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 역사’ 출간

우리 근현대사를 관통한 시대의 목격자요 증인

1901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 일제 식민지와 해방공간 그리고 자유당 정권과 유신체제를 거쳐 1988년의 서울올림픽 평화대회 위원장까지 맡고 눈을 감았으니 함석헌(1901~1989)이야말로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관통한 시대의 목격자요 증인이었다. 그는 격동의 20세기 내내 진리와 정의를 위해 몸을 던진 구도자였고, 전통과 교리의 속박을 깨뜨린 자유인이었다.

1919년 평양고보 시절 일어난 3․1 운동은 함석의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은 전환점이었다. 자신의 표현대로 “먹었던 대동강 물이 도로 다 나올 정도”로 만세를 부르던 그는 3․ 1운동 후 일제가 설립한 관립 평양고보를 그만두고 2년 후 평생의 스승 이승훈과 유영모가 있는 오산학교로 편입했다.

함석헌은 1924년 일본의 도쿄고등사범학교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당대 일본 최고의 지성인이자 무교회주의 기독교 창시자인 우치무라 간조(1861~1930)를 만나 무교회주의를 깊이 받아들였다. 도쿄사범학교를 졸업한 1928년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해 1938년까지 10년 동안 역사를 가르쳤다.

그 시절 함석헌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이하 ‘조선역사’)라는 제목의 글을 ‘성서조선’ 1934년 2월호부터 1935년 12월호까지 22회에 걸쳐 연재했다. ‘성서조선’은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은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등이 1927년 7월 일본 도쿄에서 창간했다가 귀국 후 국내에서 발행한 신앙동인지였다.

함석헌이 ‘조선역사’를 연재할 당시, 우리 역사학계에는 일제 식민사관과 민족주의 사관, 유물사관 등이 혼재되어 있었다. 이런 시기에 나온 함석헌의 ‘조선역사’는 이들 사관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기술한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한국사였다. 그러나 ‘조선역사’는 광복 때까지 10여 년 동안 역사가들로부터 묵살을 당했고 ‘성서조선’의 독자도 기껏해야 300명을 넘지 못했다.

 

‘대선언’ 시를 통해 어떤 종교와 종파에도 속하지 않겠다는 입장 발표

함석헌은 1938년 창씨개명과 일본어 수업을 거부하며 오산학교를 그만뒀다. 그것은 가시밭길의 시작이었다. ‘불온교사’, ‘불령선인’으로 내내 감시를 받다가 1940년 평양 감옥에서 1년, 1942년 이른바 ‘성서조선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또다시 1년을 보냈다. ‘성서조선 사건’이란 ‘성서조선’ 1942년 3월호 권두언에 실린 ‘조와(吊蛙)’의 내용이 동면하는 개구리의 소생을 비유하여 조선 민족의 소생을 노래하였다는 이유로 일제가 ‘성서조선’을 폐간시키고, 함석헌․김교신․유달영 등을 투옥한 사건이다.

광복 직후에도 공산당의 발포로 많은 학생이 숨진 신의주학생사건(1945.11)의 배후로 지목되어 소련군에 의해 50일 동안 구금되고 1946년 12월 다시 같은 일로 1개월간 옥고를 치르는 등 수난의 연속이었다. 함석헌은 1947년 3월 친구들의 강권으로 고향을 등지고 남한으로 내려와 1950년 3월 28일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는 제목으로 단행본을 간행했다. 그러나 역사학계는 여전히 사관의 이질성과 서술의 객관성을 문제 삼아 연구서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 무렵 함석헌은 기독교적 사관 중심에서 벗어나는 일대 변화를 겪었다.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고 언제까지 기독교라는 남의 종교를 믿을 수 없다며 자신의 종교관과 세계관을 수정한 것이다. 1953년 7월 4일 마침내 함석헌은 ‘대선언’이라는 시를 통해 기독교를 포함한 어떤 종교와 종파에도 속하지 않을 것이라는 종교적 입장을 발표했다. 이후 그는 장준하의 ‘사상계’를 중심무대로 삼아 지배층과 교회 지도자들을 통렬히 비판하며 이른바 ‘제동 걸기’에 나섰다.

