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일본 연합함대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폭격기 타고 가다가 미 전투기에 피격돼 추락사

삼국동맹 난색 표하고, 태평양전쟁 반대 의사 표명

1939년 9월 독일의 공격으로 유럽에서 2차대전이 발발했다. 전쟁 초기 일본은 유럽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고수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독일에 무너지자 그 틈을 타 프랑스 식민지인 동남아시아로 진출하자는 분위기가 확산했다. 그리고 1940년 7월 프랑스령이던 북부 베트남(인도차이나)에 군대를 진주시켰다. 1940년 9월에는 나치의 독일, 파시즘의 이탈리아와 군사동맹조약인 삼국동맹을 체결했다. 유럽 대륙은 두 나라가 싹쓸이하고 아시아는 일본이 손아귀에 넣은 뒤 미국에 공동대응하자는 구상이었다.

그 무렵, 미국과의 일전불사를 외치는 강경 군부의 핵심에는 도조 히데키를 필두로 한 육군 강경파가 포진했다. 그에 반해 삼국동맹은 물론 미국과의 일전을 반대한 중심에는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1884~1943) 해군 제독이 있었다. 야마모토는 해군에서 잔뼈가 굵은 문무 겸비의 지휘관이었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1904년 사관후보생으로 러일전쟁에 참전, 중상을 당하면서도 러일전쟁의 지휘관인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지휘 방식을 간접적으로 체득했다. 1935년 항공본부장으로 부임, 공격용 해군 항공기의 현대화와 항공부대 편제에 주력하는 한편 항공모함 건조를 관철시켰다. 1936년 해군차관, 1939년 8월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는 미국통이었다. 1919년부터 2년 간 미국 하버드대에 유학하고 1925년부터 2년 반 정도 주미대사관 무관으로 활동하면서 미국의 산업 생산력과 기술력을 직접 확인해 누구보다 미국의 힘과 실력을 꿰뚫었다. 이런 그였기에 1940년 삼국동맹에 난색을 표하고, 1941년 태평양전쟁에 대해서도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하지만 군국주의와 맹목적 애국주의가 판을 치고 있던 당시 일본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것은 곧 배반이고 매국이었다. 야마모토 역시 일본 우익의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 실제로 군국주의에 반대하거나 미온적인 인물들이 테러나 왕따를 당하는 일은 그 무렵 일본에서 부지기수였다.

1920년대 미국에 체류할 때 야마모토 이소로쿠(왼쪽)

 

하와이 진주만 공격할 때는 현장에 있지 않아

결국 삼국동맹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체결되어 일본 군부는 장차 있을 미국과의 전쟁에 대비했다. 야마모토는 한동안 전쟁에 반대하긴 했으나 결국에는 전쟁이 결정되고 천황이 승인하자 참전의 길을 따랐다. 그는 전쟁이 장기화되면 일본이 불리해질 것이므로 일시에 결정타를 날려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해군이 선봉에 서서 진주만을 급습해 단기 결전으로 미 함대를 일거에 격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야마모토는 일부 반대를 물리치고 진주만 기습을 입안했다. 이것은 군부의 주도권이 중일전쟁을 도맡았던 육군으로부터 태평양전쟁의 해군으로 넘어오게 된 것을 의미했다. 다만 1941년 12월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할 때 그는 현장에 있지 않았다. 그는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편성한 일본의 기동함대가 조용히 북태평양 항로를 통과해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근해에 닻을 내리고 있을 때 미군의 시선을 따돌리기 위해 인도차이나 해역에서 태연히 기동훈련을 펼쳤다.

야마모토는 진주만 공격의 성공으로 일약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일본 신문들은 함상에서 진두지휘하는 그의 모습을 매일 큰 사진으로 실었다. 본토로 와 있을 때도 그는 상륙하지 않고 연합함대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태평양전쟁 개전 후에도 전함을 이끌고 항상 최전선을 누볐다. 그의 지휘방식은 ‘러·일전쟁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 이래 일본 해군 지휘관들이 전통적으로 취해온 방식이었다. 위험을 무릅쓴 채 전함에서 참모들을 지휘하는 도고 헤이하치로의 스타일은 야마모토에게도 이상적인 모델이었다. 야마모토 역시 미드웨이 해전이나 과달카날 전투에 참전, 모함에서 전투를 지휘하며 장병들을 격려했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의 대패는 3년 후 일본을 무릎꿇게 한 신호탄이었다.

