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밥 딜런,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공연… ‘포크 록’의 탄생

‘노래하는 시인’ 밥 딜런은 스무 살 되던 1961년에 기타 하나만을 들고 무작정 뉴욕으로 가 클럽에서 노래를 불렀다. 어려서부터 시를 써온 그의 노랫말은 그 자체가 시였고, 그는 시를 노래한 최초의 가수였다. 헐렁한 가죽 모자를 눌러쓴 채 하모니카를 연주하며 부르는 그의 비음 섞인 노래는 ‘이야기조의 블루스’라는 평판을 들었고, 그 해 뉴욕타임스로부터 ‘포크 음악계의 유망주’라는 격찬을 받았다.

그가 활동하던 1960년대의 미국은 저항과 반전운동이라는 역사상 가장 뜨거운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밥 딜런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저항의 한가운데에 놓였고, 대표작 ‘바람만이 아는 대답’(1962년)은 반전운동과 흑인 민권운동의 상징곡이 됐다. “나는 단지 음악가일 뿐”이라고 항변해도 믿어주지 않았다. 이때의 심경을 그는 “나는 누군가가 개들에게 던진 한 점의 고기처럼 느껴졌다”고도 했다. 자서전에는 “가족을 지키고 먹여 살리려고 노력했을 뿐인데 잘난 체 하는 인간들이 나를 ‘대변자’니, 심지어 ‘시대의 양심’이니, 언론에 떠들며 사람들을 속였다”고 기록했다.

이렇듯 본래의 자신과는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각인돼 있던 딜런이 비로소 용기를 낸 것은 1965년 7월 25일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 때였다. 비틀스의 음악에 충격을 받은 후였다. 딜런이 예의 통기타 대신 전기기타로 무대에서 ‘Like a Rolling Stone’ 등 2곡의 노래를 부르는 순간 대중들로부터 야유가 터져나왔다. 포크 가수들에게 전기기타는 상업성의 대명사로 금기시되고 변절로 인식되던 시절이었다. “부실한 앰프 때문에 딜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청중의 야유였다”는 주장도 있다. 전과 달라진 딜런을 향해 “세상과 타협했다”는 등 비난이 있자 딜런은 “세월이 흐르듯 나도 변한다!”라는 말로 심경을 대신했다. 미국 시장을 점령해버린 비틀스를 지켜보며 달랑 통기타와 하모니카만으로는 포크 음악을 발전시키기는커녕 명맥마저 지킬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전기기타를 들었으나 세상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날 이후 대세는 ‘포크 록’이었다. ‘사이먼 앤 가펑클’이 딜런의 새로운 음악 ‘포크 록’을 따랐고, 조안 바에즈도 포크 록을 받아들였다.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인 밥 딜런의 용기가 또 하나의 팝 장르를 탄생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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