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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이 정도는 알고 떠나자⑩] 베네치아(2) : 티치아노, 조르조네, 틴토레토, 매너리즘 양식, 프레스코와 유화

↑ 조르조네의 ‘폭풍우’(82×73㎝, 1508년). 그림에서 주목할 것은 번개가 치는 언덕을 따라 있는 도시의 풍경이 그림 속 인물만큼이나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풍경이나 자연은 중심인물을 위한 배경으로만 존재할 뿐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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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티치아노, 최초의 국제적 화가이자 회화의 군주

베첼리오 티치아노(1488~1576)는 서양 회화의 기본 매체가 되는 ‘캔버스에 유화’ 기법을 개척한 공로를 인정받아 ‘회화의 군주’로 불린다. 베네치아 미술을 빛내고 르네상스 미술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다. 무엇보다 베네치아에 뿌리를 두면서도 활동 범위가 나라 밖에까지 뻗쳤던 최초의 국제적 화가였다. 덕분에 그는 생전에 부와 명예를 누린 서양 회화사 최초 화가로 기록되고 있다.

티치아노는 베네치아 북쪽에서 멀지않은 피에베 디 카도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어 베네치아의 모자이크 작업실에서 도제로 일했다. 그러다가 베네치아 회화가 하나의 화파를 이루는 데 크게 기여한 조반니·젠틸레 벨리니 형제에게 사사했다. 1511년 독립적인 첫 번째 큰 작업을 했는데 파도바의 스쿠올라 델 산토에 그린 내부 벽화다. 벽화는 가벼운 채색, 생생한 색감의 특징을 보이는 색채 위주의 표현으로 앞으로의 티치아노의 미술 세계를 예고했다.

1514년쯤 베네치아에 자신의 공방을 열어 활동을 시작했으나 후원자가 없어 직접 공방을 찾아오는 고객을 상대로 주문을 받았다. 티치아노 최초의 야심작이자 자신의 이름을 도시 안팎에 널리 알려 티치아노 시대의 개막을 알린 그림은 30살 무렵에 그린 베네치아 최대 제단화 ‘성모 승천’(360×690㎝, 1518년)이다. 베네치아에서 산 마르코 대성당 다음으로 큰 고딕성당인 프라리 성당 즉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성모 승천’은 화면 중앙에 붉은색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가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승천하는 장면으로 황금빛과 붉은빛의 화려한 색채로 천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또한 성모의 승천 장면을 관람객이 아래쪽에서 올려다보도록 그려 성모가 하늘로 오르는 모습을 더욱 생동감 넘치게 표현했다. 이후 많은 작품을 그렸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게 300여 점이나 된다. 종교화, 역사화, 알레고리화, 초상화, 여성 누드화 등 주제와 형식도 다양하다. 이중 발군은 초상화다.

생전에 부와 명예를 누린 서양 회화사 최초 화가 

그의 초상화는 매력적인 생동감 때문에 항상 인기가 많았다. 실제 인물과도 비슷해 그 인물의 인생까지 느끼게 한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다보니 당대 권력자 치고 티치아노 앞에 앉아 초상화 포즈를 취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선금을 주고도 1~2년을 기다리는 것이 다반사였다고 하니 예술가가 일찍이 이렇게 대우를 받은 적이 없었다. 각국의 왕과 군주와 제후들 그리고 교황에게도 그의 그림은 인기가 높았다.

특히 티치아노를 총애한 군주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의 왕이었던 카를 5세였다. 카를 5세는 1532년 티치아노를 자신의 전속 초상화가로 임명하고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티치아노가 카를 5세를 모델로 그린 ‘카를 5세 기마상’(332×279㎝, 1548년)은 이후 화가들에게 기마 초상화의 기준이 되었다.

카를 5세는 예술 마니아답게 유럽 각지의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을 스페인으로 불러들였다. 그 결과 예술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스페인을 새로운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어 훗날 스페인이 관광대국이 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1556년 스스로 물러난 카를 5세의 뒤를 이어 스페인의 왕이 된 아들 펠리페 2세도 티치아노를 후원했다. 티치아노가 이렇게 스페인 왕실과 맺은 인연은 죽는 날까지 40년 넘게 이어졌다. 티치아노는 프랑스 황제 프랑수아 1세, 교황 바오로 3세, 베네치아의 총독 등 여러 귀족과 군주들의 화가로도 활약했는데 예술가가 일찍이 이렇게 대우를 받은 적이 없었다.

 

관능적인 여성 누드화도 개척

티치아노는 베네치아의 외향적 문화를 그림으로 완벽하게 묘사했다. 이 때문에 16세기 베네치아의 역사를 말해주는 문헌이 모조리 사라져도 그의 초상화와 제단화를 보면 이 도시의 일상생활을 쉽게 재구성할 수 있다는 말까지 회자된다.

티치아노가 개척한 중요한 영역 중에는 관능적인 여성 누드화도 있다. 대표적인 그림이 현재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우르비노의 비너스’(165×119㎝, 1538년)다. 그림을 보면 아름다운 여인이 누드로 누워 있다. 귀족풍의 실내와 우아한 비너스의 자태가 르네상스 규방 미학의 정점을 보여주지만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1510년)와 비슷해 새롭지는 않다. 차이가 있다면 나체 여인이 누워있는 장소가 목가적인 자연 풍경에서 화려한 저택 실내로 바뀌고, 잠자는 여인이 침대에 기대어 깨어있는 모습으로 바뀐 정도이다.

그런데도 이 그림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고개를 살며시 돌리고 있는 전통적인 비너스 표현과 달리 비너스가 감상자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감상자의 시선을 자신에게 유도하는 여성의 표현은 이후 서양 미술에서 여성 누드 와상을 그리는 전형적인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벌거벗은 마하’(190×97㎝, 1803년),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130×190㎝, 1863년)가 대표적 예다. 사랑스러우며 성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여인의 시선은 이후 무수한 관람자를 유혹해왔다. 티치아노는 1576년 8월 26일 숨져 베네치아 프라리 성당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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