1956년 1월호에는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1957년 3월호에는 ‘할 말이 있다’ 등의 글을 게재해 사상계의 판매부수는 늘어났고 함석헌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1958년 8월호에는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6․25 싸움이 주는 역사적 교훈’을 발표했다가 20일간 구금당했으며 1961년 7월호에는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실어 박정희와의 싸움에 시동을 걸었다.

 

“사료의 창고가 아닌 펄펄 뛰는 역사서”

1962년 5월에는 기독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자기만의 종교를 찾고자 했던 그동안의 생각을 반영해 ‘조선역사’를 새로 고치고 제목을 바꿔 ‘뜻으로 본 한국역사'(이하 ‘한국역사’)를 간행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한국역사’는 1962년판에서 한문을 덜어내고 6․25 후 역사에 관한 장을 더해 서문을 붙인 1965년 9월판이지만 골격은 1962년판 그대로다.

그런데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1961년에 간행된 것으로 소개하는 기사들이 많다. 1965년 9월에 간행된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넷째 판에 부치는 말’에서 함석헌이 “1961년 서문까지 쓴 원고를 출판사에 넘겨주고 마침 외국으로 구경을 떠났는데 서문이 불에 타서 없어지고 자신은 여행 중이라 유달영에게 발문을 얻어서 대신 냈다”고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1962년에 출간되었다. 동아일보 1962년 5월 14일자에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일우사에서 간행되었다는 서평이 나온다. 또한 함석헌이 말한 ‘외국 구경’은 1962년 2월 미 국무성 초청으로 출국해 그해 6월 귀국한 미국 구경을 뜻한다. 조선일보는 당시 함석헌이 미국에서 쓴 미국 기행기를 22차례나 연재했다.

‘한국역사’에서 함석헌은 우리 역사의 밑에 숨어 흐르는 바닥 가락을 고난으로 보았다. 그가 보기에 우리 고난의 역사는 ‘고구려의 죽음’에서 정점을 이룬다. 그에게 신라의 삼국통일은 ‘통일’이 아니라 ‘요절’이었다. 조선조 500년은 옛 고구려의 기상을 완전히 포기하고 주저앉으면서 시작한, ‘중축(中軸)이 부러진 역사’였다. 그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분단, 전쟁 그리고 그 후로 이어진 역사에 대해서도 통렬한 자기반성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모든 불의와 좌절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사의 진보를 믿었다. 그리고 역사의 주인은 민중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한국사만 그런 게 아니고 인류의 역사가 고난의 역사라고 상기시키면서 고난은 하나님의 섭리이며 고난에는 뜻이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또한 고난은 인간과 역사를 성숙시키는 시험이며, 그 가운데 스스로를 돌아보고 고난을 극복함으로써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고 말한다. 역사학자 천관우는 ‘한국역사’를 두고 “사료의 창고가 아닌 펄펄 뛰는 역사”라고 칭찬했으며 함석헌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당대의 첫째가는 역사가의 하나”라고 평했다.

1970년 4월 함석헌은 잡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했다. 그러나 5월호에서 5․16을 ‘한 칼의 더러운 도륙’이라는 뜻의 ‘오일륙(汚一戮)’으로 규정했다가 발행정지 처분을 받았다. 1971년 7월 대법원의 승소 판결로 다시 발행되었으나 1980년 전두환 정권의 계엄령으로 다시 폐간되는 수난을 겪었다.

1970년대의 함석헌은 반독재 운동의 선봉이자 전사였다. 1979년과 1985년 두 번에 걸쳐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으나 운이 따르지 않았다. 2005년 광복 60주년을 맞아 KBS가 분야별 학자 10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을 때 한국 현대지성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 1위로 꼽혔을 만큼 그는 진정 ‘행동하는 지식인의 표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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