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염상섭 소설 ‘삼대’ 조선일보 연재

남북을 통튼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

염상섭(1897~1963)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서울 중산층의 풍속, 의식, 토박이 서울말씨를 창작의 텃밭으로 삼았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당대 서울 중류 계층의 삶을 생생히 포착한 생활 어휘들로 가득하다. “순수 국어의 보고”, “근대적 생활 감각의 언어”로 불리는 이유다. 그가 쓴 장편 17편, 단편 160편, 평론 100편, 수필 30편 등이 우리 근대문학의 뼈대를 세웠다는 게 평론가들의 중평이다. 그래서 붙여진 수식어가 “남북을 통튼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 “근대 사실주의 문학의 화신”이다.

염상섭은 서울에서 태어나 1911년 보성중학에 입학했으나 1년이 멀다 하고 학교를 옮겨 다녔다. 1912년 8월 보성중학을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13년 4월 도쿄의 한 중학교에 편입했다. 이 학교도 1년 만에 그만두고 미션스쿨인 성학원으로 옮겨 침례교 세례를 받았다. 1918년 4월 입학한 게이오대도 그해 10월 자퇴했다.

1919년 3월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염상섭도 오사카의 한 공원에서 ‘재오사카 조선노동자 일동’ 명의로 거사를 준비했으나 전날 밤 체포되어 3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옥중에서 오사카 아사히신문 주필에게 ‘어째서 조선은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라는 글을 보냈다. 석방 후에는 최초의 소설 ‘암야’를 탈고(1919.10)하고 홍난파가 발행하는 음악종합지 ‘삼광’지에 첫 평론을 발표(1919.12)했다.

요코하마 인쇄소에 근무하던 1920년 1월, 창간을 준비하고 있는 경성의 동아일보에서 전보를 보내왔다. 1920년 2월 1일자로 정경부 기자로 임명한다는 전보였다. 염상섭은 동아일보 창간 기자로 입사해 낮에는 기사를 쓰고 밤에는 문예동인지 ‘폐허’ 창간을 서둘렀다. 그러다가 1920년 6월 동아일보를 그만두고 7월 25일 ‘폐허’ 창간호를 발행했다. 이후 염상섭은 툭하면 신문사에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했다.

동아일보 퇴사 후 차비조차 없어 대낮부터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을 때 일본 육사 출신의 큰형이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를 제안했다. 형은 일본군으로 복무하다가 대위로 전역한 후 오산학교 교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염상섭은 1920년 10월 오산학교로 부임, 일본어와 작문을 가르치면서 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1921년 3월부터 쓰기 시작해 5월 탈고했다. 그 후 1921년 7월 오산학교를 사직하고 경성으로 올라와 1921년 8월부터 10월까지 ‘개벽’지에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연재했다.

 

소설가와 언론인으로는 출중했으나 생활인으로는 무능

장기를 빼앗기는 고통 속에서도 살아남은 손발 묶인 지식인들을 형상화한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문단에 화제를 뿌렸다. 한국 근대소설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호평이 쏟아졌다. ‘표본실…’은 당시 조선 문인들에게는 충격적인 새로운 양식의 소설이었다. 훗날 ‘삼천리’ 1933년 9월호는 “감상과 인도주의에 젖어오던 당시 문단은 실로 섬뜩해 했다”고 평가했다.

‘표본실…’을 읽고 놀란 사람 중에는 김동인도 있었다. 당시는 조선 문단이 이인직의 독무대와 이광수의 독무대를 지나서 김동인의 독무대 시기였는데 염상섭이 ‘진짜 근대소설’을 들고 나오자 김동인이 강적이 나타났다며 충격을 받은 것이다.

염상섭은 최남선이 발간한 주간지 ‘동명’의 창간(1922.9)을 준비하면서 ‘묘지’를 발표(1922.7)하고 최남선이 주도한 조선문인회 결성(1922.12)에 힘을 보탰다. 1924년 3월 ‘동명’의 후신으로 창간된 시대일보 사회부장이 되자 ‘묘지’를 ‘만세전’으로 제목을 바꿔 4월부터 시대일보에 연재했다. ‘만세전’에서 그는 주인공을 통해 일본의 무자비한 횡포, 조선의 변하지 않는 의식과 낡은 관념을 질타했다.

1924년 9월 시대일보를 그만두고 1925년 10월부터 첫 장편소설 ‘진주는 주엇으나’를 동아일보에 연재한 후 일본 문단에 진출하기 위해 1926년 1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에서 몇 편의 소설을 동아일보에 연재한 후 1928년 8월 경성으로 돌아와 1929년 5월 자신보다 13살이 어린 20세 처녀와 결혼했다.

1929년 9월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입사해 장편소설 ‘광분’(1929.10~1930.8)을 조선일보에 연재하고 ‘신생’지에 단편 ‘출분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발표했다. ‘광분’에서는 통속적인 애정을 묘사하면서 광주학생의거 등 시국 관련 이야기를 교묘하게 끌어들였다. ‘출분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김동인의 아픈 상처를 건드렸다.

당시 김동인은 평양 보통강 관개사업을 벌였다가 막대한 유산을 잃고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궁핍해지고 1927년 아내까지 여섯 살 난 딸을 데리고 집을 나가는 등 가정 파탄까지 가중되면서 김동인의 삶은 뿌리째 흔들렸다. 게다가 우울증 등 신경증세의 악화로 수면제와 최면제를 과다 복용하면서 몸까지 망가졌다. 염상섭은 소설에서 김동인을 지칭하지는 않았으나 문단 사람들 누구나 김동인으로 짐작했다. 염상섭은 미안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작가로서 좋은 소재를 놓치기 싫었다. 게다가 늘 주눅 들었던 김동인에게 소심한 복수를 한다고 생각하니 기분도 상큼했다.

