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6·25 전쟁 다부동 전투 막 올라… 개전 후 밀리기만 하던 전투 양상, 비로소 승전

6·25 발발과 함께 후퇴만을 거듭해온 국군과 미군이 낙동강 전선에 배수의 진을 친 것은 1950년 8월 초였다. 국군과 미군이 낙동강을 건넌 후 8월 3일 워커 미8군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경북 왜관의 낙동강 철교 등 모든 교량이 폭파되고 방어선이 쳐졌다. ‘워커 라인’으로 불린 동서 80㎞, 남북 160㎞의 방어선에는 왜관 북쪽을 기점으로 동해안의 영덕까지 국군 5개 사단이 포진했고, 낙동강 본류를 따라 진해만까지 이르는 남쪽 전선은 미군 3개 사단이 배치됐다. 워커는 이 방어선이 뚫릴 경우에 대비해 포항∼왜관∼마산을 잇는 또다른 방어선 ‘Y선’을 준비했고, 그 뒤에는 마산∼밀양∼울산을 잇는 최후의 방어선 ‘데이비슨 라인’을 구상했다. ‘데이비슨 라인’은 방어선이라기보다 유사시 미군이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하는데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한반도의 덩케르크’였다.

당시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북한군은 13개 사단. 이들과 맞설 우리 군은 국군·미군 합쳐 8개 사단 뿐이었다. 3.5인치 대전차로켓으로 북한군의 T34 전차를 파괴할 수 있게 되고 제공권을 장악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북한군은 대구쪽을 주공선으로 삼아 5개 사단을 투입했으나 이들과 맞딱뜨릴 아군은 국군 1사단과 6사단 그리고 미 제1기병사단 뿐이었다. 특히 왜관과 칠곡군 다부동에서 적과 정면으로 맞서야 했던 1사단(사단장 백선엽)이야말로 이번 전투의 승패를 좌우하는 핵심 사단이었다.

8월 4일 오전7시 첫 포성이 울리면서 ‘다부동 전투’의 막이 올랐다. 미군의 F-80이 강을 건너려는 북한군을 향해 네이팜탄을 떨어뜨리고 8월 16일에는 B29 98대가 26분 동안 폭탄 3234개(960톤)를 적 후방에 쏟아부었지만 북한군은 끊임없이 낙동강 도하를 시도했다. 결국 북한군의 계속된 공격에 ‘워커 라인’은 무너졌고 ‘Y선’까지 위태로웠다. 그러나 미군의 지원과 죽음을 무릎쓴 1사단의 방어의지로 낙동강 전선이 다시 우리 수중에 떨어지면서 1차 다부동 전투는 승리로 막을 내렸다. 계속 밀리기만 하던 전투양상이 처음으로 밀리지 않고 전선을 지켜냈다는 점에서 의미깊은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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