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지면 만질수록 그 증세가 덧나는 상처와도 같은 존재”
이광수(1892~1950)에게 낙인처럼 따라다니는 비난의 키워드는 ‘민족 반역자’요 ‘친일파’다. 하지만 문학계 일부에서는 이광수의 친일 활동은 인정하면서도 “다면성을 외면하고 친일파라는 족쇄만 채운다면 우리 문학사에 남겨진 이광수의 족적이 형해조차 없어진다”며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도 있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이광수는 만지면 만질수록 그 증세가 덧나는 그런 상처와도 같다. 조선 현대문학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지만 그의 친일로 조선 정신사에 감출 수 없는 흠집을 만든 사람이 이광수”라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광수는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보였다. 그러나 10살 되던 1902년 8월 부모가 콜레라에 걸려 9일 간격을 두고 세상을 떠나 정규 교육은 고사하고 친척 집을 전전하는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2명의 누이동생 중 한 명도 이듬해 죽어 슬픔이 가중되었다. 이광수는 11살 때 입도한 동학에서 서기로 활동하다가 1905년 서울로 상경했다. 13살의 소년인데도 친일단체 일진회가 세운 강습소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다가 1905년 8월 일진회가 주관한 유학생에 뽑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광수는 일본에서 다이세이중학을 거쳐 1907년 9월 메이지학원 중학부 3학년에 입학했다. 재학 중 도쿄에 들른 안창호의 강연에 감동하고 톨스토이와 바이런 등의 작품을 읽으며 서구의 문예사조에 심취했다. 1909년 12월 메이지학원 동창회보 ‘백금학보’에 일본어로 쓴 단편소설 ‘사랑인가’를 발표해 유학생들 사이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사랑인가’는 11살 때 고아가 된 조선인 유학생이 고독과 번민 속에서 사랑을 찾다가 일본인 소년에게서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만족할 만한 애정을 얻지 못한 채 괴로워한다는 내용 때문에 오늘날까지 친일문학의 시빗거리가 되고 있다.
이광수는 1910년 3월 메이지학원을 졸업하고 그해 4월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7월에는 중매결혼을 했는데 훗날 “경솔한 혼인이었다”고 후회했다. 1911년 1월 105인 사건으로 오산학교 설립자 이승훈이 투옥되어 대신 학감으로 근무하다가 1913년 11월 오산학교를 사직하고 중국 상해로 떠났다.
1914년 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인단체가 발행하는 ‘신한민보’의 주필로 가기 위해 상해를 떠나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와 북만주 등지를 거쳐 바이칼호 주변의 치타에 도착했다. 당시 모스크바행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의 설원과 광막한 흥안령을 넘으면서 느낀 대자연의 신비와 경탄은 후일 소설 ‘유정’에 묘사되었다. 1914년 6월 치타에서 교민들이 발행하는 ‘대한인정교보’지의 주필로 잠시 활동했으나 7월 1차대전의 발발로 미국행을 포기하고 9월 오산학교로 돌아와 교편을 다시 잡았다. 그러다가 1915년 9월 와세다대 고등예과 문학과에 편입하고 1917년 3월 와세다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소설 ‘무정’은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이자 한국 현대문학의 효시
재학 중이던 1916년 12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왔다. 이광수는 이미 써두었던 원고를 다듬어 서울로 보냈다. 이것이 1917년 1월 1일부터 매일신보에 연재된 ‘무정’이다. 6월 14일까지 126회로 연재가 끝난 후 1918년 7월 단행본으로 간행된힌다. 대부분 순우리말로 쓰이고 여주인공을 ‘she’와 ‘he’의 구별 없이 ‘그’라고 표현한 것도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지만 무엇보다 식민지 시대에 신소설의 통속화 경향을 극복하고 근대소설의 서사적 속성을 성공적으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미가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건적인 보수주의가 지배하던 때라 “조선 고래의 도덕률을 파괴한다”는 비난이 쇄도하고 여학생들로부터는 “박영채를 너무 불쌍하게 만든다”는 항의가 쏟아졌다. ‘무정’은 당시의 얕은 독서층에도 불구하고 1만 부 이상 팔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광수가 허영숙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이처럼 ‘무정’이 인기리에 연재되고 덕분에 전국적 유명 인사로 떠오른 1917년 3월이었다. 