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이승만의 ‘정읍 발언’… 누구도 ‘분단’을 말하지 못할 때 처음 분단 문제 꺼내

갑작스럽게 찾아온 해방공간은 동상이몽의 각축장이었다. 좌우익의 찬탁·반탁 시위가 난무하는 가운데 미·소 양국은 자국의 세력 확대에 부심했다.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설립(1946년 2월)하고 토지개혁을 실시(3월)하는 등 소련이 사실상 북한의 소비에트화를 진행시키는 동안 미국은 ‘남북을 통튼 조선 임시정부’를 세우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소련이 북한에서 실리를 채우는 동안 미국은 ‘모스크바 3상회의’에 집착, 미·소공동위와 좌우합작위에 매달렸다. 그러나 소련이라는 현실을 도외시한 미군정의 태도가 철저한 반공주의자 이승만의 눈에 옳게 비칠리 없었다.

애초부터 미소공동위나 좌우합작위에 아무런 환상을 갖지 않은 이승만은 “통일국가 건설이 민족적 당위이기는 하나 소련이 존재하는 한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인 주장”이라고 믿었다. 예상대로 공동위가 결렬되자 이승만이 복심을 드러냈다. 1946년 6월 3일 전북 정읍의 한 연설에서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한 것이다. ‘정읍 발언’이었다. 누구도 ‘분단’을 입 밖에 꺼내지 못하고 있을 때 처음으로 분단 문제를 꺼낸 것이다.

‘정읍 발언’은 지금까지도 반이승만 세력에 의해 이승만을 분단세력으로 모는 주요 먹잇감으로 애용되고 있다. 이들은 이승만의 단정론을 조급한 냉전의식의 발로이자 권력의지의 표출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제 정세에 해박한 이승만이 곧 닥쳐올 미·소 간 냉전을 직시한 결과라는 긍정평가 역시 주요 축을 이루고 있다. 이듬해 열린 제2차 미소공동위가 또 결렬되고 좌우합작도 실패로 돌아가자 미국은 뒤늦게서야 이승만의 주장에 귀를 기울였다. 1947년은 세계적으로 ‘차가운 전쟁’ 즉 냉전의 기운이 고조되던 때였다. ‘정읍 발언’은 이승만의 혜안인가 권력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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