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해방공간에서 좌·우익의 삼일절 충돌

1947년의 3·1절은 1년 전 발생한 전평 총파업(9월)과 대구폭동(10월) 등으로 진작부터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미 군정은 통행금지 시간을 1시간 앞당기고, 문교부는 전국학생총연합(학련)에게 기념식 참석 금지령을 내려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반목과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던 1947년 3월 1일의 새 날이 밝았다. 우익은 서울운동장에서 ‘기미독립선언기념 전국대회’를 가졌고, 좌익은 남산공원에서 ‘3·1기념 시민대회’를 열었다. 두 세력이 마주친 것은 오후 3시 40분 쯤 남대문 일대였다. 식을 마치고 시가행진에 돌입한 우익 학생들은 군정청앞~광화문~서대문~서울역을 지나 남대문으로 행진하고, 좌익은 남산에서 내려오는 중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와!”하는 함성과 함께 투석전이 전개됐다. 어디선가 총소리가 들리자 경찰도 발포했다. 시위는 1시간 만에 강제해산됐지만 시위대가 떠난 자리에는 2구의 시체가 나뒹굴었고 수명의 부상자가 신음했다.

경찰발표에 의하면 좌·우간의 투석전이 전개됐을 때 인근빌딩 옥상에서 미리 배치된 괴한들이 우익을 향해 총을 쏘았고 경찰도 그쪽으로 발포했다는 것이다. 좌우갈등이 빚어낸 비극은 비단 서울에서 만 그치지 않았다. 부산에서 5명, 전남·북에서 2명, 제주도에서 6명이 사망해 이날 하루동안 전국적으로 16명이 사망하고 22명이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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