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노래하는 음유시인’ 밥 딜런이 60년간 창작한 자신의 노래 600여 곡의 판권을 팔았다는데… 그의 삶과 음악세계를 알아본다

↑ 밥 딜런의 2번째 앨범 ‘The Freewheelin’ Bob Dylan’(왼쪽)과 6번째 앨범 ‘Highway 61 Revisited’

 

by 김지지

 

밥 딜런이 60년간 창작한 자신의 노래 600여 곡의 판권을 세계 최대 음악기업인 유니버설뮤직에 넘겼다. 세부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미국 언론은 판권 가액이 2억∼4억 달러(약 2150억∼4300억 원)에 달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은 딜런이 작곡한 노래 가치는 비틀스에 맞먹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딜런은 1962년 데뷔 앨범 이후 정규 앨범 39장을 냈는데 1억 2500만 장 이상이 팔렸다. 밥 딜런의 삶과 음악세계를 알아본다.

 

노랫말은 그 자체가 시였고, 그는 시를 노래한 최초의 가수

20대 시절의 밥 딜런(1941~ )은 대중음악에 위대한 언어의 숨결을 불어넣은 ‘노래하는 음유시인’이었다. 인종차별과 전쟁 반대 등 정치적이고 사회성 짙은 음악을 끊임없이 발표해 ‘저항의 아이콘’으로도 불렸다. 하지만 그는 훗날 “반체제를 이끄는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되고자 했던 적이 없다”며 자신을 향한 미신적 숭배들이 영혼을 가두고 메스껍게 만들었다고 고백했다.

밥 딜런

 

밥 딜런은 미국 미네소타주 덜루스의 시골 마을에서 러시아계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피아노 연주, 그림 그리기, 시 쓰기, 영화 보기를 즐겼다. 특히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이유 없는 반항’의 제임스 딘 같은 반(反)영웅을 꿈꿨다.

고교 시절 꿈은 로큰롤러였다. 그러나 1959년 미네소타대에 입학했을 때 학생들 사이에 조용히 퍼지고 있는 포크송을 접하면서 로큰롤에서 포크송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포크송은 1958년 대학생 포크그룹 킹스턴 트리오의 ‘톰 둘리(Tom Dooley)’가 큰 인기를 끌면서 미국 대학가에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었다. 1959년 7월 로드아일랜드의 작은 마을 뉴포트에서 열린 제1회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을 통해 조앤 바에즈(1941~ )가 데뷔하고, ‘현대 포크송의 창시자이자 사회운동가’로 칭송받는 피트 시거(1919~2014)가 인종차별과 전쟁에 반대하며 부른 포크송이 다양한 계층의 지지를 받으면서 시대를 풍미했다.

딜런은 1961년 대학을 중퇴하고 자신의 우상인 포크가수 우디 거스리(1912~1967)를 만나기 위해 기타 하나만 달랑 들고 무작정 뉴욕으로 가 ‘미국 보헤미안들의 성지’인 그리니치 빌리지의 한 클럽에서 기타를 연주하고 노래를 불렀다. 그 무렵 본명인 로버트 앨런 짐머만을 웨일스의 방랑시인 딜런 토머스의 이름에서 따 밥 딜런으로 바꾸었다.

딜런은 금세 그리니치 빌리지 분위기에 동화되어 저항가요를 만들고, 피트 시거가 창간한 등사판 잡지에 노래를 발표했다. 어려서부터 시를 써온 그의 노랫말은 그 자체가 시였고, 그는 시를 노래한 최초의 가수가 되었다. 헐렁한 가죽 모자를 눌러쓴 채 하모니카를 연주하며 부르는 그에게 뉴욕타임스가 ‘노래하는 시인’이라고 격찬했다. 이런 그를 눈여겨본 이가 있었으니 유명 음반 제작자 존 하몬드였다. 딜런은 그의 도움으로 1962년 3월 1집 앨법 ‘Bob Dylan’으로 데뷔했다.

우디 거스리(왼쪽)와 피트 시거

 

‘Blowing In the Wind’, 반전운동과 흑인 민권운동의 상징곡으로 부각돼

1960년대는 격동기였다. 기성 체제에 대한 저항, 변화를 향한 열정과 좌절이 응축된 시기였다. 미국도 흑인들의 공민권운동과 반전운동이라는 역사상 가장 뜨거운 시기를 관통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딜런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저항의 한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1963년 5월 발표한 2번째 앨범 ‘The Freewheelin’ Bob Dylan’에 수록된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g In the Wind)’은 반전운동과 흑인 민권운동의 상징곡으로 부각되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사람으로 불릴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포탄이 날아야/ 영원히 금지될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너무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음을 알까…”라는 가사로 된 ‘바람만이 아는 대답’은 조앤 바에즈의 ‘도나도나’와 더불어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을 반대하는 노래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Blowin’ in the Wind’는 이후 돌리 파튼, 주디 콜린스, 마리안느 페이스풀, 샘 쿡, 닐 영, 엘비스 프레슬리, 스티비 원더, 존 바에즈 등 무려 수백 명에 달하는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었다. 그 가운데 상업적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두고 또 가장 큰 사랑을 받았던 가수는 포크 트리오 ‘피터, 폴 앤 메리’다. 노래는 밥 딜런의 원곡이 발표된 지 3주 후인 1963년 6월에 발표되어 빌보드 팝 차트 2위까지 올랐다.

