎝)도 마찬가지였다. 드랭은 아기자기한 배들이 늘어선 황금빛 해변이 아니라 불꽃처럼 시뻘겋게 칠한 모래사장을 통해 그 열기를 그림에 표현했다. 얼기설기 정박한 고깃배들은 파란색과 주황색 점으로 드문드문 그려 눈에 띄게 했다. 멀리 보이는 산은 꼼꼼하게 그리지 않고 그저 분홍색과 갈색 물감을 두어 번 대강 칠해 화려한 색채 조합에 균형과 틀을 부여했다. 바다는 짙은 청색, 잿빛이 감도는 초록색으로 짧은 선을 그어 표현했다.
블라맹크가 출품한 ‘부지발 지방의 라 마쉰 레스토랑’(60×81㎝) 역시 사실상 색의 독립 선언을 의미했다. 블라맹크는 ‘살롱 도톤’전에서 “우리는 색을 다이너마이트처럼 다루었고, 그것을 폭파시켜 빛을 만들었다”라고 역설했다. 세 사람은 회화적 기교는 물론 데생과 명암까지 무시했다. 대상을 충실하게 묘사하기는커녕 화가에게 금기인 원색을 버젓이 사용하고 해부학적인 지식도 저버렸다.
마티스는 자신의 이러한 화풍에 대해 “정확함이 진실은 아니다”라는 말로 이해를 구했다. 마티스가 이런 방식의 그림에 집착한 것은 색채가 형태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색채야말로 인간의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라고 믿었다. 그래서 하늘은 푸른색 대신에 노란색으로, 사람의 얼굴은 연두색 등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강렬한 색채를 사용했다.
‘모자를 쓴 여인’은 혹평을 받았는데도 그림을 구입하겠다는 사람이 있었다. 파리에서 활동하는 미국의 여류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의 오빠 리오 스타인이었다. 리오는 “지금껏 본 그림 중 가장 형편없는 물감 자국”이라면서도 그림을 구입했다. 리오가 거금을 주고 그림을 구입한 덕분에 마티스는 목돈을 손에 쥐게 되고 자신감도 찾고 파리 미술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런데 마티스의 그림이 전시된 그 전시실에는 고전적인 기법에 따라 조각된 알베르 마르케의 소년 두상(頭像)도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자 같은 전시실에서 그림과 조각의 극적인 대비를 본 평론가 루이 보셀이 “이 상(像)의 소박함은 너무나도 생생한 색채의 광란 속에 있어서 사람들의 눈을 당혹케 한다. 그것은 야수들(포브스)에 둘러싸인 도나텔로(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의 조각가)다”라는 비평을 한 신문에 썼다. 물론 비평은 르네상스의 고전적 전통에서 볼 때 원색의 난무와 제멋대로 휘갈긴 듯한 붓자국이 마치 야수들 같다고 조롱한 것이지만 이 평론 덕분에 ‘야수주의(포비즘)’라는 명칭이 탄생했다.
1905년 파리에서 ‘살롱 도톤’전 후 ‘야수파(포지즘)’로 불려
장차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게 될 마티스는 프랑스 북부의 작은 시골마을 보잉에서 잡화점과 종묘공급사업을 하는 부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887~1889년 파리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법률사무소의 서기로 근무했으나 금방 싫증을 느꼈다. 그러던 중 1890년 급성 맹장염에 걸려 몇 개월 간 병원에 입원했다.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병실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 순간 깊숙이 잠들어 있던 재능과 열정이 깨어났다. 훗날 그는 “물감 통을 손에 든 그 순간, 나는 그것이 내 길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미술 공부를 하겠다며 아버지와 한바탕 크게 싸운 후 1891년 가을 파리로 가 아카데미 줄리앙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그리고 두 번이나 낙방한 끝에 1892년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국립미술학교)’에 입학, 6년 동안 유명 상징주의 화가이자 교수인 귀스타브 모로를 사사했다. 당시 모로는 마티스를 보고 “자네는 회화를 단순화할 사람”이라는 유명한 말로 마티스의 미래를 예언했다. 스승의 말대로 마티스는 다른 화가들처럼 자연을 똑같이 그리는 사실적인 화법이 쓸모가 없다고 생각해 학교를 그만두고 대담한 색채와 강렬한 선, 현대적인 주제로 실험을 하기 시작했다. 사생활에서는 1897년 첫 부인과 헤어지고 그해 10월 생기 넘치고 매력적인 아멜리 파레르를 만나 새 활력을 찾았다.
마티스는 인상파에서 출발했으나 점차 고갱, 고흐, 세잔의 작품을 접하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마티스의 그림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단순하고 원색적으로 변했다. 어떤 그림은 전체적으로 빨갛고, 어떤 그림은 그저 파랬다. 1899~1901년 드랭, 블라맹크 등과도 만나 비묘사적이고도 대상에서 벗어난 색채를 실험하면서 특유의 독자적인 방법을 추구했다. ‘살롱 도톤’전 이후 초기에는 야수파들도 ‘야수주의’라는 이름에 당황하는 듯했으나 1907년부터는 스스로 이 이름을 즐겨 사용했다.
