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이프’지 표지(1959 5월 18일) 인물로 소개된 지미 호파
by 김지지
70대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신작 ‘아이리시맨(The Irishman)’이 국내에서 개봉된다. 아일랜드 출신 청부 살인 업자 프랭크 시런(로버트 드 니로)의 시점에서 미제 사건으로 남은 미국 트럭 노조 위원장 ‘지미 호파 실종 사건’을 재구성했다. 호파를 소재로 한 영화는 과거에도 2편이나 상영되었는데 또 한 편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호파가 어떤 인물이기에 이렇게 수 편의 영화로 제작되는 것일까. 호파에 대해 알아본다.
미국의 대공황기는 미국 노동운동의 전성기
1929년 대공황이 미국에 엄습했을 때 루스벨트 정부는 기업과 노동자 사이의 중립을 선언함으로써 더 이상 기업의 편에 서지 않았다. 대공황의 원인을 소비 부족에서, 또 소비 부족의 원인을 노동자에 대한 기업의 착취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삶이 윤택해야 소비가 늘고, 소비가 늘어야 기업의 상품이 팔려 대공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게 당시 루스벨트의 생각이었다. 이는 뉴딜 정책의 골간이었다. 이 때문에 대공황기가 미국 노동운동의 전성기를 가져왔다는 게 미국 학계의 정설이다.
노조의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등 노동 3권을 보장하고 기업의 부당 노동행위를 명시한 ‘와그너법’(1935년)이 법제화된 것도 대공황기였다. 이 때문에 대공황기에는 다른 어느 때보다 노사 갈등이 첨예했다. 미국 노동운동사에서 1934년과 1937년은 노사 분쟁이 가장 많았던 해로 기록되고 있다.
1933년에 폐지된 금주법도 노사 분쟁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 마피아는 조직의 젖줄 역할을 했던 금주법이 폐지되자 새로운 돈벌이가 필요했다. 자연스럽게 눈길이 간 곳이 현금을 쌓아두고 있는 노동조합이었다. 대공황기를 틈타 팽창하던 노조는 조합원들로부터 수백 수천만 달러의 조합비를 거두고 있어 마피에게 노조만큼 좋은 먹잇감도 없었다. 노조 입장에서도 기업과 구사대를 상대로 한 싸움에 마피아를 동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마피아는 쓸 만한 파트너였다. 이처럼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노조와 마피아는 기업을 상대로 살인, 방화, 약탈, 사기를 서슴지 않았다. 이때부터 ‘노조와 범죄 조직은 하나’라는 극도의 노조 혐오증이 생겼다.
호파의 활동 무대는 ‘국제트럭운전사조합’
지미 호파(1913~1975)는 바로 그런 시기에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던 미국 노동운동의 전설이다. 호파는 인디애나주 소도시 브라질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0대 후반 창고 일꾼으로 노동자 생활을 시작하고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3년 20살 나이로 트럭운전 노동자 파업에 가담하면서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그의 활동 무대는 1930년 결성된 팀스터스 즉 ‘국제트럭운전사조합(International Brotherhood of Teamsters·IBT)’이었다. 조합이 캐나다까지 조합원을 포괄했기 때문에 ‘미국’이 아니라 ‘국제’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노동조합(labor union)’보다는 끈끈함을 강조하기 위해 ‘형제회(Brotherhood)’ 명칭을 채택했다. 호파는 특유의 리더십을 발휘해 1946년 지부장을 거쳐 1952년 전국 부위원장으로 부상했다. 그 사이 팀스터스의 조합원수도 급증했다. 출범 당시 10만 명 안팎이었던 조합원은 1950년대 초반 100만 명으로 증가했다.
1950년대 들어 미 정부는 조직 범죄와의 싸움을 시작했다. 1956년 팀스터스와 마피아가 연계된 비합법적 활동이 드러나자 존 F. 케네디 상원의원이 지휘하는 노동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위원회의 변호사이자 케네디 의원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는 팀스터스 위원장이 수십만 달러의 노조 자금을 개인 용도로 사용했다는 것을 밝혀내 1957년 감옥으로 보냈다.
호파가 그 틈을 타 1957년 새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나 로버트 케네디는 새 위원장 호파의 뒤까지 캐면서 호파와 케네디가(家) 사이에 접전이 벌어졌다. 위원회는 1957년 호파까지 기소했으나 배심원들의 혐의 불인정으로 1라운드는 호파의 승리로 끝났다.
“노동계의 대통령” “노조원의 우상”으로 불렸으나 부정적 이미지에서는 자유롭지 못해
이런 와중에도 호파는 노조의 권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뛰어난 협상력을 바탕으로 노조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미국에 노동조합이 생긴 이래 숱한 노조 지도자가 명멸했지만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지도자는 소수에 불과할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다만 전체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하기 보다는 자기 조합의 이익만을 우선했다.
문제는 도덕성이 없는 노동운동은 권력에 탄압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호파가 간과했다는 것이다. 도덕성은 노동운동가가 각별히 주의해야 할 덕목이었는데도 호파는 목적 달성을 위해 ‘도덕’이라는 거추장스러운 멍에를 벗어던졌다. 결국 범죄조직과 결탁하고 그의 앞을 가로막는 자는 누구도 용서하지 않았다. 목숨을 건 마피아와의 거래, 불리한 기사를 쓰는 기자에 대한 협박, 심지어 살인과 방화까지도 서슴지 않았다는 증언도 있다.
