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이스라엘 독립 선언

1948년 5월 14일 오후 4시,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65만 유대인이 침묵과 긴장 속에서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윽고 노 전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신생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로 선출된 벤 구리온이었다.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수립하고, 그 나라를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을 선포한다.” 선언과 함께 시오니즘 송가 ‘하티크바’가 전국에 울려 퍼졌다.

험난했던 여정이었다. 영국이 1917년 팔레스타인 예루살렘 땅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팔레스타인은 영토 분쟁의 진원지가 됐다. 1·2차대전 동안 영국이 이스라엘과 아랍 양쪽 모르게 “독립시켜주겠다”는 양립할 수 없는 사탕발림으로 양국의 참전을 유도한 게 분쟁의 씨앗이었다. 게다가 프랑스와도 은밀히 협약을 맺어 1차대전 후 중동 지역을 양분해 나누기로 합의했으니 강자의 횡포였고 기만이었다. 어쨌거나 유대인은 영국의 밸푸어 선언(1917년 12월)을 믿고 1차대전이 끝난 후 세계 곳곳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들었다. 그 전까지 터키의 지배를 받고 있다가 “참전하면 독립시켜주겠다”는 영국의 말만 믿고 대(對) 터키항전을 시작한 아랍으로서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렇다고 군사강국 영국을 상대할 수 없어 유대인을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

영국의 이율배반적인 이 결정은 훗날 유대인에게 독립의 디딤돌이 됐지만 당시만 해도 유대인 역시 피해자였다. 유대인이 속속 몰려오는 가운데 2차대전의 전운이 감돌자 영국이 예의 몰염치를 드러냈다. 아랍의 참전을 끌어내기 위해 유대인의 입국을 막아선 것이다. 이 와중에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을 피해 팔레스타인으로 오려던 유대인이 오도 가도 못해 비참한 죽음을 맞기도 했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은 영국에 대한 테러로 분노를 발산했다. 2차대전 후 영국은 “시온의 대문을 활짝 열라”는 유대인과 그들의 입국을 허가하지 말라는 아랍인 사이에 이도 저도 못 하게 되자 유대인·아랍인의 공존 정책을 포기하고 갈등을 유엔에 떠넘겼다. 아랍인은 공존과 분할 모두를 거부했으나 유엔은 유대인의 뜻을 받아들여 팔레스타인을 2개 국가로 분할하는 결의안을 가결(1947년 11월)시켰다. 미국은 아랍의 석유를 의식해 분할 대신 공존을 원한 반면 소련은 영국 세력을 하루라도 빨리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내고 싶은 마음에 분할과 독립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독립은 평화가 아니라 분쟁과 갈등 그리고 피와 눈물의 시작이었다. 1900년 만에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설립하게 된 유대인에게 독립은 감격이었지만 오랜 삶의 터전을 빼앗긴 아랍인에게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였고 배신이었다. 주변 아랍국가들도 눈엣가시 같은 존재 이스라엘의 독립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중동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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