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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의 가야산… 암봉과 능선마다 사방이 탁 트여 조망이 아주 매력적인 곳이더군요

↑ 가야봉에서 바라본 석문봉(가운데)과 옥양봉 (2021년 7월 촬영한 사진)

 

by 김지지

 

송년 산행이다. 선근 영민 정형 종근 창민 창화 등 고교 친구 5명과 함께다. 산행지는 충남 덕산도립공원의 가야산이다. 가야산 하면 경남 합천 해인사의 가야산(1433m)이 떠오를 뿐 충남 예산의 가야산은 낯설다. 나 역시 그랬으나 새로운 산행지는 언제나 반갑다. 2019년 12월 28일 창화의 카니발에 몸을 싣고 충남 예산으로 향했다.

 

☞ 가야산 동영상 항공VR (출처 서산시청)

 

가야산은 덕산도립공원의 일부… 예산 덕산면과 서산 운산면 지역에 걸쳐 있어

이중환은 조선의 대표적인 인문지리학자다. ‘택리지’(1751년)에서 그가 ‘충청도는 내포를 제일 좋은 곳으로 친다. 가야산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은 큰 바다요, 북쪽은 큰 만이고, 동쪽은 큰 평야, 남쪽은 그 지맥이 이어지는 바, 가야산 둘레 10개 고을을 총칭하여 내포’라고 했다. 충청도 하면 내포지방이 중심이고, 그중 가야산을 최고로 친다는 뜻이다.

가야산(伽倻山·678m)은 덕산도립공원의 일부다. 예산 덕산면과 서산 운산면 지역에 걸쳐있다. 높이는 600m급이지만 서해에 가깝고 내포평야에 우뚝 솟아있어 상대적으로 높아 보인다. 가야봉(678m), 석문봉(653m), 옥양봉(621m)의 3개 봉우리가 산군을 이루는데 최고봉은 가야봉이다. 가야산의 매력은 암봉과 능선에서 바라볼 때 사방이 탁 트여 조망이 빼어나다는 것이다. 산행 후 인근 덕산온천에서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가야산 이름의 뿌리는 가야사다. 1845년 대원군의 명으로 불에 타버리고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 자세히 알려지진 않았으나 규모가 제법 큰 절이었다고 전한다. 기록에 따르면 가야산 자락에 가야사, 개심사, 수덕사, 보원사 등 100여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이 중 보원사와 가야사는 폐사되었고, 개심사와 수덕사는 남아 있다.

석문봉에서 내려다 본 상가리 주변. 아래 저수지는 상가저수지이고 멀리 저수지는 옥계저수지다.(2021년 7월 촬영한 사진)

 

능선을 따라 3개 봉 모두 올라가는데 5~6시간 걸려

산행 들머리는 예산군 소재 덕산도립공원 상가리 주차장이다. 덕산도립공원 사무소도 이곳에 있다. 덕산면 상가리 마을은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마을 전체가 안온하다. 지금까지 예산 땅을 지나친 적은 있어도 예산 땅에서 시간을 보낸 적은 없다. 어렸을 적 ‘예산 시아씨’라는 라디오 드라마가 생각난다. 제목이 맞나 싶어 당시 신문을 검색해봤으나 찾지 못했다. 당시 드라마가 끝나면 늘 ‘주련 ○○○’ 하길래 ‘주련’이 뭔가 궁금했는데 성인이 되어 생각해보니 해설자가 ‘출연’이라고 말한 것을 ‘주련’으로 들었던 것 같다.

주차장 → 상가저수지 → 가야봉 → 석문봉 → 옥양폭포 → 남연군묘 → 주차장이 오늘의 코스다. 공원안내판 기준 7.3㎞ 거리에 3시간 30분이다. 널찍한 주차장에 차를 대고 포장길을 따라 10분 정도 걸어가면 남연군묘 입구 삼거리에 닿는다. 왼쪽길로 가면 가야봉으로 바로 이어지고 오른쪽 길로 가면 옥양봉과 석문봉이다.

