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원의 불길처럼 전국 방방곡곡에서 만세운동 일어나
1914년 1차대전 발발 후 일본이 3국 협상(영국·프랑스․러시아)에 가담하자 한국인들은 이들 3국 협상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독일이 승리해야 한국의 독립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고 독일의 승전을 갈망했다. 다행히 독일이 승승장구하자 1916년 초 손병희 교주를 중심으로 천도교에서 독립만세운동이 논의되었다. 1917년에는 1만여 명이 연서해 독일 수뇌부에 독립을 청원하자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되었다. 하지만 1917년 4월 미국의 참전으로 독일의 패전과 연합국의 승전이 확실시되어 모든 계획은 중단되었다.
낙담해 있는 우리 민족에 희소식이 날아든 것은 1918년 1월이었다. 우드로 윌슨 미 대통령이 이른바 ‘14개조 평화 원칙’을 천명한 것이다. 14개조 가운데 전 세계 피식민지 민족들을 흥분시키고 열광케 한 것은 민족자결주의를 강조한 5조였다.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고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이 민족자결주의 주장은 1918년 한 해 내내 전 세계 피식민지 민족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주었다.
우리 민족 역시 국내외를 막론하고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중국 상해에서 활동하는 여운형·장덕수·김철·선우혁 등이 1918년 8월 중국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결성한 것도 종전 후 14개조가 본격적으로 논의될 것에 대비한 자구책이었다. 그러던 중 1918년 11월 마침내 1차대전이 막을 내리고 1919년 1월부터 승전국과 패전국 간에 손익 결산을 따지기 위한 평화회의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릴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파리평화회의는 전 세계 피압박 민족에게 희망과 빛으로 다가왔다. 문제는 평화회의에서 논의될 윌슨의 14개조 원칙이 패전국이 지배했던 식민지를 승전국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자리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더구나 일본은 패전국이 아니라 승전국의 일원이었다.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독일을 비롯한 패전국 식민지 처리에만 적용되고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 조선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국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모를 리 없었다. 그렇다고 조선의 독립을 논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어떻게든 파리평화회의에 참가해 우리의 독립 의지를 승전국에 알려야 했다. 그래서 1919년 2월 1일 신한청년당이 파리로 파견한 특사가 영어에 능통한 김규식이었다.
상해의 신한청년당은 이런 사실을 국내에 알리기 위해 장덕수와 선우혁을 파견했다. 이들은 평안도·황해도에서 활동하는 양전백·이승훈·길선주 등 기독교계 인사들을 만나 이런 사실을 전하며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권유해 적극적인 지지와 약속을 받아냈다. 신한청년당은 일본에는 조소앙·장덕수·이광수를, 만주 간도와 러시아령 연해주에는 여운형을 파견해 만세시위운동을 권유했다.
이와 별개로 미국의 동포들은 1918년 12월 뉴욕에서 열린 약소민족동맹회 총회에 참석, 다른 약소민족 대표들과 함께 약소민족의 독립을 결의했다. 이 사실은 영국인이 일본 고베에서 발간하는 영자지에 소개되었다. 영자지에는 1918년 12월 미국의 대한인국민회가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기로 결의하고 정한경과 이승만을 파리로 파견한다는 사실도 실렸다.
2·8 독립선언, 적지 한가운데서 조국 독립을 세계만방에 외친 것
유학생들은 이런 사실에 크게 고무되어 1919년 1월 6일 조국 독립을 위한 실천 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한 뒤 최팔용·서춘·김상덕·김도연 등 10명을 실행위원으로 선출했다. 그런 상황에서 신한청년당이 파견한 장덕수와 조소앙이 도쿄에 도착, 유학생들의 궐기를 고취했다. 뒤이어 도쿄에 도착한 이광수는 유학생들이 곧 발표하게 될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했다.
실행위원들은 상해에서 파견한 이광수·김철수와 함께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한 뒤 송계백을 국내 밀사로 파견했다.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선언 계획을 알려 국내 독립운동을 촉구하고 자금을 지원받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국문 활자를 구하는 게 목적이었다.
송계백은 1919년 1월 중순 국내에 잠입, 현상윤을 만나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알렸다. 현상윤이 다시 송진우·최남선·최린에게 선언서를 보여주고 최린이 손병희·권동진·오세창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이들도 독립선언 추진에 적극 찬동했다. 이광수는 2월 5일 중국 상해로 건너가 윌슨 미국 대통령,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에게 자신이 번역한 영문 독립선언서를 발송하고 중국 내 영자신문에도 실리도록 했다.
재일 유학생들은 1919년 2월 8일 오전, 독립선언서, 결의문,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 등을 일본의 귀족원과 중의원, 조선총독부, 일본의 각 언론사 등에 우송하고 오후 2시 도쿄에 있는 조선YMCA회관에 약 400명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유학생들은 선언서를 낭독하고 4개항의 결의문을 발표한 뒤 독립만세를 외쳤다. 피식민지 국가의 유학생들이 적지 한 가운데서 조국 독립을 세계만방에 외친 것이다.
참가자들은 강당이 떠나가도록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후 시가행진을 시도했으나 일경에 의해 강제해산되고 실행위원 등 27명은 체포되었다. 검거를 피한 학생 중 100여 명은 2월 12일 히비야 공원에서 다시 유학생 대회를 열었다가 13명이 검거되었다. 나머지 학생들은 독립선언서 사본을 지닌 채 고국으로 돌아와 3·1 만세운동에 동참했다.
