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독일 목회자 디트리히 본회퍼, 나치 수용소에서 처형

‘너는 벙어리와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잠언 31장8절) 디트리히 본회퍼는 평소 자신이 좋아했던 이 성경구절처럼 시대의 아픔에 입을 열었다. 그것은 고행과 죽음을 의미했다. 1차대전 때 전장에서 죽어간 둘째 형과 세 명의 사촌형을 보면서 그는 목회자가 됐다. 죽음은 그에게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잔인한 현실이었다. 2차대전 종전을 눈앞에 두고 셋째 형과 매형까지 나치에 처형됐으니 그는 늘 죽음의 한 가운데에 있었던 셈이다.

나치 치하에서 독일교회 다수는 히틀러와의 공존을 선택했다. 교회는 히틀러의 그늘을 안식처로 삼으려 했고 히틀러는 독일인에게 교회 출석을 독려함으로써 교인 수를 늘려주었다. 이런 교회에 돌아온 것은 제3제국에 걸맞게 ‘독일제국교회’로 변신하라는 히틀러의 강권이었다.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그리스도가 히틀러를 통해 오셨다” 심지어 “히틀러가 그리스도”라고 궤변을 늘어놓는 목회자도 생겨났다.

그러나 본회퍼는 고난의 길을 선택했다. 목사비상동맹을 결성하고 고백교회를 설립하며 독일제국교회에 저항했으나 1935년 12월 “모든 목회자는 독일제국교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히틀러의 지시와 함께 본격적인 박해의 시대를 맞았다. 고백교회의 많은 목사들이 체포되고, 본회퍼도 대중 앞에서 말하는 것과 글쓰는 것이 금지됐다. 1939년 6월, 그를 구하려는 미국 지인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피신했으나 곧 혼자만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자신을 깨닫고는 다시 독일로 돌아와 순교의 길을 준비했다.

2개월 뒤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미증유의 인류 대참사가 시작되고 게슈타포의 눈길이 더욱 매서워졌어도 본회퍼는 자신의 소임을 잊지 않았다. 죽음을 무릅쓰고 유대인 탈출과 고백교회 목사들의 군복무 면제를 도왔으나 결국 1943년 4월 5일 체포돼 2년 동안 악명 높은 강제수용소를 전전했다. 연합군의 총소리가 수용소까지 들릴 즈음인 1945년 4월 9일, 나치군대의 마지막 발악이 있었고 이 와중에 본회퍼는 처형됐다. 그로부터 한 달도 안돼 히틀러가 자살하고 전쟁도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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