남연군묘 입구 삼거리

 

구체적으로는 ▲남연군묘 입구 삼거리에서 오른쪽 길로 올라가 관음전 계곡~쉬흔길바위를 거쳐 옥양봉에 오른 후 능선을 따라 서쪽의 석문봉이나 가야봉으로 향하는 코스 ▲남연군묘 입구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올라가 옥양폭포를 경유해 석문봉으로 직등하는 코스 ▲남연군묘 입구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올라가 상가저수지~쉼터를 거쳐 능선에 오른 후 가야봉이나 석문봉으로 이동하는 코스로 나뉜다. 능선을 따라 3개 봉을 모두 올라가는데 5~6시간 걸린다.

가야산은 산세가 부드럽고 코스가 적당해 특히 초보자가 산행하기에 좋다. 도립공원의 일부여서 등산로도 잘 정비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육산이지만 봉우리는 암봉이어서 조망이 일품이다.

가야산 지도

 

가야봉 정상 남쪽은 통신탑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나머지 3면의 조망은 막힘없고 시원

남연군묘 입구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몇분 정도 걸으니 남연군묘가 나타난다. 하산 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고 직진했다. 몇 분간 포장도로를 걸으니 가야산에서 내려온 물을 가둬놓은 상가저수지다. 물이 깨끗하고 맑다. 저수지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가야봉으로 이어진 능선이나 석문봉으로 이어진 능선으로 연결된다. 저수지 둑을 지나 왼쪽으로 올라가면 우리의 산행길인 가야봉 직등 코스다. 3.2~3.6㎞ 정도 거리다.  저수지 뒤로 멀리 가야봉이 보이는데 통신시설이 봉 위로 삐쭉삐죽하다. 저수지 둑을 지나면 한동안 완경사이나 정상 아래 0.7㎞ 지점에서부터 급경사로 바뀐다. 하산하는 등산객이 “이 길로 올라가면 석문봉이나 옥양봉 등산길 보다 경사가 심한데 왜 이 길을 택했느냐”고 묻는다. 속으로 “지리를 잘 몰라서”라고 답했다.

중간 지점 눈이 살짝 쌓여있는 것을 확인한 창민이 아이젠을 착용하자고 한다. 그러나 나는 왠만하면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는다. 아이젠을 찼다가 눈이나 얼음이 없는 구간을 만나면 벗어야 하는 게 성가시고 또 발이든 몸이든 무언가를 달거나 착용하는 것을 싫어해서다. 실제로 나는 시계와 지갑을 가져본 적이 없다. 겨울 산에 올라갈 때도 아주 춥지 않으면 장갑을 끼거나 모자를 쓰지 않는다.

창민이 아이젠을 차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아이젠을 착용하는 것은 미끄럼 방지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다. 눈이나 얼음 길에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발에 온 힘을 쏟고 신경을 쓰다보면 에너지가 필요 이상 소진되어 산행길 내내 피곤하다”는 것이다. 나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창민의 설명이 나름 설득력이 있다 싶어 착용했는데 결과적으로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과 얼음이 없는 곳이라도 땅이 얼어 있어 조심조심 걸어야 하므로 쓸데없이 긴장하거나 에너지를 불필요하게 소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몸이 느꼈기 때문이다.

가파른 산길이 이어진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얼굴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는다. 그렇게 헉헉대며 가야봉에 오르니 1시 40분이다. 3.6㎞를 오르는데 2시간 걸렸다. 말이 최고봉이지 실제 정상에는 통신탑이 여러개 있어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정상은 통신탑 옆의 넓은 나무데크가 그 역할을 한다. 남쪽은 통신탑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나머지 3면의 조망은 막힘이 없고 시원하다. 북쪽에서는 저 멀리 석문봉과 옥양봉이 손짓을 하고 서쪽으로는 서산시와 서해바다가 보이며 동쪽에는 내포평야와 옥계저수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올해는 내 생애에서 가장 많이 산에 올라간 해다. 산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 산도 산이지만 초록의 녹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왜 새삼스럽게 이제야 느끼는지 신기할 정도다. 내년 산행도 부지런히 다녀야겠다고 가야봉에서 다짐했다.

석문봉 정상에서 바라본 가야봉 (2021년 7월 촬영한 사진이다)

 

능선이 아기자기한 암릉의 연속이어서 의외로 재미가 쏠쏠

가야봉에서 석문봉까지는 1.48㎞다. 혹 석문봉으로 가다가 중간에 하산하고 싶으면 가야봉에서 석문봉 쪽 1㎞ 지점에 상가저수지~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안부를 이용하면 된다. 석문봉 도착 전, 능선 한 켠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바람이 심하게 불고 기온이 낮아 걱정했는데 등산용 비닐쉘터를 치니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다.

