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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이 정도는 알고 떠나자⑯-연재끝] 아시시, 성프란치스코, 산타 클라라, 오르비에토, 바뇨레조, 페루자

↑  아시시 구시가지. 오른쪽은 수바시오산(424m)에 있는 로카 마조레 요새. 중앙 상단 건물은 성 프란치스코 성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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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시는 유럽 최고의 기독교 성지이자 순례지

여행 8일째이자 마지막날이다. 오늘의 일정은 중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주의 아시시와 오브리에토다.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중세 도시가 어디냐고 물으면 대개는 위 두 곳과 시에나를 꼽는다. 중부의 움브리아주는 완만한 구릉, 어둑어둑한 산지, 구불구불한 길들이 모여 만든 평화로운 풍경이 특징이다.

먼저 향한 곳은 로마에서 북쪽으로 2시간 정도 떨어진 아시시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 주변 역시 옛 이탈리아 거장들의 풍경화에서나 보았을 법한 그림 같은 자연의 연속이다. 아시시가 가까워지면 눈에 띄는 것이 야트막한 수바시오산(424m)이다. 산 정상에는 중세 시대 봉건 영주가 살았던 성이 있고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14세기에 세운 로카 마조레 요새가 있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아시시 전경과 가슴이 탁 트이는 움브리아 평야가 한 눈에 들어온다.

아시시 구시가지는 그 산의 중턱 기슭에 중세 시대의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다. 들판의 아시시역에서 자동차로 10분 정도 올라가면 닿는다. 구시가지 입구에서 내려 아담한 성문을 지나 오르막길로 오르면 중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풍스러운 길이 이어지고 수백 년 흔적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 고가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구시가지의 좁은 골목들을 걷다 보면 마치 영화 세트장의 한 가운데를 거니는 것 같다.

아시시는 유럽 최고의 기독교 성지이자 순례지로 꼽히는 곳이다. 성 프란치스코가 태어나고 눈을 감은 곳이기 때문이다. 아시시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총본산 답게 인구가 3만 명에 불과한데도 성당이 100여 개나 된다. 수도원, 예배당 등을 포함하면 도시 전체가 종교 건축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시가지를 걷다 보면 영화 세트장의 한 가운데를 거니는 것 같아

아시시를 대표하는 것은 성 프란치스코 성당이다. 이 성당은 성 프란치스코의 유해와 유품을 안치했다는 점에서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과 비교된다. 성당은 1228년 착공해 1280년대 쯤 대부분 완성되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유해가 담긴 석관은 1230년 지하 예배당에 안치했다.

아시시는 오늘날 세계 종교평화의 성지로도 유명하다. 대표적인 행사가 1986년 10월 27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프란치스코 성당에서 개최한 ‘평화를 위한 세계 기도의 날’이다. 행사에는 기독교 32개 종파와 유대교, 힌두교, 시크교, 불교, 이슬람, 아프리카 애니미즘, 조로아스터교 등 11개 비 기독교 종교의 지도자가 모였다. 1993년에는 보스니아 전쟁 종식을 위해, 2002년에는 미국의 9·11 테러 사태 이후 종교 간 증오를 종식하기 위해 세계 종교 지도자들과 순례자들이 이곳에 모여 기도하고 행진했다. 성당은 1997년 이곳에서 일어난 지진으로도 세계적 관심을 끌었다. 지진으로 원형천장이 무너지고 13세기 벽화들에 금이 가자 서양인들은 아시시 지진을 그해 10대 뉴스의 하나로 선정할 만큼 충격을 받았다.