야수주의 운동은 주관의 표현, 형식의 해방이라는 점에서 20세기 미술의 발판이 되고 근대미술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야수파의 등장은 20세기 최초의 전위 회화운동이었고 모더니즘의 기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특정 이론이나 주장에 의한 주의나 유파가 아니다 보니 1908년 이후 각자 독자적인 화풍으로 분열되어 짧은 활동기를 마감했다.
마티스의 대표작 중에는 1910년 작 ‘춤’(260×391㎝)도 있다. 선과 색채, 형태를 혁명적으로 적용한 이 그림은 20세기 회화의 중요한 운동인 표현주의와 추상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이 작품을 그리기 전 마티스는 “세 가지 색이면 충분하다. 하늘을 칠할 파란색, 인물을 칠할 붉은색, 그리고 동산을 칠할 초록색이면 충분하다. 사상과 섬세한 감수성을 단순화시킴으로 우리는 고요를 추구할 수 있다. 내가 추구하는 유일한 이상은 ‘조화’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 해변에서 보았던 춤추는 카탈로니아인 어부들에 관한 기억을 더듬어 ‘춤’을 완성했다. 밝은 하늘을 배경으로 나체의 다섯 사람이 손에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이 그림은 또다시 야만적이라고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극도의 단순함 속에서 원시적인 에너지가 꿈틀대는 작품이라고 칭송을 받고 있다.
1913년 뉴욕 아모리 빌딩에서 개최된 전시회에서 마티스를 포함한 야수파의 그림이 처음 미국인들에게 소개되었을 때도 관객들의 반응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전시회가 시카고로 옮겨갔을 때,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학생들과 교수들은 마티스의 반전통적인 색채 사용과 인간 형태의 왜곡된 변형에 분개한 나머지 ‘앙리 마티스 모의재판’을 열고 그의 그림 3점의 복사본을 불태워버리는 분노의 퍼포먼스까지 벌일 정도였다.
피카소와 더불어 현대미술을 견인한 미술의 거장
1930년대 마티스 곁에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1917년 러시아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프랑스로 이주한 20대 초반의 젊고 똑똑한 여성 리디아 델렉토르스카야(1910~1998)가 있었다. 1932년부터 마티스의 비서로 활동한 그녀는 모델 역할도 하며 마티스가 작품을 어떻게 완성해 나가는지 관찰한 후 기록으로 남겼다. 예민하고 꼼꼼한 성격의 마티스에게는 흠잡을 데 없는 최고의 조수였다. 아내 아멜리는 리디아에게 질투를 느껴 리디아를 내보내지 않으면 떠나겠다고 최후통첩을 했다. 마티스가 리디아를 해고하는 것은 안 되는 일이라고 완강히 맞서면서 두 사람은 격렬한 다툼 끝에 1939년 갈라섰다. 호사가들은 마티스와 리디아가 동침(同寢)하는 사이라고 의심했지만 마티스는 끝까지 부인했다. 훗날 공개된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동침의 흔적은 없다. 마티스는 아내와 딸을 비롯해 수많은 모델을 세워 작업을 했고 작품에 모델 이름을 넣지 않아 기록은 불분명하지만 리디아를 대상으로 무려 90점이 넘는 유화를 남겼다.
마티스는 말년에 지독한 관절염 때문에 붓을 쥐기조차 힘들어지자 손에다 붓을 묶어서 그림을 그렸다. 곧 이것마저 어려워져 더 이상 화필을 잡을 수 없게 되자 색종이를 가위로 오려서 붙이는 콜라주 작업을 고안해냈다. 종이 오리기는 침대나 안락의자에 누워서도 조수의 도움을 받아 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 그는 “가위는 연필보다 더 한층 감각적이다”라는 말로 색종이가 만들어내는 유희의 즐거움을 표현했다. 이 작업은 1954년 11월 3일 8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계속되었다. 죽기 전날에는 리디아를 앉혀놓고 병상에서 마지막 초상화를 스케치했다. 22살에 그의 집에 들어온 리디아도 어느덧 40대의 중년이 되어 있었다. 마티스는 자신에게 젊음을 바친 그녀를 위해 많은 작품을 선물로 주었고 리디아는 작품을 파는 대신 자신의 고국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미술관에 기증했다.
야수주의로 시작한 현대미술은 곧이어 입체주의(1908), 절대주의(1915), 다다이즘(1916), 신조형주의(1917) 등으로 이어지다가 잠시 뜸을 들인 뒤 1950년대 들어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를 선보였다. 1960년대에는 신현실주의, 신구상운동, 개념미술 등 각양각색의 흐름을 이루며 현대미술을 꽃피웠다. 마티스는 색이 무엇인지를 인류에게 가르쳐준 위대한 스승이었으며 피카소와 더불어 현대미술을 견인한 20세기 미술의 거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