당시 허영숙은 도쿄여자의과전문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어느 날 이광수가 폐병으로 각혈하다 허영숙의 헌신적인 간호를 받고 위기를 넘기면서 둘 간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도쿄에서 수백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워갔으나 허영숙이 1918년 7월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면서 이별의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하지만 이광수도 곧 귀국, 1918년 9월 첫 부인과 이혼하고 다음 달 허영숙에게 청혼했다. 그러나 허영숙의 부모는 이혼 경력에 4살 된 아들까지 있는 이광수와의 결혼을 적극 반대했다. 결국 두 사람은 1918년 10월 16일 허영숙이 총독부가 시행한 의사 검정시험에 합격한 뒤 북경으로 사랑의 도피를 감행, 조선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1차대전 종전 후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 14개 원칙에 따라 파리에서 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광수는 1918년 12월 홀로 북경에서 도쿄로 건너가 백관수·김도연·서춘·김철수 등 재일 유학생 등과 함께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했다. 뒤이어 1919년 1월 31일 자신이 기초한 조선청년독립단 선언문을 본국에 전하게 한 뒤 자신은 본인이 영역한 영문 선언문을 해외에 전파하기 위해 2월 5일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도쿄에서는 2월 8일 오후 2시 400여 명의 유학생이 도쿄 YMCA 건물에 모여 이광수가 기초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민족개조론’ 집필 전까지의 희망은 실력 양성과 독립 기회 추구
이광수는 1919년 8월 21일 상해에서 창간된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초대 사장 겸 주필이 되었다.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에도 가입, 안창호와 평생에 걸친 긴밀한 사제적․동지적 관계를 맺었다. 이렇게 상해에서 독립운동 관련 일에 매진하고 있을 때 1921년 2월 허영숙이 상해에 도착함으로써 상해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큰 파문이 일어났다.
임시정부가 “허영숙은 일제 앞잡이”라며 체포령을 내리고 안창호도 이광수의 귀국을 만류했으나 이광수는 1921년 2월 먼저 허영숙을 돌려 보내고 3월 말 홀로 귀국하다가 중국 심양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런데도 재판도 받지 않고 불기소 석방되어 모종의 거래가 있었음을 짐작케 했다. 소설가 박종화는 일기에서 총독부의 신변 보장을 언질 받은 허영숙의 설득 때문에 이광수가 귀순했다고 썼다.
하지만 허영숙이 상해에 당도하기 전부터 이광수는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임시정부에서 2년을 지냈지만 자신이 기대했던 국내 상황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국의 민심은 3·1 운동 때와 달리 가라앉아 있었고 임시정부는 미주에서 보내오던 자금이 끊겨 재정적으로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는 독립신문의 운영난으로 이어졌다. 임시정부의 극심한 내분으로 1920년 6월과 7월 이동휘와 안창호가 잇달아 상해를 떠난 것도 이광수를 절망하게 했다.
이광수는 1921년 5월 서울에서 병원 개업의사로 일하고 있는 허영숙과 결혼했다. 이광수에 대한 억측과 비난이 빗발치듯 일어나자 이광수는 묵묵히 집안에 들어앉아 병을 치료하며 ‘민족개조론’을 집필했다. 1922년 2월에는 흥사단의 국내 지부격인 수양동맹회(1926.1. 수양동우회로 개칭)를 결성, 궁극적으로 민족의 힘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한 부르주아 민족운동을 펼쳤다.
‘민족개조론’을 집필하기 전까지 이광수의 희망은 조선인의 실력 양성과 독립의 기회 추구였다. 실력양성론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물리치기에는 우리의 실력이 현저하게 모자란다는 뼈아픈 현실 인식에서 출발했다. 이광수는 실력이 모자라는데도 무모하게 일본과 맞서 싸우는 것은 지도자들의 편협한 자기 만족이자 경거망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국권을 빼앗긴 민족이 실력을 양성한다고 해서 독립의 기회가 빠른 시일 내에 도래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보지 않았다.
