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오세창 ‘근역서화징’ 출간

개화파 인사, 언론인, 독립운동가, 서화 연구가, 사회 원로의 삶 살아

오세창(1864~1953)의 삶은 크게 개화파 인사, 언론인, 독립운동가, 서화 연구가로 구분된다. 해방 공간에서도 80대의 나이에 김구와 이승만이 각각 주도하는 정치조직의 원로로 추대되고 국가적 중요 행사 때마다 국민을 대표했다. 특히 서화사 연구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독보적인 존재로 인정받았다. 그는 서화 감식가와 수집가로서도 유명했지만 서예가와 전각가로도 명성이 높았다. 이런 바탕에는 중국어 역관이자 개화사상가인 아버지 오경석의 선각자적 삶이 크게 작용했다.

오경석(1831~1879)은 서구 제국주의 침략에 시달리는 청나라의 실상을 현장에서 목격하면서 조선이 자주적으로 개화해야 한다고 깨달았던 개화파의 비조였다. 8대조부터 부친 오응현에까지 7대에 걸쳐 역관을 지낸 집안의 후예답게 그 역시 15세 때 역과에 합격, 8대째 역관이 되었다. 곧 그의 아우들까지 5형제 모두 역관이 되고 4명의 아들도 역관으로 키워 명문 역관 집안의 전통을 이어갔다. 오경석은 어려서부터 한어와 금석·서화를 배우고 실학을 공부했다.

오경석 삶의 분수령이 된 것은 22세 때인 1853년 처음 북경을 방문해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주변 정세를 파악하면서였다. 오경석은 아편전쟁(1840)으로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고 태평천국의 난(1851)으로 외우내환에 직면한 청국의 실상을 현장에서 목격한 것을 비롯해 모두 13차례나 북경을 왕래하면서 세계 정세에 눈을 뜨고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런 변화를 조선에 알리기 위해 서양 문물을 소개한 ‘해국도지’, ‘영환지략’ 등 10여 권의 서적을 구입해 가져왔다. ‘해국도지’는 세계 주요국의 역사·정치·지리·산업·풍습 등을 망라한 아시아 최초의 국제편람이고, ‘영환지략’은 10권으로 된 세계 각국의 지리서로 나라별 지도와 지지를 상세하게 해설한 책이다.

오경석은 청국에서 구입한 책들을 자신의 친구이자 한의사인 유홍기에게 먼저 읽도록 했다. 다만 자신과 유홍기가 중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양반 자제를 가르칠 수 없다는 신분적 한계를 의식해 1869년 평안도 관찰사에서 한성판윤으로 전임된 박규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1866년 대동강을 거슬러 침입해온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격침시켜 대원군의 신임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중국어 역관이자 개화사상가인 아버지 오경석의 영향이 커

오경석, 유홍기, 박규수 세 사람은 1870년부터 서울 북촌 재동의 박규수 자택 사랑방에 김윤식·김옥균·박영효·홍영식·유길준·서광범 등 양반 제자들을 불러모아 오경석이 북경에서 가져온 책자를 교재로 삼아 국제 정세의 변화와 근대화 교육을 시작했다. 오경석, 유홍기, 박규수 세 사람을 우리나라 개화파의 비조로 부르는 이유다.

1866년 대원군이 조선에 체류하던 프랑스 신부 9명을 처형한 병인사옥이 일어나자 청국에 주둔하던 프랑스 함대가 조선 침공을 준비했다. 오경석은 중국 상해에 정박 중인 프랑스 전함의 병력 규모, 전함 성능, 화포 위력 등 구체적인 정보를 알아내 조정에 보고했다. 또한 프랑스 함대가 군량을 3개월분밖에 적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면 대결을 하지 말고 지형지물을 이용해 방어하면서 지구전을 전개하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해 시작된 병인양요는 결국 2개월 간의 공방전을 거쳐 프랑스 함대가 물러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오경석은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금석문 146종을 수집하고 해설을 붙여 ‘삼한 금석록’을 편찬했는데 이는 아들 오세창이 금석학과 전각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다.

