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에 몰아친 제2차 여성해방운동의 이론적 토대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는 ‘모호함의 윤리학’을 쓴 철학자로, ‘초대받은 여자’ ‘타인의 피’ ‘레 망다랭’ 등을 쓴 소설가로, 무엇보다 불후의 저작 ’제2의 성‘을 쓴 에세이스트로 독립된 자기 영역을 확실히 개척한 엘리트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는 장폴 사르트르(1905~1980)의 그림자로부터 평생 동안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데도 보부아르에게는 자신의 말대로 “순수한 의식이며 자유 그 자체”인 사르트르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고 창작의 활력소가 되었다.
애인이자 친구였고, 동지이자 스승이었으며 경쟁자이자 공모자였던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소르본대 시절이던 1929년 7월에 이뤄졌다. 철학 교수 자격시험을 준비하던 두 사람은 나란히 수석(사르트르)과 차석(보부아르)으로 시험에 합격, 지적인 상대로서도 손색이 없었다.
1945년 10월 사르트르가 프랑스 지성계를 대표하는 ‘현대’지를 창간할 때 보부아르도 편집위원으로 참여해 함께 당대의 지성계를 풍미하고, 길거리 투쟁에 나섰다. 두 사람은 서로의 원고를 가장 먼저 읽고 검토하는 사이였다. 사르트르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에 쓴 ‘작별 의식’만이 보부아르가 쓴 책들 가운데 출간되기 전 사르트르가 읽어보지 못한 유일한 책이었다. 둘은 죽어서도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에 함께 묻혀 부부보다 질긴 인연을 이어갔다.
보부아르는 몰락해가는 상류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났다. 소르본대 시절 보부아르는 자신의 생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경계와 구분을 부정하고, 자신의 계급으로부터 빠져나오겠다”며 자신을 다그쳤다. 1929년 21살 때 치른 철학 교수 자격시험에는 차석이자 최연소로 합격했다. 공식적인 수석은 사르트르였지만 당시 심사위원들은 실제로는 보부아르가 더 뛰어나다는 데 동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교사로 활동했으나 보부아르를 잘 따르던 여학생의 부모가 “보부아르가 문란한 생활로 제자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며 학교 당국에 진정을 내는 바람에 1943년 여름 해고되었다. 보부아르는 이후 전업 작가가 되었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해 자칫 사르트르의 아류로 평가받을 수도 있었으나 사르트르의 그 어떤 저작물보다 더 위대한 불후의 명저를 남기면서 비로소 독립된 존재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 그것은 1949년 6월에 출판된 에세이집 ‘제2의 성’이었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고 문화적․사회적 영향에서 생겨난 결과’로 요약되는 ‘제2의 성’은 신체 조건, 역사, 신화 등 다양한 이론적 관점에서 여성을 고찰한 1권, 유년기부터 성년에 이르기까지 여자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억압되는가를 살핀 2권으로 구성되었다. 정신분석, 유물론, 창녀·레즈비언, 노년 문제에 이르기까지 여성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백과사전식으로 다룬 이 책의 기본 명제는 “여성은 남성을 주체로 한 문명에 의해서 ‘타자’이자 2차적인 존재로 취급되고 있는 존재”라는 주장이었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 ‘성경의 이념도 남성의 여성 장악에 적지 않게 기여’ 등 당시의 전통적 규범으로는 감히 입에 올리기 어려운 메시지를 담다 보니 여성에겐 자아를 일깨우는 각성제 역할을 한 반면 종교계와 남성들에겐 묵과할 수 없는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알베르 카뮈는 “프랑스의 수컷을 조롱했다”고 비난을 퍼부었고, 교황청은 금서 목록에 올렸으며 프랑수아 모리아크는 “포르노”라고 혹평했다. 좌파들마저 “여성해방은 계급해방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라며 몰아붙였다.
남성들의 이런 비판과 혹평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출간 1주 만에 2만 부를 구입해 열렬한 호응으로 화답했다. 1953년에 나온 영역본이 200만 부 이상 팔리는 등 전 세계적으로도 열풍을 일으켜 1960년대에 몰아친 제2차 여성해방운동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이후에도 자전적 4부작 ‘얌전한 처녀의 회상’(1958), ‘나이의 힘’(1960), ‘사물의 힘’(1963), ‘총결산’(1972) 등을 통해 자신의 삶은 물론 프랑스 현대 지성사의 한 시대를 기록했다. 그는 개인의 내면에 머무는 실존철학에 그치지 않고 ‘앙가주망’, 즉 적극적인 참여를 추구하는 실존철학을 추구했다. 사회의 불의와 부정에 항의하고 시위에 참여하는 등 행동하는 지성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프랑스 공산당과 함께할 때도 있었지만 현실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독자 노선을 추구했다.
1970년대부터는 여성해방운동에 적극 참여해 낙태와 피임 자유화, 노동 현장에서의 여성 노동자 권익 보호, 가정 폭력 근절 등을 위해 앞장섰다. 이런 그의 업적을 인정해 1998년 ‘타임’지는 20세기에 인간의 삶과 정신을 바꿔놓은 10대 논픽션 중 한 권으로 ‘제2의 성’을 선정해 이 위대한 여성에게 경의를 표했다. 프랑스도 2006년 7월 파리의 센 강에 세워진 37번째 다리에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보부아르의 이름을 붙여 업적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