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북한 무장공비 31명 서울 침입… 1·21사태

1968년 1월 21일(일요일) 밤 9시30분쯤, 군사분계선을 넘어 산악길을 타고들어온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북한산에서 내려와 세검정 일반도로로 들어섰다. 청와대를 습격해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받고 남하한 북한 124군 소속 특수부대원이었다. 무장공비들은 자하문 고개를 넘어 경복고 후문 뒷담을 끼고 청와대를 향해 걸었다. 이틀 전 이들과 조우했던 나무꾼의 신고로 비상경계에 돌입한 군경이 이들을 발견하고 정체를 물었으나 공비들은 “방첩대로 훈련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라며 군경을 따돌리려 했다. 군경은 이들의 말을 믿지는 않았으나 군대의 위세가 대단하던 시절이라 뒤에서 이들을 쫓았다.

공비들은 커브를 한번만 더 돌면 청와대 정문이 보이는 지점에서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난 것으로 착각하고 작전에 돌입했다. “드르륵, 드르륵.” 아래쪽에서 올라오던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이 가슴에 세발의 총을 맞고 즉사했다. 첫 희생자였다. 이어진 총격전. 고갯길을 내려오던 시내버스에는 수류탄 세 발이 던져졌고 경복고 후문 일대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공비들은 세 갈래로 흩어져 도망쳤다. “박정희의 모가지를 따러왔다”고 한 김신조가 생포된 것은 이튿날 새벽 1시30분쯤, 인왕산 기슭이었다.

우리 군의 공비소탕작전은 1월 31일까지 계속돼 27명을 사살했으나 나머지 3명의 생사관계는 확인되지 않았다. 우리 측의 피해도 커 민간인을 포함해 32명이 전사하고 52명이 부상했다. 1·21사태 후 우리 정부는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고 군사도로인 인왕·북악스카이웨이를 건설해 대비책을 마련했으나 최근에는 남북화해 무드에 맞춰 스카이웨이에 설치된 철조망 대신 말끔한 펜스로 교체되고 심지어 ‘김신조 침투로’가 관광상품으로 개발되고 있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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