오세창은 서울에서 태어나 8살 때 초기 개화파를 대표하는 유홍기(유대치)를 스승으로 모셨다. 15세 때인 1879년 5월 역과에 합격했으나 그해 8월 어머니와 아버지가 잇달아 세상을 떠나 1년 뒤 역관 생활을 시작했다. 1886년 박문국의 주사로 발탁되어 관보인 ‘한성주보’ 기자로 2년간 활동하고 군국기무처, 농상공부, 우정국 등을 거치며 경력을 쌓았다. 1896년 1월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는 누구보다 먼저 단발을 해 시대 변화를 적극 수용했다. 1897년 9월 일본 공사의 초청으로 도쿄외국어학교 조선어과 교사로 부임해 이듬해 9월까지 1년간 지내며 일본의 서양 문물 수용과 근대적 국력 구축의 실상을 체험하고 귀국했다.

하지만 1902년 유길준이 일본 육사 출신 청년 장교들의 결사인 일심회와 함께 모의한 쿠데타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아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 무렵 일본에 망명 중인 손병희를 만나 우리 민족이 살아남으려면 일본식 문명개화를 배워야 한다는 데 의기투합했다. 1906년 1월 손병희와 함께 4년 만에 귀국, 합방론을 주장하는 일진회에 맞서 민족종교 동학의 정통성을 지키는 선봉에 섰다.

1906년 6월 손병희가 창간한 ‘만세보’(1906.6~1907.6) 사장에 임명되었을 때는 만세보 제작에 두 가지 새로운 방법을 도입했다. 하나는 신소설의 연재이고 다른 하나는 기사 한자에 한글로 깨알 같은 글씨 크기의 음을 다는 루비 활자를 채용한 것이다. 우리나라 첫 신문 연재소설이자 최초의 신소설로 인정받는 이인직의 ‘혈의 누’는 1906년 7월 22일부터 연재되었다. 만세보는 애국 계몽운동을 펼치다가 1907년 6월 29일 293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만세보 폐간 후에는 1907년 11월 장지연·남궁억·권동진 등 민족주의자들이 결성한 대한협회의 부회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1909년 6월 대한협회 기관지로 창간한 ‘대한민보’ 사장에 임명되어 항일 언론 활동을 펼쳤다. 오세창은 화가 이도영이 한국의 정치·사회 현실을 풍자하며 비판하고 통분한 그림을 대한민보에 연재했다. 이 그림은 오늘날 신문만화의 효시로 꼽힌다.

1910년 8월 한일합방으로 대한민보마저 폐간되자 오세창은 언론인의 길을 접고 오래 전부터 관심을 기울여온 역대 서화가들을 조사·정리하고 옛 글씨와 그림을 수집하는 데 몰두했다. 이는 조선왕조가 망하면서 서화 등 우리의 유물들이 헐값으로 일본에 팔려나가거나 불쏘시개로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한 오세창식 애국 활동이었다. 그러면서도 1919년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민족 대표 33인에 이름을 올려 2년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근역서화징’은 ‘한국 미술사의 시작이자 끝’ 찬사 받아

1921년 12월 가출옥한 후에는 더 이상 직접적인 독립 투쟁에는 나서지 않고 각종 서화, 전각, 서첩들을 수집․정리하는 데 매진했다. 그 첫 번째 결실이 장차 우리나라 서화사 연구의 기본 지침서가 될 ‘근역서화징’이다. ‘근역’은 무궁화꽃이 피는 지역이라는 의미로 우리나라를 가리키고 ‘징’은 우리나라 서화가를 징거(고증)하는 책이라는 뜻이다.

순한문으로 쓰인 ‘근역서화징’ 원고는 1917년 완성되었으나 한동안 세상에 공개되지 않다가 4년이 지난 뒤 활자화되기 시작했다. 1921년 10월 서화협회가 발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잡지 ‘서화협회회보’ 창간호에 ‘탑원초의’란 필명과 ‘근역서화사’란 제목으로 게재된 것이다. 서가 열전과 화가 열전으로 구분해 연재를 시작했으나 회보가 1922년 3월 제2호를 내고 중단되는 바람에 2회 연재로 그쳤다. ‘근역서화사’는 ‘근역서화징’으로 개제되어 1928년 5월 5일 계명구락부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근역서화징’은 신라시대 솔거 이후 20세기 초반 작가 나수연에 이르기까지 392명의 화가, 576명의 서가, 149명의 서화가 등 총 1,117명의 작품과 생애를 기록한 것으로 신라, 고려, 조선 초기, 조선 중기, 조선 말기의 다섯 시대로 구분․편집되었다. 먼저 출생 연도순으로 배열한 뒤 각 서화가의 자, 호, 본관, 가세, 수학(사제 관계), 관직, 사망 연도 등을 소개하고 예술에 대한 기록과 논평을 싣고 출전을 밝혔다. ‘근역서화징’은 한국 미술사 연구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 미술사의 시작이자 끝’, ‘미술사학도의 성전’ 등 온갖 찬사가 넘쳐난다. 70년 만인 1998년 우리말로 완역되었다.

