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피렌체에서 화형

마르고 왜소한 몸집에 큰 매부리코와 두꺼운 입술을 가진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는 외모상으로 결코 호감을 주는 인물이 아니었다. 설교까지 능숙하지 않았던 그가 명성을 얻게된 것은 높은 학식과 금욕생활 덕분이었다. 게다가 설교는 열정적이고 진지했다. 1489년부터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에서 수사 생활을 시작한 그의 설교가 점차 피렌체 시민의 가슴 속을 파고들자 사보나롤라는 자신이 하는 말은 모두 신의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며 사람들을 더욱 정신적으로 옭아맸다.

당시 피렌체는 메디치가 후원 덕에 사실상 중세 르네상스를 이끌고 있는 깨어있는 도시였다. 그러나 피렌체 사람들은 “인본주의가 신성을 거부하고 이탈리아에 만연된 부패가 성직자들의 부정 때문”이라는 사보나롤라의 설교를 맹신하고 점차 쾌락, 도박, 축제 등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폭풍우, 역병, 전쟁, 홍수, 기근이 닥쳐올 것이라는 그의 경고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사보나롤라가 당시 피렌체를 지배하고 있는 로렌초 데 메디치를 격하게 비판해도 메디치가는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다. 사보나롤라는 로렌초의 죽음과 교황의 죽음을 예언하고 머지않아 외국 군대가 쳐들어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예언대로 로렌초와 교황이 죽고 1494년 프랑스의 샤를8세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북부를 유린하면서 피렌체 부근으로 접근했다.

메디치가의 피에로가 가족을 데리고 베네치아로 도망치자 피렌체는 사실상 사보나롤라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그는 샤를8세에게 다가가 왕을 한껏 높이 치켜세우며 왕의 은총을 구했다. 사람들은 사보나롤라를 따라 샤를을 해방자로 맞이하고 환호했다. 왕은 그에게 감동받아 피렌체에 관대한 정책을 펼쳐 피렌체는 약탈을 면할 수 있었다. 샤를이 떠난 후 사람들은 사보나롤라를 믿고 따랐다. 피렌체에서는 금장식, 채색도서, 은술잔 등이 사라졌고 춘화나 도색 잡지 들은 불에 태워졌다.

그 무렵 새 교황 알렉산드르 6세는 밀라노 공작과 함께 프랑스 군대를 쫓아낼 목적으로 신성동맹을 맺었다. 사보나롤라의 거부로 피렌체가 이 동맹에 가담하지 않고 더구나 사보나롤라가 자신이 하느님의 선택받은 대변자라고 주장하자 교황은 분개하며 사보나롤라에게 로마에 와서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사보나롤라가 응하지 않자 설교를 금지시켰다. 1497년에는 최후 조치로 사보나롤라를 파문하고 투옥시키라고 피렌체 사람들에게 지시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피렌체 전체를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점차 사보나롤라 지지자들의 영향력이 약해질 무렵 우연한 일이 터져 사보나롤라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더구나 흉년이 들어 굶주림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거리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역병도 발생했다. 사보나롤라의 적들은 이러한 상황을 최대한 이용했다. 사보나롤라가 속해있는 도미니쿠스회에 반감을 품어온 프란치스코회가 사보나롤라를 지지하는 한 수사에게 “서로 불속에 뛰어들어 누구의 신앙심이 더 깊은 가를 시험하는 신성재판을 열자”는 제안을 덜컥 받아들인 것이다. 사보나롤라가 반대하는 가운데 신성재판은 궂은 날씨와 프란치스코회 수사의 불참으로 무위로 끝났지만 실망한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사보나롤라를 체포하고 고문을 가했다.

그와 두 수사는 군중의 조롱을 받으며 쇠사슬에 매달려 화형에 처해졌다. 1498년 5월 23일이었다. 31년 뒤 태어난 마틴 루터가 사보나롤라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만큼 그가 부패한 중세교회에 맞서 싸운 것은 맞지만 평가는 여전히 갈려있다. 그는 종교개혁의 도화선이었을까 외곬수 종교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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