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월남파병안 국회 통과

월남 파병은 우리 쪽에서 먼저 제시했다. 5·16 후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의장이 케네디 대통령과의 회담(1961.11.14)에서 “한국은 정규군이나 지원병을 베트남에 파병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 파병의 첫 단추였다. 1962년 2월 베트남을 방문한 김종필 공화당 의장도 파병 용의가 있음을 내비쳤다. 진전이 없던 파병문제는, 1964년 5월 존슨 행정부가 미국의 우방 25개국에 베트남전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고 7월 15일 한국정부에 파병을 공식적으로 요청하면서 빠르게 진행됐다.

예상했던 일이라 하더라도 젊은이를 사지로 보내야 할 박 대통령이 고민이 없을리 없었다. 미국은 “주한미군을 월남으로 이동시키겠다”는 위협과 “한국군 봉급을 미국이 지급하고 군수품 가운데 일부를 한국산으로 구매하겠다”는 당근책을 병행하며 박 대통령을 압박했다. 결국 박 대통령은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고 6·25 때 진 빚도 갚아야 한다는 점을 내세워 참전을 결정하지만 속마음은 경제성장에 쓰일 자본조달에 있었다. 1965년 1월2 6일, 2000여 명의 공병·수송 및 자체방위부대 등을 파견하는 내용의 파병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고, 투표는 다소의 진통은 있었지만 큰 충돌없이 진행됐다. 여당인 공화당과 소수의 야당의원만이 참가한 가운데 치러진 파병안 투표는 재석 125명 중 찬성 106표, 반대 11표, 기권 8표로 통과됐다. 이미 비정규군이 한 해 전 9월11일 부산항을 출발한 터였다.

파병안에 따라 1965년 2월 2000명의 공병·수송부대로 구성된 비둘기부대가 파병됐고 10월에는 전투부대인 해병 청룡부대와 육군 맹호부대가 베트남에 상륙했다. 이밖에도 군수지원부대인 십자성부대와 군수물자수송을 담당한 백구부대, 이듬해에는 혜산진부대와 백마부대가 속속 베트남으로 향했다. 1973년 3월23일에 철수를 완료할 때까지 우리나라는 미국 다음으로 많은 총 31만2853명의 군인을 파병했다. 참전기간 동안 한국군은 1170회의 대규모 작전과 55만6000회의 소규모 단위작전을 펼쳐 5000여명이 전사하고 수 만 명이 부상을 입었으나 참전대가로 이들이 벌어들인 10억3600만달러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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