‘근역서화징’ 편찬의 토대가 된 것은 ‘근역화휘’와 ‘근역서휘’다. ‘근역서휘’는 고려 말에서 대한제국까지 명필 1,100명의 필적을 모은 것이고, ‘근역화휘’는 고려 조선시대의 화가 191명의 명화 251점을 수록한 것이다. 오세창은 조선 초기부터 근대에 걸치는 850명의 서화가와 명인이 애용한 성명, 아호, 별호, 자, 기타 별칭, 이명 등을 새긴 3,912개의 인영(印影․인장 찍은 것)도 1937년 6월 편집했다. 이것은 1968년 9월 국회도서관에 의해 ‘근역인수’라는 제목의 영인본으로 출판되었는데 ‘근역서화징’과 더불어 오세창 필생의 업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돌, 나무, 뿔, 금속, 옥 등에 ‘전서’로 인장을 새기는 전각에도 눈을 떴는데 그때까지 전각은 단순한 ‘도장 파기’ 정도로만 여겨지고 있었다. 오세창은 10대 말부터 전각을 배우면서 자신을 ‘조충(새김벌레)’이라 불렀을 정도로 전각에 몰두했다. 전각이 오늘날 중요한 예술 장르로 인정을 받게 된 데는 오세창의 공로가 크다.

 

전형필의 문화재 수집과 오봉빈의 조선미술관 설립·운영에 큰 영향 미쳐

오세창은 ‘근역서휘’에 들어가지 않은 1,136명의 묵적(墨跡)으로도 1943년 34책의 ‘근묵’을 편집해 후세에 남겼다. ‘근묵’은 국왕과 왕후로부터 문무 관료, 재야 학자, 승려, 중인에 이르기까지 주로 조선시대 주요 인물들의 서간과 시 등 글씨를 모아 서첩으로 묶은 것이다. 한국 서예사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근묵’은 행서·초서·해서 등 다양한 서체를 포함하고, 내용도 편지글이 상당수를 차지해 정몽주·정도전·이이·정약용 등의 자연스러운 필치를 엿볼 수 있고 한국의 서예와 당시의 문화․문장들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오세창은 고서화 수집과 연구에도 열심이었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완성하는 데도 부지런했다. 1918년 안중식·조석진·이도영 등 조선의 저명한 서예가와 화가들이 결성한 근대적 미술 단체 ‘서화협회’에도 13명의 발기인으로 참가하고 서화협회전에는 수시로 서예 작품을 출품했다.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1922년 6월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서예 부문에서 1등 없는 2등을 차지한 데서 알 수 있듯 그는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다.

오세창은 전형필의 한국 고미술 문화재 수집과 오봉빈의 조선미술관 설립·운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전형필은 오세창의 고미술품 감식의 지도를 받으며 물려받은 10만 석 재산으로 일본인들의 손에 넘어가는 등 위기에 처한 각종 자기와 골동서화 등을 사들였다. 오봉빈이 1929년 서울에서 신구 서화를 전시하고 판매를 의도한 조선미술관을 서울에 개설하게 된 배경도 오세창의 권고와 직접적인 지도에 힘입은 것이다.

해방 후에는 매일신보 사장으로 추대되어 매일신보의 제호를 서울신문으로 바꾸는 등 중요한 작업을 마치고 19일 뒤 서울신문의 명예사장으로 물러났다. 정치적으로는 여운형이 주도하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뒤이어 건준이 발표한 조선인민공화국의 고문으로 추대되었으나 이 자리는 받아들이지 않고 우익의 민족 세력이 1945년 9월 결성한 한국민주당 영수의 1인으로 이승만·김구·이시영·서재필 등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1946년 2월에는 김구와 이승만이 통합·발족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46년 8월 해방 1주년 기념식 때는 일본에 빼앗겼던 대한제국 황제의 옥새를 전체 국민을 대표해 인수하고 1949년 3월 열린 반민특위 재판정에 태극기와 함께 걸린 ‘민족정기(民族正氣)’ 휘호를 썼다. 김구가 암살당했을 때는 노구를 이끌고 장의위원회 위원장직을 맡는 등 정치·사회 활동을 왕성하게 전개했다. 6·25 발발 후 피란지인 대구에서 1953년 4월 16일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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