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종교개혁가 얀 후스 화형… 불붙은 장작더미 위에서 찬송 부르며 죽어

마틴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면죄부에 관한 95개조 논제’를 붙이기 102년 전, 체코 보헤미아 땅에서 종교개혁의 불을 지피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간 이가 있었다. 루터가 자신을 “그의 후예”라고 칭했던 얀 후스(Jan Hus)였다. 후스는 교황의 세속적인 통치를 반대해온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 존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의 길로 뛰어들었다. 위클리프는 교황의 무오류를 지적하고 성직자의 축재를 비판하는 글을 써 종교개혁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후스는 위클리프의 글과 성서를 체코어로 번역하고 미사도 라틴어가 아니라 체코어로 진행했다. 면죄부 판매와 성직자의 부도덕성에 대한 그의 신랄한 비판은 당시 신성로마황제의 지배를 받고 있는 보헤미아의 민족의식과 연결되어 체코 민중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얻었다. 점차 그의 종교개혁운동은 체코 민족의 얼과 언어를 발전시키는 민족운동으로 발전했다. 영향력이 커지자 교회는 후스를 분열된 교회의 화해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간주했다. 당시 교회는 70년간의 ‘아비뇽 유수’에 이어 3명의 교황이 서로 대립하던 40년간의 ‘대분열 시대’를 맞고 있었다.

신성로마황제 지그스문트는 혼란을 잠재우기위해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를 열었다. 공의회가 새 교황을 선출함으로써 교회는 분열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으나 후스를 ‘이단’으로 몰아 내부 모순을 개혁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후스는 자신의 신념을 변호하기위해 신성로마황제의 안전보장을 약속받고 공의회에 참석했으나 곧 투옥됐고, 모든 주장을 철회하라는 강요에 시달렸다. 후스가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자 공의회는 후스를 ‘이단자’로 정죄하고 사형선고를 내렸다. 30여 년 전 숨져 매장된 위클리프의 유골까지 파내서 불태우라는 결정도 내려졌다. 관례대로 후스의 사제복이 벗겨지고 머리에는 ‘이단의 괴수’라는 글귀와 악마의 그림이 그려진 종이 모자가 씌어졌다. 1415년 7월 6일, 후스는 불붙은 장작더미 위에서 찬송을 부르며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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