덕산도립공원에서 작성한 가야산 지도에는 가야봉과 석문봉 사이 능선에 소원바위, 거북바위, 사자바위가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거북바위 빼고는 안내판이 없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명색이 도립공원이고 지도에도 표시했다면 현장에 안내판이 있어야 하는데 없다는 것은 공원 측의 무사안일이다. 안내판은 등산객들이 위치를 파악하는 데 의외로 도움이 크다. ‘○○바위’를 가리키는 안내판을 보고 한마디씩 하는 것만으로도 산행의 즐거움이 배가된다. 다행히 2021년 7월 다시 갔을 때 안내판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공원 측에 감사드린다.

소원바위(왼쪽)와 거북바위 (2021년 7월 촬영한 사진이다)

 

능선은 아기자기한 암릉의 연속이어서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느덧 석문봉이 지척이다. 사자바위는 석문봉 바로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석문(石門)은 인체 기혈상 배꼽 아래의 중요 혈 자리 이름이기도 하다. 따라서 석문봉을 충남의 단전에 해당하는 풍수지리적 길지로 여기는 풍수지리가도 있다. 석문봉은 바위로 이뤄져 있고 사방 조망이 빼어나다. 조망은 가야봉보다 낫다. 1.57㎞ 떨어진 옥양봉까지 가고 싶었으나 겨울 해가 짧아 포기했다.

창화가 사자바위를 배경으로 서해쪽을 바라보고 있다. 사자바위 뒤가 석문봉이다.

 

석문봉 바로 아래에서 하산을 시작했다. 쉬엄쉬엄 40분을 내려가니 옥양폭포다. 폭포라 부르기에 살짝 민망해서 그런지 이곳에도 안내판이 없다. 옥양폭포에서 20~30분을 내려가니 남연군묘다. 다행히 해가 지지 않아 남연군묘를 꼼꼼이 살펴봤다.

석문봉에서 기념촬영

 

대원군, 당대 풍수가의 말을 듣고 사찰 불태운 뒤 그 자리에 아버지 묘 이장

남연군묘 봉분은 왕릉처럼 거대하다. 묘는 봉분 꼭대기에 있다. 봉분 뒤로는 석문봉을 중심으로 가야산 줄기가 에워싸고 있고 양옆으로 ‘좌청룡 우백호’에 해당하는 산줄기가 날 듯이 버티고 섰다.  앞으로는 탁트인 덕산 벌판이다. 봉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거대한 원형극장의 중앙무대에 선 것 같다.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도 대단한 터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남연군묘

 

자 이제 남연군묘를 본격적으로 공부해보자. 남연군묘는 왕족이지만 안동김씨의 위세에 눌려 파락호 생활을 하던 흥선대원군(이하응)의 아버지 묘다. 원래는 경기도 연천군 남면 남송정(현 연천군 군남면 진상리)에 있었다. 하지만 ‘덕산 가야산 동쪽은 2대에 걸쳐 왕이 나올 자리’라는 풍수가의 말을 믿고 대원군이 1845년 현재 묘가 있는 북쪽에 이장했다가 1846년 지금 자리에 묘자리를 썼다. 묘자리에는 가야사라는 대찰이 있고 지관이 점지해준 묏자리에는 5층 석탑이 자리잡고 있었다. 흥선군은 거금을 주지에게 주어 1845년 불을 질러 폐사를 만들고 도끼로 석탑을 허물었다. 그리고 1847년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한 뒤 도굴을 예방코자 관 주위에 쇳물을 녹여 부었다.

