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연인과 부부 ⑤] 송씨(宋氏) 가문 세 자매의 결혼… 송경령-손문, 송미령-장개석, 송애령-공상희의 결혼 후 “애령은 돈을, 경령은 중국을, 미령은 권력을 사랑했다”는 말 중국에서 유행

↑ 세 자매. 왼쪽부터 송미령, 송애령, 송경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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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송씨 세 자매의 아버지 송가수는 손문과 혁명동지

1875년, 중국 광동성 해남도가 고향인 한교준이라는 14살의 소년이 중국을 떠나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으로 건너갔다. 소년의 아버지가 먹고살기 힘들어 아들을 동생에게 양자로 보냈는데 동생이 미국 보스턴에 살고 있는 송씨 성의 처남을 도우라며 소년을 미국에 보낸 것이다. 소년은 미국에서 매를 맞아가며 일을 하는 것이 싫어 무작정 집을 뛰쳐나가 항구에 정박 중인 대형 어선에 올라탔다. 다행히 마음씨 좋은 선장의 배려 덕에 소년은 선원으로 근무하며 서양의 역사와 지리를 배우고 기독교에 귀의해 1880년 11월 세례를 받았다. 소년은 자신의 이름을 찰리 송(영문명), 송가수(중국명)로 바꿨다.

송가수(쑹자수·1861~1918)는 인쇄공장에서 인쇄 기술을 배우면서 트리니티대의 특별예비생으로 학교에 다녔다. 영어가 익숙해지자 밴더빌트대 신학과로 전학·졸업하고 목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1886년 1월, 11년 만에 귀국, 순회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1887년 부유한 집안의 여성과 결혼함으로써 상류사회에 진입했다. 1888년 반청(反淸)을 기치로 내건 상해의 비밀결사 ‘삼합회’에 가담·활동하면서도 사업 수완을 발휘했다. 1889년 성서 등 종교 관련 서적을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하고 곧 인쇄소를 차려 중국어판 성경을 찍고 서양의 다양한 서적을 인쇄·판매했다. 돈이 쌓이자 밀가루 공장을 세우고 미국산 기계 대리점을 운영했다. 거부 소리를 들었다. 1892년 가을 상해에서 손문(쑨원)을 알게 되어 혁명에 뛰어들었다. 두 사람 모두 삼합회 회원이었고 같은 광동 사람이었으며 외국에서 교육을 받고 돌아온 기독교 신자였다. 송가수는 백만장자가 되었는데도 혁명당의 요직을 맡아 손문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송씨 세 자매, 같은 환경에서 자랐는데도 서로 다른 인생 행로 걸어

송가수는 애령, 경령, 자문, 미령, 자량, 자안 등 3남 3녀의 6남매를 두었다. 큰딸 송애령(쑹아이링·1888~1973)은 16살 때이던 1904년 미국의 명문 사립여대인 웨슬리언대로 유학을 떠나 1910년 졸업하고 귀국했다. 아버지를 도와 손문의 영문 비서로 활동하던 중 1913년 7월 신해혁명 제2혁명에 실패한 손문과 아버지가 일본으로 망명할 때 따라가 계속 손문의 비서로 활동했다.

송가수 일가. 앞줄 왼쪽 앉은 차례로 애령(첫째), 자문(셋째), 자안(여섯째), 경령(둘째). 뒷줄 왼쪽부터 자량(다섯째), 송가수, 예계진(니꾸이전·부인), 미령(넷째). 송씨 일가가 한자리에 모여 찍은 사진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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