 

‘한국 근대소설의 새로운 장 열었다’ 호평 쏟아져

염상섭은 조선일보에 재직 중이던 1931년 1월 1일부터 9월 17일까지 1930년대 서울의 보수적인 중산층 집안인 조씨 일가의 몰락 과정을 생생하게 그린 ‘삼대(三代)’를 연재했다. 연재 중 소설에 전념하기 위해 조선일보를 6월에 사직했다.

‘삼대’는 1920~1930년대 식민지 시대를 배경으로 3대에 걸친 갈등을 통해 당시 식민지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대한제국 말에서부터 식민지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사회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소설은 유교 전통사회의 껍질을 깨고 근대사회로 이행해 가던 당대 중산층 생활의 이면과 젊은 지식인의 다양한 초상을 서울 토박이의 언어 감각으로 구체적이고도 정확하게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염상섭은 1932년 1월 김동인이 ‘동광’지에 발표한 단편소설 ‘발가락이 닮았다’를 보고 대로했다. 소설은 총각 시절 방탕하게 산 탓에 성병을 앓아 생식 능력이 의심되는 주인공 M이 결혼 후 아내가 불륜으로 낳은 자식을 자기 것으로 믿으려는 눈물겨운 희극을 다룬 것인데, 이 M이 염상섭 자신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물론 그렇게 볼 만한 이유는 충분했다. M의 결혼 연령이 염상섭과 같은 32세이고, 구식 혼례와 아내 학대, 가난하고 술고래였던 점까지 흡사했다. 소설이 발표되기 얼마 전에 염상섭이 아기를 낳은 점 등도 유사했다. 이 때문에 과거 ‘출분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염상섭에게 김동인이 복수한 것이라는 입소문이 문단에 돌아 다녔다.

염상섭은 1935년 5월 매일신보 부장으로 입사했다.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였기 때문에 문인들이 기자로 활동하거나 작품 기고를 꺼리는 곳이었다. 염상섭도 매일신보 경력을 부끄러워했다. 결국 1936년 3월 매일신보를 그만두고 만주 장춘으로 건너가 만선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근무했다. 이 때부터 해방 때까지는 창작 활동을 중단했다. 1939년 9월 만선일보를 사직하고 만주 안동에 위치한 대동항건설주식회사 홍보관 자리로 옮겨갔다.

1945년 8월 해방 때까지 그곳에 머물다가 10월 신의주에 도착, 8개월을 머무른 뒤 1946년 6월 38선을 내려와 서울에 정착했다. 1946년 10월부터 9개월간 경향신문 초대 편집국장을 지낸 후에는 전업작가로 돌아서 해방 직후 문단에 처음 나온 장편소설 ‘효풍’(1948.1~11)을 자유신문에 연재하고 ‘만세전’(1948.10)과 ‘삼대’(1948.11)를 책으로 출판했다. 6·25가 발발했을 때는 해군 정훈장교로 근무하다가 휴전협정 후인 1953년 8월 중령으로 예편했다.

 

술에 관한 일화 무궁무진

염상섭은 이처럼 소설가와 언론인으로서 출중한 재능을 발휘했으나 생활에서만은 죽는 날까지 무능했다. 맏형 염창섭과 선배 진학문이 없었다면 염상섭의 문학이 만개하지 못했을 수 있다는 주장도 이래서 나온 것이다. 염상섭이 일본으로 건너가 어렵지만 그런대로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장교로 부임한 큰형 염창섭의 도움이 컸다. 1920년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한 것도 육군 대위로 전역한 염창섭이 오산학교 교감으로 근무할 때였다.

3년 선배 진학문은 염상섭이 신문기자의 길을 걷는 고비고비마다 앞길을 터준 은인이었다. 염상섭이 일본에서 옥살이를 하고 있을 때, 진학문은 일본의 오사카 아사히신문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진학문은 1920년 4월 동아일보가 창간될 때 초대 정경부장으로 부임하면서 염상섭을 창간 기자로 스카우트했다. 이후 동아일보를 나와 1922년 ‘동명’지 주간, 1924년 ‘시대일보’의 편집국장으로 부임할 때도 염상섭을 불러들였다. 염상섭이 1936년 만선일보 편집국장으로 가게 된 것도 당시 진학문이 만주국의 참사관으로 만선일보를 감독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염상섭은 술에 취해 걸음걸이가 바르지 못하다고 친구들이 ‘횡보’라고 별명을 붙여주었을 정도로 애주가였다. 남이 권유하면 일부러 딴짓을 해 ‘횡보’로 불렸다는 설도 있다. 염상섭은 주걸로 통했다. 주사와 기벽도 심했다. 만취 상태에서 다른 사람에게 시비 거는 것은 예사였다. 술에 취하면 안하무인격이었지만 진학문과 최남선에게만은 만취 상태에서도 고양이 앞의 쥐처럼 행동했다.

술에 관한 일화는 무궁무진하다. 친구들과 오후 3시에 남대문을 출발, 동대문 쪽으로 걸어가면서 새벽 2시까지 대포집을 모조리 더듬어가며 술을 마셨는데 현진건이 60곳, 나도향이 70곳에서 골아 떨어졌을 때 횡보만은 100곳을 들른 후에야 이 엽기적인 일을 그만두었다는 일화도 있다. 1963년 3월 14일 직장암으로 사망하기 직전에도 부인이 청주를 숟가락에 떠 입에 넣어 주었다고 한다. 만년에 솟기 시작한 이마 위의 혹은 그를 떠올리게 하는 명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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