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장개석의 상하이 반공 쿠데타… 제1차 국공합작 끝나

1924년 1월 열린 중국 국민당의 제1회 전국대회는 1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을 의미하는 ‘연소용공(聯蘇容共)’ 강령을 채택하고 황포군관학교 설립을 결정한 대회로 유명하다. 연소용공 채택은 국제적인 원조와 공산당의 협조가 절실했다는 점에서, 황포군관학교 설립은 강력한 직할군의 필요성을 통감했다는 점에서 쑨원(孫文)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된 결정이었다. 국공합작은 리다자오(李大釗)와 마오쩌둥이 국민당 중앙집행위 후보에 오르고, 저우언라이가 황포군관학교 정치부주임에 임명됨으로써 구체화됐다.

장제스(蔣介石)는 황포군관학교 출신을 기반으로 자신의 정치·군사적 힘을 불려나가며 당내에서 좌파를 견제하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듬해 3월, 쑨원이 눈을 감으면서 국공합작은 곧 용도폐기될 운명에 처했다. 금방이라도 갈라설 것 같았으나 동상이몽이나마 현상유지가 더 낫다는 게 양측의 판단이었다. 당시 국민당의 최대 관심사는 북벌(北伐)을 완성하는 일이었다. 1916년 위안스카이(袁世凱) 사후 군벌들이 중·북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어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중국의 통합은 요원해 보였다.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이 되자 1926년 7월 북벌을 시작했다. 파죽지세로 북상한 북벌군이 1927년 3월 상하이와 난징을 점령함으로써 양쯔강 이남은 국민당의 지배 지역이 되었다. 북벌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공산당은 노동자·농민의 힘을 결집시켰다. 1927년 3월 21일 파업과 무장봉기를 일으켜 상하이를 공산당 세상으로 만들었다.

3월 26일 상하이에 장제스가 도착했다. 아직 국공합작이 유효할 때라 공산당의 협조 속에 진행된 무혈입성이었다. 그러나 장제스는 열강 및 부르주아와 결탁한 터라 4월 12일 미명을 기해 파업 중인 노동자를 무장해제시키고 폭동으로 맞선 공산당원에게는 기관총을 난사했다. 위태롭게 이어오던 국공합작의 명줄을 끊은 것이다. 300여 명이 죽고 5000여 명이 실종된 이 ‘상하이 쿠데타’를 계기로 장제스는 공산당에 대해 절대적 우위를 차지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농촌과 산악지대로 숨어들면서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1라운드 싸움은 장제스의 완벽한 승리로 끝이 났다. 다시 북벌에 나선 장제스가 1928년 6월 8일에 베이징마저 무혈점령함으로써 사분오열됐던 중국을 하나로 통일했으나 잇따른 실책과 부정부패로 결국 대만으로 쫓겨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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