그는 교육과 식산흥업을 통해 힘을 기르고 있으면 국제 정세가 조선에 호의적일 때 비로소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 조선 자체의 실력은 아직 강대하지 않지만 국제적인 힘에 편승하면 약소한 실력으로도 독립을 얻을 수 있다고 전망한 것이다.
윌슨의 민족주의에 희망을 걸고 상해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해온 이광수에게 1919년 6월 파리강화회의가 조선 독립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종결된 것은 큰 충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독립을 얻으려면 자체 실력을 더욱 배양해야 하는데 그가 보기에 상해 임시정부는 통일적인 조직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러시아와 중국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 사이에서는 실력 양성을 통한 독립운동 준비보다는 당장 일본과 맞써 싸우자는 급진적 독립전쟁론이 우세했다. 이렇듯 상해에서 겪은 임시정부의 극심한 내분과 미국·중국·러시아 등지의 독립운동이 단결하지 못하고 분열하는 모습에서 심한 환멸을 느꼈다.
낙인처럼 따라다니는 비난의 키워드는 ‘민족 반역자’요 ‘친일파’
이런 상황에서 귀국한 이광수는 외부의 힘을 빌려 실현되길 희망했던 조선의 독립 꿈을 접고 예의 실력양성론으로 귀의했다. 하지만 과거의 실력양성론과는 달랐다. 독립을 준비하는 과거의 실력양성운동이 아니라 민족 개조 과정이 전제되어 있는, 단기적이 아니라 장기적 전망으로서의 실력양성론이었다. 이광수는 3·1 운동도 결국 민족적 역량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독립과 국민국가 쟁취에 실패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에게는 민족 개조를 통한 실력 양성이 급선무였다. 그는 어떻게든 민족성을 개조해야만 조선의 독립이 국제적 승인 하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진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1922년 5월 ‘개벽’지에 발표한 ‘민족개조론’을 통해 세상에 알렸다. 조선이 쇠퇴한 이유는 민족성이 타락했기 때문이라며 허위·비사회적 이기심·무신(無信)·겁나(怯懦․비겁함)·나타(懶惰․게으름)·사회성 결여 등의 민족성을 개조해야 조선인이 살아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민족성 개조에 얼마의 시간이 필요하냐”고 자문하면서 “50년, 100년, 200년의 영구한 사업”이라고 답해 쉽게 개조할 수 있는 민족성이 아니라는 점을 부각했다. 우리 민족의 치부를 생생하고도 남김없이 들춰낸 ‘민족개조론’에 대한 반응은 일파만파로 컸다. 이광수의 집에 칼을 든 청년들이 난입하는가 하면 개벽사의 기물을 파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늘날에도 193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한 이광수의 친일 행적과 결부지어 ‘민족개조론’을 친일 활동의 배경 논리로 간주해 비판하지만 ‘민족개조론’을 다르게 보는 시각도 있다. 논문이 발표된 1922년경의 이광수는 조선의 패망을 슬퍼하고 한민족의 자주독립을 열망했던 갓 서른의 젊은이였다며 ‘민족개조론’은 우리 민족의 잘못된 점을 반성하고 앞날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순수와 충정이라는 것이다.
‘민족개조론’을 발표한 후 온갖 비난을 받고 있는 이광수를 사회로 끌어낸 것은 동아일보였다. 이광수는 1923년 5월 동아일보에 입사하고 1924년 8월 김동인·김소월·김안서·전영택·주요한 등과 함께 ‘영대’ 동인으로 참여했다. 1926년 6월에는 영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34세의 나이에도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입학했으나 좀처럼 낫지 않는 폐병 때문에 네 차례나 휴학을 하다 1930년 1월 제적되었다.