호파에게 진짜 위기가 찾아온 것은 케네디 형제와 결탁한 AFL-CIO(미국 산별노조총연맹)가 팀스터스를 연맹에서 추방하고, 1961년 케네디 형제가 각각 대통령과 법무장관이 되고나서였다. 이 과정에서 오고 간 신경전은 유명한 일화로 전해온다. 로버트 케네디가 호파를 가리켜 “미국의 최대 적”이라고 비난하며 마피아와의 연루설을 끊임없이 제기하자 호파는 “이봐, 애송이, 트럭 몰아봤어? 노동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면 말하지 마. 스타가 되고 싶으면 차라리 국회의사당 지붕 위에서 떨어지는 것이 나을 거야.”라고 면전에서 독설을 퍼부었다는 일화다.
호파는 케네디 형제와 신경전을 벌이는 중에도 조직확대 사업에 더욱 매진하고 1964년 북미 도로상의 모든 트럭 기사들을 포괄하는 단일의 ‘전국화물기본협정’을 타결지었다. 이는 미국 노동조합 사상 최대 업적 중 하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호파는 “노동계의 대통령”, “노조원의 우상”으로 불렸으나 여전히 부패와 독직이라는 부정적 이미지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13년형 선고받고 1967년 수감되었다가 1971년 풀려나
호파를 변호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마피아와의 결탁은 사실이지만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의 결탁은 눈감아주고 왜 호파에게만 문제를 뒤집어씌우냐는 항변이었다. 공금 유용에 대해서도 마피아든 누구든 거래를 잘해 노조원의 연금을 키워 조합원에게 혜택을 돌려준다면 그것이 최선 아니냐며 반발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 호파는 연금 운영면에서도 발군이었다.
그러나 호파에게는 결정적인 권력이 없었다. 결국 1964년 대배심 매수시도 혐의로 8년형을, 마피아 지도자들에게 노조 연금을 불법대출한 혐의로 5년형을 선고받았다. 합계 13년형을 선고받은 호파는 항소했지만 실패해 1967년 3월 펜실베이니아의 연방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수감 직전 자신의 오랜 동료이자 부위원장인 프랭크 피츠시먼스를 위원장 권한대행으로 임명했으나 피츠시먼스는 호파가 수감되자 호파와 거리를 두고 호파의 통제력을 약화시켰다.
그러던 중 호파는 ‘향후 10년 동안 노조활동을 하지 말라’는 닉슨 대통령의 타협안을 받아들여 1971년 12월, 수감 5년만에 석방되었다. 호파는 이 금지조항을 뒤집으려고 소송을 벌였지만 실패했다. 과거 심복이었던 새 위원장과의 갈등도 표면화했다.
식당 지하 주차장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이를 소재로 제작된 영화만 최소한 3편
1975년 7월 30일, 갑자기 호파가 실종되었다. 2명의 마피아 조직원을 디트로이트의 한 식당에서 만나겠다며 집을 나섰다가 식당 지하 주차장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호파의 승용차를 주차장에서 발견했으나 호파의 흔적이나 호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려줄 단서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후에도 몇 년 동안 FBI 등의 수사가 있었으나 별 다른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경찰이 지목한 유력한 용의자는 두 그룹이었다. 첫째는 실종된 날 만나기로 한 2명의 마피아 조직원이다. 당시 호파는 마피아와도 갈등 관계였는데 마피아가 호파를 암살하기로 하고 호파를 약속 장소로 유인한 뒤 살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찰은 두 조직원을 옭아맬 결정적 증거를 찾지 못했다. 무엇보다 두 조직원은 7월 30일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두 번째로 지목된 용의자들은 조합 간부들이었다. 호파는 출감 후 위원장으로 복귀하지는 못했지만 조합 내에서 영향력은 여전하고 조합원들의 지지는 열렬했다. 결국 이를 위협으로 받아들인 새 노조 위원장과 간부들이 호파가 위원장 자리에 복귀하기 전에 먼저 손을 써서 제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결정적 증거를 찾지 못해 증거 불충분으로 수사가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이후 실종과 사인을 둘러싼 각종 추측만 난무할 뿐 어느 것 하나 밝혀진 것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호파는 법적으로는 1982년 7월 30일 사망 처리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호파의 아들인 제임스 호파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팀스터스의 위원장을 오랫동안 역임했다는 것이다. 아들 호파는 1998년 선거에서 처음 위원장으로 당선된 후 2001년, 2006년, 2011년, 2016년 선거에서도 승리해 5연임에 성공했다.
호파의 삶이 워낙에 극적이고 실종도 미스터리여서 호파와 팀스터스를 소재로 삼은 영화가 미국에서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알려진 영화 중 첫째는 노먼 주이슨 감독의 ‘F.I.S.T.’(1978년)다. 실베스터 스탤론이 영화 ‘로키’ 이후로 처음 주연을 맡은 영화다. 이 영화는 노동조합의 이야기를 조폭영화로 풀어내 B급 영화로 평가받지만 미국 노동조합운동의 어두운 단면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는 탁월하다는 평가도 있다. 영화 ‘호파’(1992년)도 호파의 삶에 대한 영화다. 대니 드비토가 감독하고 잭 니콜슨이 주연을 맡았으나 평은 그저 그랬고 흥행도 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