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에드거 스노 ‘중국의 붉은 별’ 출간

격동기 중국의 생생한 현장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게 그의 운명

에드거 스노(1905~1972)가 운명의 땅 중국과 처음 대면한 것은 23살이던 1928년이었다. 당시 그는 미주리대 언론학부를 졸업하고 대공황 직전의 호황 속에서 증권에 투자해 벌어들인 돈으로 1년간 여정으로 세계 여행을 하고 있었다. 스노가 6주 정도 머문다는 생각으로 중국 상해에 도착한 것은 1928년 7월 6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중국의 혁명과 반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는 중국 인민들의 삶을 목격하면서 틀어졌다. 중국인의 비참한 삶은 스노의 내면에 잠복해 있던 휴머니즘을 부추겼고 그를 역사의 중심부로 끌어들였다. 사실 그만 몰랐지 운명은 스노에게 격동기 중국의 생생한 현장을 전 세계에 알리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운명이 스노에게 처음 부여한 역할은 미국계 신문 ‘차이나 위클리 리뷰’지 기자였다. 결국 6주로 예정된 체류 기간은 기약 없이 늘어났다. 1929년 4월 국민당 정부가 중국의 수려한 풍경을 해외에 알려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스노에게 철도 여행을 주선했다. 그러나 스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가는 곳마다 눈에 띄는 죽은 시체들이었다. 고비사막 남쪽 도시에 4년간 비가 내리지 않아 500만 명이 기근으로 죽었다는 소문도 거짓이 아니었다.

스노는 타고난 방랑벽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지적 호기심으로 가득 찬 인물답게 중국은 물론 대만, 인도차이나, 인도 등을 둘러본 뒤 그들의 가슴속에 꿈틀대고 있는 독립과 자존의 몸부림을 확인하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스노는 더 이상 낭만적 동경과 낙천적 기대로 가득 찬 젊은이가 아니었다.

스노의 존재감이 크게 부각된 것은 1932년 1월 일본군이 일으킨 상해사변 때였다. 그가 현장에서 목격하고 쓴 기사는 거의 매일 미국 언론의 1면을 장식했다. 1932년 12월 25일에는 중국에서 알게 된 상해 주재 미국 영사관 직원 헬렌 포스터와 결혼, 중국과의 인연을 더욱 확장했다. 두 사람은 중국에서 머무는 8년 동안 부부이자 동료로 지냈다.

1935년 무렵 세계의 시선은 대장정을 끝내고 연안에 자리 잡은 중국의 홍군을 향하고 있었다. 홍군이 고사 직전인 것으로 추정할 뿐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었는지 그들이 진짜 공산주의자인지를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당시 홍군은 1만 2,500km의 대장정으로 기력을 상실한 데다 장개석의 국민당군에 의해 점점 포위망이 좁혀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모택동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자신과 전우들이 걸어온 길을 외부에 알리고 후세에 남기고 싶었다. 그러나 중국의 작가나 기자들은 모택동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했다. 비적들을 옹호했다간 귀신도 모르게 사라지기 때문이다.

 

모택동과 며칠 밤을 함께 지내며 묻고 또 물어

모택동은 홍군의 진면목을 대외에 알릴 외국인 기자를 손문의 부인 송경령에게 요청했다. 그때 송경령의 눈에 들어온 인물이 에드거 스노였다. 스노 역시 몇 년 전 공산 토비들을 만나겠다며 강서 소비에트 문턱까지 갔다가 쫓겨난 적이 있어 개인적 호기심과 취재욕이 발동했다. 얼마 후 한 중국인이 스노에게 접근, 홍군과의 접선 방법을 알려주었다.

스노가 관광객으로 가장해 연안에 도착한 것은 1936년 6월 말이었다. 연안 대부분은 아직 국민당군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곳의 책임자는 장개석의 지휘를 받으면서도 홍군과 항일 전선을 모색하고 있는 장학량이었다. 그는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때 일본군과 대적하지 말라는 장개석의 명령 때문에 고스란히 만주를 일본에 내주고 쫓겨나야 했던 몇 년 전의 아픈 기억으로 장개석에게 불만이 많았다.