언론인으로는 1926년 11월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했다가 1927년 9월 사임하고 1933년 8월 고향 어른 방응모가 인수한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사이 ‘마의태자’(1927), ‘단종애사’(1929), ‘이순신’(1931), ‘흙’(1933), ‘유정’(1933) 등의 소설을 연이어 발표하며 ‘대문호’로서의 명성을 이어갔다. 1934년, 이광수에게 좋지 않은 일이 잇따라 일어났다. 정신적 스승 안창호가 일제 감옥에 갇히고 장남이 7살의 어린 나이에 죽은 것이다. 장남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허영숙은 이듬해 의학공부를 더 하겠다며 세 아이를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을 했다”
이광수의 친일 행적은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중 생활을 하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난 뒤 더욱 노골화되었다. 독립의 희망을 상실한 이광수가 선택한 것은 조선인의 일본화였다. 그는 독립의 가능성이 사실상 무망한 상태에서 조선의 독립을 외치는 것은 조선인을 차별 상태에 영원히 방치하는 잘못된 태도로 보았다. 그는 조선이 독립을 할 수 없는데도 일본 제국의 신민이 되지 않는다면 영원히 노예나 2등 국민으로 살며 차별을 받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내선일체를 완벽하게 관철하는 것만이 이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이에 대한 실천의 일환으로 수양동우회 사건 보석 출소자들의 사상전향회의(1938.11)를 소집해 회원 전체 이름으로 전향서를 발표하고 남산의 조선신궁을 참배했다. 황궁 요배, 일본 국가 제창, 황군 전몰장병을 위한 묵념에도 거리낌 없이 참가했다. 중국에 출정한 일본군 위문단 결성식(1939.5)의 사회를 맡고 총독부가 주관한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 추대(1939.12)되는 등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펼쳤다. 이 같은 이광수의 친일 행적은 동료 문인들은 물론 전 조선인에게 실망과 분노, 배신감을 안겨 주었다.
친일 활동은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창씨개명하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다른 조선인에게도 창씨개명을 권유하고 젊은이들에게는 지원병 참가를 독려했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1941년 11월 수양동우회 사건 최종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44년 3월에는 경기 양주군 사릉리로 이사해 살다가 해방을 그곳에서 맞았다.
해방 후에는 친일 활동을 반성하기보다는 저서 ‘나의 고백’, ‘돌베개’ 등을 통해 “나는 민족을 위하여 살고 민족을 위하다가 죽은 이광수가 되기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라며 자신을 변호하고 합리화했다. 가족과 지인이 피신을 권고할 때는 “소가 10필이 와서 끌어도 이 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나의 목을 베어 종로 네거리에 매달아 정말 친일파가 없어진다면 나의 할 일은 다한 것”이라며 친일 활동을 정당화했다.
1949년 1월 12일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을 때는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을 했다. 내가 걸은 길이 정경대로는 아니오마는 그런 길을 걸어 민족을 위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시오”라며 자신의 친일이 소신이었음을 자신했다. 그런데도 이광수는 반민특위에 체포된 지 한 달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나고 6개월 뒤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6·25 발발 후인 1950년 7월 12일 납북되어 북으로 끌려갔다가 10월 25일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해 자강도 만포군 고개리 중턱에서 차에 탄 채 숨졌다.
☞허영숙
허영숙(1897~1975)은 국내 여성 최초로 병원을 개원한 의사로, 병든 남편을 지키는 아내로, 네 아이의 어머니로, 일제하 여기자로 다중의 삶을 산 신여성이었다. 분야마다 그보다 뛰어난 여성이 더러 있긴 했지만 이 넷이 중첩되는 영역에서는 독보적이었다. ‘대문호’ 이광수의 아내라서 세간의 주목을 더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광수의 그늘에 묻혀 있기에는 그가 남긴 궤적이 굵고 선명했다.
허영숙은 서울에서 부유한 상인의 딸로 태어나 진명보통학교(1911)와 경기여고의 전신인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1914)를 졸업했다. 1914년 4월에는 일본의 도쿄여자의과전문학교(도쿄여의전)에 입학했는데 의학을 전공하기 위해 해외로 유학한 여성 중에는 김점동에 이어 두 번째였고 일본 유학은 그가 최초였다.
허영숙이 유학을 떠난 1914년 국내에서는 조선총독부 의원양성소(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로 승격)에서도 청강생 제도를 신설해 안수경·김해지·김영홍 3명의 여학생을 입학시켰다. 이들 3명은 1918년 3월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과 동시에 의사 면허를 취득했다.