일본은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에 성공하고 이후 5개월 만에 괌, 홍콩, 필리핀, 말레이시아, 수마트라, 싱가포르, 버마 등은 물론 서태평양의 주요 섬까지 점령함으로써 북태평양 쿠릴열도에서 중부 태평양을 거쳐 버마에 이르는 방어선을 구축하는 제1단계 작전을 완료했다. 그 무렵 야마모토는 “시간을 끌수록 미국이 우세해지므로 하와이 북서쪽 1,600㎞ 지점에 위치한, 일본 본토와 하와이 중간에 있는 미드웨이를 공략해 하와이와 미국 서해안에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고사령부는 야마모토의 작전 계획을 승인하지 않았으나 1942년 4월 18일 미국의 ‘둘리틀 폭격대’가 일본의 본토를 기습적으로 공격한 것에 놀라 미드웨이 침공을 승인했다.

야마모토는 미드웨이 해전을 태평양 전체 싸움의 승부처로 간주했다. 미드웨이 섬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면 1942년 7월 무패의 항공모함들을 호주에서 동쪽으로 1,600㎞, 뉴질랜드에서 북동쪽으로 1,700㎞ 정도 떨어져 있는 뉴칼레도니아와 피지로 보내고 8월에는 호주 남부의 연합군 기지들을 폭격한 뒤 하와이까지 점령한다는 작전 계획을 머릿속에 그렸다. 따라서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의 승리를 굳히기 위한 운명의 일전이었으며 태평양전쟁의 향배를 한순간에 바꿀 수 있는 중차대한 대결전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대패했다. 사실상 전쟁의 승패가 기운 1943년 4월, 과거 진주만 공습으로 치명적 피해를 당한 미국에 야마모토를 상대로 복수할 기회가 주어졌다. 야마모토가 남태평양 부건빌섬에 있는 젊은 조종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킬 목적으로 그곳 부대를 방문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 사실이 고스란히 미국에 노출된 것이다.

연합함대사령관 시절

 

야마모토 전투기, 미군기 공격받아 정글 한 가운데로 처박혀 폭발

일본군은 1943년 4월 13일, 관례대로 부건빌섬 부근에 있던 여러 일본군 사령부에 야마모토의 일정 뿐 아니라 그를 수행할 G4M 폭격기와 전투기 호위대 수를 담은 암호 메시지를 발송했다. 내용은 이랬다. ‘4월 18일, 야마모토 사령관 일행은 부건빌 섬의 해 공군을 시찰하기 위해 오전 9시 20분 G4M 폭격기를 타고 6대의 호위 전투기와 함께 리바울에서 출발한다.’

당시 미군은 태평양전쟁 내내 일본의 외교와 군사 메시지 암호를 모조리 해독해 일본의 움직임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부건빌섬이 미 공군 기지의 항속거리 내에 있음을 확인한 미군은 야마모토 살해 작전을 검토했다. 미국은 암호를 해독했다는 사실을 일본이 눈치채거나 혹은 ‘등 뒤에서 총을 쏘는 암살’이라는 이유로 한때 주저하다가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록히드 P-38G 라이트닝기 16기를 요격 임무에 배정했다. 암호가 해독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는 시찰일자 며칠 전부터 P-38 편대를 부근으로 출격시켰다.

마침내 다가온 4월 18일 오전 9시 34분 미국 전투기들이 요격 장소에 도착하고 그로부터 1분 뒤 일본 전투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본 전투기는 모두 8대였다. 육상공격기 2대에는 각각 야마모토와 참모장이 타고 있었고 6대의 A6M 제로(Zero) 전투기는 야마모토를 호위했다. 미군 전투기들은 일본의 호위기 6대 사이를 뚫고 들어가 야마모토가 탑승한 G4M 폭격기를 찾아내 실탄을 발사했다. 결국 야마모토 탑승 전투기는 팔랑개비처럼 흔들리며 추락을 시작하더니 곧 정글 한 가운데로 처박혀 폭발했다. 참모장의 비행기는 물 속으로 돌진해 참모장은 살아남았다. 일본 수색대는 정글을 샅샅이 뒤져 아마모토의 시신을 찾아내 화장했다. 일본군과 일본 국민이 받은 충격은 컸다. 장례식장으로 가는 연도에는 수만의 애도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의 사후 개인 사물함에서 시 한편이 발견됐다. “수많은 젊은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구나… 젊은 영혼들이여, 조금만 기다려다오…당신들의 뒤를 따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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