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14세 日 소년 만지로, 표류 중 미국 포경선에 구조돼… ‘일본의 로빈슨 크루소’

1841년 1월, 5명의 어부를 태운 어선이 시코쿠 앞바다에서 거친 풍랑에 휩싸여 표류하고 있었다. 배에 탄 14세 소년 만지로(萬次郞)도 탈진 상태였다. 거친 파도와 싸우던 일행은 표류 9일만에 일본으로부터 760㎞나 떨어진 태평양의 무인섬 조도(鳥島)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절해고도의 무인도에서 143일 동안 겨우 목숨을 부지하며 구조를 기다리던 7월 21일, 일본 근해에까지 고래잡이를 나온 미국 포경선 ‘존 하우랜드호’에 의해 가까스로 구조됐다. 당시 일본은 외국 선박은 일본에 접근할 수 없었고 일본인은 외국인과 접촉할 수 없었던 쇄국의 시대였다. 결국 만지로 일행은 귀국을 포기하고 6개월후 하와이에 기착했다. 어부들은 하와이에 남았으나 호기심많은 만지로는 미국을 원했다. 마침 선장도 만지로의 예리한 관찰력과 적극적인 행동을 좋게 보아 소년의 미국행을 도왔다. 소년은 ‘존 맨’으로 불렸다.

1843년 포경선은 미국 최대의 포경기지가 있는 매사추세즈주의 항구에 기항했다. 일본인 최초로 미국 땅을 밟은 것이다. 선장은 존 맨을 자신의 고향 페어헤븐으로 데리고 가 영어 수학 측량 항해술 등의 교육을 받도록 했다. 서양으로 유학한 첫 일본인의 탄생이었다. 만지로는 학교를 졸업한 뒤 포경선을 타고 대서양 인도양을 넘나들며 뛰어난 항해기술을 선보였지만 고향이 그리웠다. 만지로는 당시 미 서부지역에서 불고있는 ‘골드 러시’에 주목했다. 그리고 돈을 벌어 배 한 척을 장만했다. 만지로는 하와이에서 과거 생사를 함께 했던 2명의 어부를 태우고 고향땅으로 향했다. 오키나와에 상륙한 것이 1851년 2월이었으니 어느덧 10년의 세월이 흘러있었다.

취조를 받고 고향에서 머물기를 2년여. 어느날 에도 막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당시 막부는 미국 페리제독의 개국 요구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만지로의 지식을 활용할 필요를 느낀 막부는 1853년 11월 만지로를 관리로 임명하고 무사의 특권인 칼을 휴대하게 했다. 그의 고향에서 이름을 따 ‘나카하마(中浜)’라는 성도 부여했다. 유례없는 출세였다. 바로 대미 외교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만지로는 영어회화집을 발간하고 특히 그의 모험담은 ‘일본의 로빈슨 크루소’로 각광을 받았다. 1860년 막부가 미일수호통상조약 비준서 교환을 위해 첫 공식 사절단을 미국에 보낼 때 만지로도 통역으로 동참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도 동행했다. 1970년에는 보·불(독일·프랑스) 전쟁 시찰 일원으로 유럽도 방문했다. 아직 20세기를 맞으려면 한참이나 남아있던 시기에 만지로는 세계를 무대로 종횡무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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