전해오는 얘기는 이렇다. “가문 부흥을 염원하던 흥선군 이하응에게 정만인이라는 지관이 ‘가야산 가야사 석탑 자리에 묏자리를 쓰면 2대에 걸쳐 천자(天子)가 나온다’고 귀띔했다. 이에 대원군이 전 재산을 털어 가야사 주지를 2만 냥으로 매수한 뒤 가야사를 불 질러버리고 석탑을 도끼로 부순 다음 그 자리에 묘를 옮겼다. 형제들이 악몽을 꾸고서 석탑 부수기를 주저하자, 이하응이 직접 도끼로 내려쳐 탑을 없앴다. 그리하여 13년 뒤 아들 명복과 손자 척이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7년 후 태어난 차남이 철종의 뒤를 이은 고종이고, 고종의 둘째 아들이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이다. 아들이 왕이 되자, 대원군은 가야사를 불태운 자신의 업보를 소멸하기 위해 1865년 남연군묘 맞은편에 보덕사를 세우고 원당 사찰로 삼았다.

남연군묘 봉분

 

남연군묘 자리는 가야사 터

남연군묘 옆에는 쉽게 볼 수 없는 상여가 보호각에 보관되어 있다. 묘를 이장할 때 상여가 지나는 지역의 주민들이 운구를 했는데, 마지막에 상여를 운구한 남은들 마을(현재 덕산면 광천리)에 대원군이 하사한 것이다. 이후 마을 이름을 따서 ‘남은들 상여’라고 불렀다. 1974년 국가민속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되었다. 2005년 12월 도난되었다가 이듬해 3월 되찾은 후 진품은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으로 보내져 보관되고 있다. 이곳 복제품은 2012년 제작한 것이다. 가야사에 있던 석탑과 석등 부재는 인근 보덕사에 있다. 일제가 강점기 당시 반출하려던 것을 보덕사 스님이 막아 옮겨놓은 것이다. 가야사 석탑은 원래 5층석탑이었으나 2개층이 멸실되어 보덕사의 석탑은 3층이다.

남은들상여 (출처 문화재청)

 

남연군묘가 있는 자리가 원래 가야사 절터였다는 것은 여러 역사서를 통해 확인된다. 1963년 첫 발굴조사가 이뤄졌을 때 석축대와 초석 등의 건물지 일부가 확인되었고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실시한 세 차례의 추가 발굴조사에서는 중정(中庭·집 안의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마당)을 중심으로 한 8동의 건물지와 담장지가 확인되었다. 석조불상 8점, 청동불두 1점, ‘가량갑사(加良岬寺) 이름의 명문기와를 비롯한 다양한 유물도 이때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가야사지에 대한 건물배치와 절 이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남연군묘 앞 가야사지

 

남연군묘 도굴 사건과 천주교 탄압

1868년 4월 18일(음력) 독일의 유대계 상인 에른스트 오페르트가 중국에서 서해 바다를 건너와 가야산 중턱에 있는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해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 벌어졌다. 오페르트는 2년 전인 1866년 상선을 타고 두 번이나 충청도 해미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었다.

그러다가 병인사옥 때 조선을 탈출한 프랑스 신부 페롱, 상해 영사관 통역을 역임한 미국인 젠킨스 등과 모의해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한다는 명분으로 1868년 조선을 향해 다시 출발했다. 배에는 총과 창칼로 무장한 군인과 선원 100여 명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 사람들이 조상숭배사상이 강한 것을 알고 도굴한 시체와 부장품을 볼모로 흥정을 유리하게 이끌겠다는 계략 하에 남연군묘를 도굴해서 관을 미끼로 통상조약을 체결하려 했다.

그들은 삽교천을 따라 구만포구에 상륙한 뒤 해안의 관아를 습격해 무기를 빼앗고 건물을 파괴했다. 그후 서해 바다에 배를 대기시켜 놓고 야음을 틈타 충남 예산군 남연군묘에 다가가 밤새도록 삽질과 곡괭이질을 했다. 그러나 단단한 석회층을 뚫지 못해 애를 태우다가 썰물 시간이 가까워 오자 도굴을 포기하고 구만포를 거쳐 영종도 인근으로 철수했다. 급보를 받고 군병이 출동했을 때는 오페르트 일행이 도망가고 난 뒤였다.

뒤늦게 보고를 받은 대원군이 철저한 조사를 지시하면서 “필시 우리나라의 간사한 무리 가운데 그들을 부추기고 길을 인도한 자가 있었을 것”이라며 “모두 붙잡아 남김없이 처단하라”고 명했다. 이후 쇄국 정책과 천주교 탄압이 더욱 강화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잔혹하게 죽어갔다.

에른스트 오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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