딜런은 바에즈 등과 함께 1963년 8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로 유명한 워싱턴대행진에도 참가해 수십만 대중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딜런은 점점 저항과 반전 음악의 기수로 추앙받았다. 하지만 그는 “나는 단지 음악가일 뿐”이라며 그런 분위기를 거부했다. 그때의 심경을 훗날 토로했는데 “나는 누군가가 개들에게 던진 한 점의 고기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2004년)에서는 “가족을 지키고 먹여 살리려고 노력했을 뿐인데 잘난 체하는 인간들이 나를 ‘대변자’니, 심지어 ‘시대의 양심’이니, 언론에 떠들며 사람들을 속였다”고 했다.

워싱턴대행진에서 노래하는 조앤 바에즈(왼족)와 밥 딜런

 

“세계의 시곗바늘이 돌고 세월이 흐르듯 나도 변한다!”

1964년 밥 딜런은 음악적으로 방황했다. 어쿠스틱 기타 연주와 노래에 심각한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여행 중에 자동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비틀스의 노래를 듣고 새로운 음악의 출현에 충격을 받았다. 딜런은 1965년 7월 25일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참가해 어쿠스틱 기타 대신 전기기타로 ‘Like a Rolling Stone’ 등 3곡의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포크의 순수성을 훼손하고 록의 상업성과 타협했다”, “포크 음악의 배신자” 등의 야유가 터져나왔다. 당시 포크 가수들이 전기기타로 연주한다는 것은 곧 세속적 상업주의를 의미했다. 딜런은 “세계의 시곗바늘이 돌고 세월이 흐르듯 나도 변한다!”라는 말로 심경을 대신했다. 그런데 당시 야유에 대해서는 “부실한 앰프 때문에 딜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 “너무 짧은 공연에 항의한 것” 등의 증언도 있다.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1965년)에서 전자기타를 연주하는 밥 딜런(오른쪽에서 두번째)

 

정확한 이유가 무엇이든 딜런은 비틀스를 지켜보며 통기타와 하모니카만으로는 포크 음악을 발전시키기는커녕 명맥마저 지킬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전기기타를 들었으나 세상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은 그의 편이었고 그날 이후 ‘포크 록’은 만개했다. 특히 ‘Like a Rolling Stone’은 빌보트 차트 2위, 영국 차트 4위를 기록했다. 이 곡이 수록된 6번째 앨범 ‘Highway 61 Revisited’는 페스티벌 한 달 후 발매되어 미국에서 3위까지 치고 올라갔다.

어쿠스틱 기타에 의존하던 포크 음악에 로큰롤 비트를 가미한 ‘포크 록’은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그즈음 비슷한 스타일을 지닌 그룹이 미국 각지에서 나타났다. 더 버즈, 마마스 앤드 파파스, 소니 앤드 셰르가 두각을 나타내고 ‘세기의 듀엣’으로 수많은 명곡들을 탄생시킨 ‘사이먼 앤드 가펑클’이 딜런의 ‘포크 록’ 진영에 가담했다. 바에즈도 포크 록을 받아들였다. 가히 포크 록의 전성기였다.

 

한국 대중음악계에 새로운 물결이 형성되는 데에도 밑거름 뿌려

그러나 딜런은 1966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몇 년간 칩거하다가 어느 날 컨트리뮤직과 스탠더드 팝송을 들고 나왔다. 새롭고 젊은 음악의 기수였던 그가 가장 고루한 장르의 음악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당시 포크가 일종의 반문화의 표상이었다면 컨트리는 적어도 당시의 분위기에서는 반동적인 문화의 상징이었다.

딜런은 연예인의 화려한 생활과 동떨어진 소박한 삶을 살았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극성팬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여러 번 이사를 다니고 음악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다. 가장 큰 업적을 묻는 기자에게 그는 “내 아이들 여섯을 잘 키웠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밥 딜런과 아내, 그리고 아이들(1988년)

 

딜런은 한국 대중음악계에 새로운 물결이 형성되는 데에도 밑거름을 뿌렸다. 군사독재정권 하의 1970년대 한대수를 비롯 김민기 양희은 등이 통기타 선율에 꽉 막힌 청춘의 설움과 저항의 메시지를 담았던 것도 딜런의 영향이었다.