참고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는 김점동이다. 서양의 선교사들은 그를 남편 박씨 성을 따라 박에스더라 불렀다. 그는 자신이 통역해주던 미국인 여의사 로제타 홀의 의술을 지켜보면서 여의사를 꿈꾸다가 1895년 로제타가 미국으로 귀국할 때 그를 따라 남편 박유산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1900년 볼티모어 여자의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귀국해 선교병원에서 환자를 돌보았으나 폐결핵에 걸려 1910년 33세의 짧은 나이에 삶을 마감했다.
허영숙은 1918년 7월 도쿄여의전을 졸업하고 10월 16일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의사 검정시험에 합격했다. 당시 국내에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3명의 여성이 이미 의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허영숙은 1년간 임상 수련을 거친 뒤 자기 집을 개조해 산부인과와 소아과를 전문으로 하는, 여성이 개원한 조선 최초의 병원을 1920년 5월 1일 개원했다. 병원 이름은 허영숙에서 ‘영’을, 광혜원에서 ‘혜’를 따 ‘영혜의원’이라 지었다.
이광수에게 허영숙은 아내·누이·어머니
허영숙은 1921년 5월 이광수와 결혼했으나 더 수준 높은 의학 공부를 하겠다며 1922년 3월 다시 도쿄로 떠났다. 하지만 도쿄제국대 입학이 여의치 않자 4개월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귀국 후에는 폐결핵으로 기자 일을 할 수 없게 된 이광수를 대신해 1924년 말 동아일보의 부인 기자로 입사했다. 전공을 살려 가정 위생과 건강관리에 관한 글을 써 1925년 12월에는 학예부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다가 첫아들 봉근을 임신하게 되자 1927년 3월 신문사를 그만두었다. 이광수에게는 전 부인이 낳은 아들이 있었지만 허영숙에게는 첫아들이었다. 2년 후 영근, 다시 4년 후 정란, 다시 2년 후 정화가 태어났다.
그러던 중 1934년 2월 장남 봉근이 패혈증으로 숨져 인생의 허무를 느끼게 되었다. 삶의 의욕을 상실한 허영숙은 1935년 11월 병든 남편과 자식 셋을 서울에 남겨두고 선진 의학을 배우기 위해 홀로 도쿄로 건너갔다. 의학에서 손을 놓은 지 15년이나 지나고 새로 공부한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을 37살 때였다.
허영숙이 구상한 병원은 해산을 전문으로 하는 산원이었다. 처음에는 일본의 적십자병원 산원 연구생으로 들어갔다가 3년 예정의 조수로 채용되었다. 그러자 마음을 굳게 먹고 서울의 아이들을 도쿄로 불러들였다. 아이들을 곁에 두고 밤늦게까지 공부하며 박사 논문을 준비했으나 1937년 6월 이광수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자 공부를 중단하고 1년 반 만에 귀국했다. 그리고 1938년 6월 서울 효자동에 국내 최초의 산원인 ‘허영숙 산원’을 개원했다.
어머니로, 기자로, 의사로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면서도 이광수에 대한 그의 사랑은 헌신적이었다. 이광수에게 허영숙은 아내이자 누이였고 어머니였다. 1938년 이광수가 발표한 소설 ‘사랑’은 허영숙의 헌신적 사랑에 대해 이광수가 바치는 헌정 소설이었다. 하지만 소설 속 사랑과 현실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었다. 이광수는 문인이었고 허영숙은 의사였다. 따라서 한쪽이 감성적 인간이라면 한쪽은 이성적 인간이었다. 허영숙은 생활력이 ‘빵점’이고 무욕의 삶을 사는 남편을 향해 “세상 살아갈 줄 모른다”며 바가지를 긁어댔다. 그러면서도 폐병에 걸린 이광수의 주치의이자 간병인이었고, 후견인이자 매니저였다.
해방 후 이광수가 반민특위에 회부될 때는 가정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남편과 합의이혼하는 끈질긴 생활인의 모습을 보였다. 이광수의 납북으로 생이별을 한 뒤에는 세 자녀를 미국으로 유학 보내 각각 물리학 박사, 영문학자, 생화학자로 키워냈다. 자신은 홀로 서울에 남아 출판사를 운영하며 1963년 남편의 원고를 모두 모아 ‘춘원전집’을 완간하고 말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1975년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