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계엄사령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발표

1980년 7월 4일 국군 계엄사령부가 김대중씨를 포함 37명을 내란음모·국가보안법·반공법·외환관리법·계엄포고령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 송치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계엄사는 “김대중과 추종분자들이 소위 국민연합을 전위세력으로 하여 복학생을 행동대원으로 포섭, 학원 소요사태를 폭력화하고 민중봉기를 꾀함으로써 유혈 혁명사태를 유발, 현정부를 타도한 후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권을 수립하려고 했다”고 말하면서 그 증거로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에게 500만 원을 주어 계엄해제와 정치일정단축 등을 주장케해 사실상 광주사태를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밝혔다. 또 계엄사는 “김대중이 반국가단체인 재일 한민통을 발기·조직·구성해 북한노선을 지지·동조하는 반국가적 행위를 했다”고도 말했다.

이날의 계엄사 발표는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이미 연행된 김대중씨를 광주사태와 무리하게 엮는 작업이 마무리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법이 없는 세상이었고 계엄사가 내리는 명령이 곧 법인 세상이었다. 신군부의 첫 재물은 정동년이었다. 그 역시 예비검속대상으로 5월 17일 광주보안사 지하실로 연행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광주사태의 배후인물로 발표됐다. 김대중은 5월 17일 밤11시10분 연행돼 중앙정보부의 남산으로 끌려갔다. 훗날 김씨는 “한줄기 햇빛도 없는 지하실에서 하루 18시간씩 조사를 받았으며 몇 차례나 옷을 발가벗긴 채 협박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함께 끌려간 이호철은 심한 고문에 정신이상을 일으켜 한동안 수사관들에게 “엄마”라고 부르기도 했다.

7월 31일 김대중 문익환 이문영 예춘호 고은 김상현 이신범 이해찬 송기원 설훈 심재철 한승헌 한완상 송건호 이호철 등 24명은 군법회의에 기소돼 8월 14일부터 희대의 군사재판을 받았다. 변호사 선임도 신군부가 막아 쉽지 않았고 취재진도 엄격히 통제됐다. 그러나 신군부는 다급했다. 이미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하고(8월16일)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 자리에 올라(9월1일) 하루라도 빨리 최대 반대 세력인 김대중 진영을 제거한 뒤 홀가분하게 새출발을 하고 싶어했다. 재판은 “검사는 검사, 변호사도 검사, 판사도 검사”로 불리며 초스피드로 진행됐다. 재판 도중 모니터를 보고있는 합수부로부터 판사에게 쪽지가 날아와 ‘쪽지 재판’으로도 불렸다. 이미 갈길이 정해진 재판이었다. 선고공판은 9월 17일 단 6분만에 끝이났다. “피고인 김대중을 사형에, 피고인 문익환 동 이문영을 각각 징역 20년에…” 가족들은 눈물을 흘리며 애국가를 불렀다.

11월 3일 고등군법회의에서도 사형이 선고되자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관계가 소원해진 일본이 더 난리였다. 일본 수상은 김대중을 처형하면 대한협력에 제약이 생길 것이고 북한 측과 교류를 확대할 수도 있다는 외교적 압력을 가했다. 1981년 1월 23일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하자 대통령 전두환은 기다렸다는 듯 같은날 김대중을 무기로 감형하고, 다른 사람들도 형량을 낮춰 ‘은혜?’를 베풀었다. 그리고 정부는 1982년 12월 16일 복역 중이던 김대중씨에 형집행정지결정을 내리고 23일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쫓아냈다. 김대중씨와 관련자들은 각각 2004년과 2003년에 재심선고공판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고 명예를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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