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영국군, 1차대전 중 시작된 갈리폴리 전투에서 터키군에 대패

패전(敗戰)은 교훈을 남긴다. 교훈은 전사(戰史)에 녹아들고 전사는 다시 승전(勝戰)을 안내한다. 다양한 교훈을 던진 대표적인 전투가 1915년에 일어난 ‘갈리폴리 전투’다. 갈리폴리(터키명 겔리볼루)는 흑해 입구의 다르다넬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아나톨리아 반도와 마주한 터키땅이다. 1차대전이 발발하고 터키가 독일 쪽 동맹국에 가담하면서 갈리폴리에도 전운이 감돌았다. 영국은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정세 타개를 모색하다가 해결책으로 갈리폴리를 떠올렸다. 그러나 해군과 육군이 별도로 작전을 추진하면서 전투는 처음부터 차질을 빚기 시작했다.

영국 정부는 해군장관 처칠의 말을 들어 해군 단독작전을 결정했고, 전투는 1915년 2월 19일 영국 해군의 함포사격과 함께 시작됐다. 영국 함대는 어렵게 해협 중앙으로 진입했지만 기뢰와 양안에 배치된 화포에 밀려 더 이상의 진격이 불가능했다. 6척의 전함이 격침되거나 파손되어 결국 단독작전은 실패했고 처칠은 물러났다. 영국은 곧바로 지상군 투입을 결정했지만 이번에는 준비 부족으로 또 다시 비참한 결과를 맞고 말았다.

4월 25일, 영국군을 주축으로 프랑스군, 인도군, 호주·뉴질랜드 연합군이 총동원된 상륙작전이 시작됐다. 첫날 갈리폴리 반도 내 아키바바 고지를 확보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부대 간의 의사소통 두절로 연합군은 다시 해안선으로 철수해야 했고 도리어 해두보(海頭堡·적의 해안에 마련하는 상륙 근거지)에 갇히게 된다. ‘터키의 국부’로 추앙 받는 케말 무스타파 대령이 “나는 제군에게 공격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죽어줄 것을 부탁하는 것이다”라고 했던 유명한 연설도 이 전투에서였다.

8월 5일, 연합군이 2차 상륙작전을 감행했으나 이마저 실패로 돌아가 결국 연합군은 8개월간의 전투에 종지부를 찍고 조심스럽게 철수해야 했다. 대영제국에 큰 오점을 남긴 처참한 패배로 연합군은 총병력 40만 명 중 25만 명의 사상자가 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갈리폴리에서 실패한 20세기 최초의 현대식 수륙합동 작전 경험은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인천상륙작전에서 빛을 발했고, 철수작전의 중요성은 덩케르크와 흥남에서 입증됐다. 무엇보다 뼈아픈 패배를 맛보았던 처칠은 패배를 거울삼아 2차대전의 난국을 굳은 의지로 이겨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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