 

■성 프란치스코는 예수와 가장 닮은 성자

성 프란치스코(1182~1226)는 2000년 가톨릭 역사를 통틀어 신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성인이다. ‘가난과 결혼한 수도자’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닮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프란치스코 이름은 오늘날 서양 각국에서 달리 불리는 프랑시스, 프랜시스, 프랑수아, 프랑코, 프랑수아즈 등의 뿌리이기도 하다. 현재 아르헨티나 출신의 교황 프란치스코 역시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름에서 땄다. 프란치스코는 ‘프랑스 사람’이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프랑스 여성과 결혼해 낳은 아들이라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프란치스코는 아시시에서 부유한 포목상의 외아들로 태어나 젊은 시절 흥청망청 보냈다. 20살이던 1202년 기사를 꿈꾸며 인근 페루자와의 전투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혀 1년간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석방된 후 고향으로 돌아와 큰 병을 앓고도 1205년 또다시 자원입대했다.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의 음성을 들은 곳은 전장으로 가는 길에 있는 스폴레토라는 소도시였다. “프란치스코야,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느냐?” “기사가 되기 위해 전쟁터로 가고 있습니다.” “주인을 섬기는 일과 종을 섬기는 일 중 어느 것이 옳은 일이냐?” “주인을 섬기는 일이 옳은 일입니다”, “그러면 집으로 돌아가라.”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주저 없이 돌아와 기도에 전념했다. 그가 또다시 하느님의 음성을 들은 것은 반쯤 허물어진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 아래에서 기도하던 25살 때였다. “프란치스코야, 내 집이 허물어져 가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가서 그것을 일으켜 세워라”라는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왔으나 처음에는 벽돌로 쌓는 성당을 세우라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부패하고 타락한 중세 암흑기 교회의 생명을 세우라는 뜻이었음을 깨닫고는 예수를 위해 모든 걸 바치기로 결심했다.

성 프란치스코는 선종 2년 뒤인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프란치스코가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된 것은 그로부터 711년이 지난 1939년이었다. 유해는 인근의 성 조르조 성당에 묻혔다가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에 1230년 5월 25일 이장되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종파와 교파의 벽을 넘어서 존경받는 것은 그가 종교의 공동 목표이자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청빈’과 ‘형제애’를 온몸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오르비에토, 900년 된 성벽에 둘러싸여 있어

오르비에토 역시 아시시에서 멀지 않은 움브리아주의 작은 도시다. ‘옛 도시’란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한 이름처럼 오르비에토는 고대 에트루리아 이래 30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이탈리아는 전국이 아름답기로 유명하지만 그중에서도 오르비에토는 보석으로 꼽힌다. 중세시대 이탈리아의 마을들이 외침을 피해 주로 산 정상에 형성되었듯이 오르비에토 역시 해발 195m 화산암 위에 자리잡고 있다.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급자족의 봉건사회를 형성했다. 마을은 끝에서 끝까지 거리가 2㎞도 채 안된다.

오르비에토는 900년 된 성벽에 둘러싸여 있고 중세시대 모습이 길과 골목에 그대로 보존되어 고풍스럽다. 건물과 도로가 수백년 전, 노새가 마차 끌던 시절 그대로여서 골목길은 구불구불한 미로처럼 꼬여있다. 화산암으로 이뤄진 땅속에 터널과 동굴로 이어진 미로를 갖고 있는데 에트루리아 시대 이래 식품 보관 등을 위해 집집마다 판 지하굴이 1200여 개에 달한다.

오르비에토 구시가지 마을로 가려면 기관사 없이 2분 만에 올라가는 푸니쿨라(산악기차)를 타야 한다. 언덕 위 정차장에서 오르비에토 두오모(대성당)까지는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다. 두오모는 이탈리아 고딕 건축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성당 전면을 장식하는 모자이크와 성당 안에 있는 성 브리지오 예배당의 프레스코화가 일품이다. 성당 내의 장대한 전면은 모자이크와 조각과 부조로 신·구약의 주요 인물과 장면들을 소상히 재현해 그대로 한 권의 성서다.

두오모의 파사드(정면)는 당대 명장 오르카냐와 피사노의 솜씨이고 성 브리지오 에배당의 프레스코화는 안젤리코가 시작해 시뇨렐리가 마무리했다. 건물 외관은 석회암과 현무암이 줄무늬 형태로 보이도록 디자인되어 건축학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전체적으로는 웅장하지만 화려하지 않고 고졸해 마음이 편하다. 두오모는 1290년 착공 후 300년에 걸친 공사 끝에 1600년쯤 완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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