스노는 장학량의 협조를 받아 7월 9일 산서성 북쪽에 위치한 홍군의 수도 보안으로 들어갔고 1주일 뒤 모택동의 동굴 집으로 초대되어 인터뷰를 시작했다. 스노는 모택동과 며칠 밤을 함께 지내며 그가 걸어온 길 등을 묻고 또 물었다. 주덕, 팽덕회 등 다른 지도자들도 만나 대장정에 얽힌 얘기를 들었다. 스노를 특히 감동시킨 것은 국민당 정부의 통치 구역에서는 볼 수 없는 주민들의 생활 모습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형제자매였고 동지였다.

스노는 10월 중순 북경에 도착했다. 그가 작성한 기사는 미국과 영국의 주요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스노의 기록은 1937년 10월 영국의 출판사에서 ‘중국의 붉은 별’이라는 제목으로 먼저 출판되고 미국에서는 1938년 1월 출판되었다. 상해의 공산당 비밀당원들은 이것을 중국어로 번역한 해적판을 만들어 공산주의 선전에 활용했다.

정확하고 객관적인 보도로 명성이 높은 미국 기자가 그것도 제 발로 홍군의 근거지를 찾아가 4개월간 현장을 누빈 기록은 중국은 물론 전 세계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중국의 청소년들과 지식인들은 책을 통해 모택동, 주덕, 팽덕회, 주은래 등 현상 수배자들과 홍군의 진면목을 알고 연안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반응은 해외에서도 왔다. 캐나다 의사 노먼 베순을 비롯해 외국의 의사와 기자, 작가들이 연안으로 몰려들었다.

 

‘중국의 붉은 별’, 미국에서 격렬한 논쟁 불러일으켜

‘중국의 붉은 별’은 중국 공산당의 내밀한 부분을 최초로 외부 세계에 알렸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컸지만 중국 공산당에 대한 서방 세계의 부정적 인식을 부분적으로나마 바꾸게 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었다. 스노는 책에서 “홍비라 불리는 공산 세력이 종국에는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점쳤는데 이는 훗날 현실이 되었다.

‘중국의 붉은 별’은 수년 뒤 미국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스노가 중국 공산당을 명백한 공산주의자 집단으로 규정하지 않고 ‘농촌 개혁가들’, ‘평등주의적 농민운동가들’이라고 소개해 미 정부가 중국 공산당을 오도하고 제2차 국공합작을 추진토록 했다는 것이다. 책이 그런 느낌을 준 것은 사실이나 객관적인 사실, 정확한 수치, 중국 인민들의 목소리에 입각해 종국에는 중국 공산당이 공산혁명 이론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지적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스노의 잘못된 기록이라기보다 미 정부가 오판한 결과였다.

스노는 중국 체류 13년 만인 1941년 2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아프리카와 인도를 거쳐 소련 모스크바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삶을 ‘아리랑의 노래’(1941)에 기록해 님 웨일스로 알려진 부인과는 1949년 이혼했다. 재혼한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딸의 이름을 ‘시안’으로 짓는 것으로 중국에 대한 여전한 애정을 과시했다. 1950년대 미국에 매카시 광풍이 불었을 때는 하원의 비미행위조사위원회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으나 비미국적 인사로는 단죄되지 않았다.

스노에게 중국과 관련된 마지막 역할이 주어진 것은 1970년이었다. 중국이 문화대혁명의 광란을 끝내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서두르던 1970년 여름 중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 모택동과 주은래를 만났다. 그해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기념일 행사에도 초청되어 모택동과 함께 천안문에 나란히 서는 영예를 누렸다. 닉슨은 1972년 2월 21일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중국을 공식 방문했다. 하지만 스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닉슨이 미국을 떠나기 수일 전인 2월 15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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