딜런은 1970년대 후반에는 다소 이단적인 기독교 원리주의에 심취해 몇 년 동안 복음성가만을 불렀다. 그 시절 딜런은 예루살렘 성전터와 황금돔이 바라보이는 감람산을 방문해 무릎을 꿇고 깊은 묵상에 잠기기도 했다. 그러다가 1981년 세상으로 귀환했으며 1990년대 중반까지 긴 슬럼프에 빠졌다가 1994년 ‘우드스톡 페스티벌’을 통해 복귀했다.

 

노벨문학상 시상식에는 ‘선약’ 이유로 참석하지 않아

딜런은 1982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1988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1999년에는 미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에 선정되었다. 2000년에는 영화 ‘원더 보이스’의 주제곡 ‘Things Have Changed’로 아카데미상 음악상을, 2008년에는 팝 음악과 미국 문화에 깊은 영향을 준 공로로 퓰리처상 특별을 받았다. 2004년에는 미국의 음악잡지 ‘롤링 스톤’에 의해 ‘역대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2위(1위는 비틀스)로, 노래 ‘Like a Rolling Stone’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노래’로 선정되었다. 2012년 미국 대통령 자유의 메달, 2013년 프랑스 레지옹도뇌르를 수훈했다.

2012년 오바마 대통령이 딜런에게 ‘자유의 메달’을 걸어주고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2006년 발표한 ‘Modern Times’ 앨범은 그래미상 2개 부문을 수상하고, ‘롤링 스톤’이 선정한 ‘올해의 앨범’이 되었다. 딜런 개인으로는 그 노래로 30년만에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오르고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오른 현존하는 최고령 아티스트로 기록되었다.

이런 그를 주위에서 지속적으로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했다. 그러나 그의 수상 가능성을 몽상에 가까운 일로 치부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2016년 마침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스웨덴 한림원은 “위대한 미국 가요의 전통 속에 새로운 시적인 표현들을 창조해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대중가수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은 1901년 노벨상이 생긴 후 115년 만에 처음이었다.

딜런은 수상은 받아들이면서도 ‘선약’을 핑계로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노벨상 역사에서 시상식에 불참한 경우는 딱 셋이다. 고령, 입원 중, 공인된 대인기피증이 그 이유였다. 여기에 딜런의 ‘선약’이 추가된 것이다. 그의 노벨상 수상에 모두가 놀라워하면서도 세론은 양분되었다. 딜런에게 축하를 보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순수 문학가 대신 가수인 딜런을 수상자로 낙점한 스웨덴 한림원의 급진적인 결정을 비판하는 이들도 많았다.

 

포크 음악이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가게 한 것은 조앤 바에즈

포크 음악은 밥 딜런을 만나 절정기를 누렸지만 그전에 대중 속을 파고든 것은 조앤 바에즈(1941~ )였다. 딜런과 바에즈는 1941년 동갑내기로 한때는 연인관계였으며 당대 포크 음악계를 견인한 두 중심축이었다. 1961년 4월 처음 만난 두 사람은 함께 전국 순회공연을 하며 흑인 인권 향상을 위한 인종차별 철폐운동에 앞장서고 반전 평화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바에즈가 고백했듯 그에게 딜런은 “시간과 상황에 의해 엮인 거리의 쌍둥이였다.”

바에즈가 포크 가수로 데뷔한 것은 1959년 7월 로드아일랜드의 작은 마을 뉴포트에서 열린 제1회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였다. 그녀는 투명한 목소리와 청초한 스타일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곧 ‘포크송의 여왕’으로 불리며 1960년 첫 앨범을 내고 1962년 11월 23일자 ‘타임’지 커버스토리로 소개되었다.

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조앤 바에즈

 

1963년 8월 28일, 마틴 루터 킹이 링컨기념관 앞에서 저 유명한 연설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를 토해내던 워싱턴 집회에서는 청중을 향해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를 부르며 흑인들의 공민권을 정부에 촉구했다.

바에즈는 베트남전 전비로 쓰일 게 뻔한 납세 거부운동과 징집 거부운동에 참여하며 점차 사회적 관심사를 넓혀나갔다. 1969년 우드스톡 축제에 참가하고 1971년 사코와 반제티 사건을 테마로 한 앨범을 발표하는 등 그의 노래운동은 1960~1970년대를 관통하며 시대와 흐름을 같이했다. 우리에게 친숙한 ‘쿰바야(Kum Ba Yah)’, ‘솔밭 사이로 강물은 흐르고(The river in the pines)’ 등도 바에즈의 노래다.

조앤 바에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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