독립선언 논의는 특히 국내에서 활발했다. 다만 대부분의 사회단체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주요 활동가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해외로 망명하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가 극도로 억압된 상태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단체는 종교계와 학생 단체 뿐이었다. 종교계에서 가장 조직적으로 움직인 곳은 천도교였다.
천도교 교주 손병희는 1919년 1월 20일 권동진·오세창·최린을 만나 독립운동의 대중화·일원화·비폭력화 등 3가지 원칙을 결정했다. 이처럼 독립선언 논의가 진행되고 있을 때 1월 21일 새벽 고종이 갑자기 승하했다. 일제의 독살설이 유포되면서 고종에 대한 추모, 나라 잃은 슬픔, 일본을 향한 적개심으로 전국의 민심이 동요했고 통곡하는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천도교 측은 2월 초순부터 최남선·송진우·현상윤 등과 수차례 만나 계획을 구체화했다. 평안도·황해도 등 관서 지방의 기독교 측에서는 이승훈·함태영이 서울로 상경해 천도교 측과 연합전선 문제를 논의했다. 그리고 2월 24일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합 전선이 최종 확정되었다. 최린은 기독교 측과 연대를 성사시킨 그날 밤 불교계의 한용운 집을 방문해 동참을 권유했다. 한용운은 전국의 여러 사찰에 긴급히 연락해 동지를 모았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고 백용성의 동참 의사만 확인했다.
민족 대표 33명은 기독교계 16명, 천도교계 15명, 불교계 2명
다만 유림과의 연합 전선은 실패했다. 유림이 다른 종단과의 연합에 반응하지 않고 천도교와 기독교계도 유림을 연합 전선에 참여시키는 데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유림의 김창숙에게도 독립선언을 알려주고 반응을 기다렸으나 김창숙이 모친의 병환 때문에 2월 그믐에야 서울에 상경,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도 유림은 3월 1일 고종의 인산에 참여했다가 귀향해 3·1 운동을 전국으로 확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유림들은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3월 하순 곽종석·김복한·김창숙 등을 포함해 전국의 유림 137명의 연명으로 독립을 청원하는 일명 ‘파리장서’ 작성을 주도했다. 김창숙은 파리장서를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하는 대표로 선출되어 1919년 3월 27일 상해에 도착했으나 이미 김규식이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것을 알고 영문으로 번역·인쇄해 그중 일부는 파리의 김규식에게 우편으로 송부하고 나머지는 중국 내 각국 외교관, 중국의 정계 요인, 국내 각 학교에 배포했다.
천도교는 손병희·최린·권동진·오세창 4명 사이에서만 비밀리에 논의를 진행하다가 2월 말, 천도교 간부 11명을 합류시켜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릴 15명을 확정했다. 기독교계 역시 비밀리에 만나 주로 평안도에서 활동하는 목회자 중심으로 16명의 서명자를 확정했다. 민족 대표는 이렇게 기독교계 16명, 천도교계 15명, 불교계 2명 등 모두 33명으로 구성되었다. 다만 천도교 측의 박인호와 기독교 측의 함태영 등은 사후 수습과 교단 운영을 위해 명단에서 제외했다. 모의 단계에서부터 주동적인 역할을 해온 송진우·현상윤·최남선 등도 선언서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았으나 이들 역시 33명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
종교계가 이처럼 활발하게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을 때 연희전문, 보성전문, 경성의학전문 등 청년 학생들도 1919년 1월 하순부터 독립시위운동을 계획했다. 학생들은 곧 연합전선 참가를 결정하고 종교계 인사들과 구체적인 사항을 논의했다. 최남선은 독립선언서와 함께 일본 정부와 의회, 조선총독부에게 보내는 ‘독립통고서’, 파리평화회의 및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독립청원서’도 기초했다. 한용운은 뒤늦게 선언서 초안이 확정된 것을 알고 공약 3장을 선언서 끝에 추가하는 것으로 동참했다.
민족 대표들은 처음에는 파고다공원을 만세운동 장소로, 고종의 국장일인 3월 3일을 거사일로 정했다가 국장일에 만세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불경이라고 생각해 3월 2일을 검토했다. 하지만 이날이 일요일이라는 기독교 측의 반대로 다시 3월 1일로 변경했다.
독립선언서 인쇄는 오세창이 총책임을 맡고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사 사장 이종일이 실무를 담당했다. 이종일은 2월 27일 밤늦게까지 독립선언서 2만 1,000장을 인쇄해 자기 집에 보관했다. 선언서 배포는 천도교·기독교·불교·학생단이 분담했는데 서울 시내는 주로 학생단이, 지방 각처는 천도교와 기독교 측이 분담·배포했다.
파리평화회의와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독립청원서는 3월 1일 기독교 측 인사가 압록강 건너 안동에서 상해의 현순에게 우편으로 부치고, 일본 정부·의회에 보내는 독립통고서는 천도교 측 인사가 도쿄로 건너가 3월 1일 그곳에서 우송했다.
2·8 독립선언서, 3·1 독립선언서, 대한독립선언서 비슷한 시기 발표돼
33명의 민족 대표 중 23명이 상견례 겸 마지막 회의를 위해 서울 손병희 집에 모인 것은 2월 28일 오후였다. 이들은 당초 거사 예정지로 정한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하게 되면 일본 경찰과 조선의 군중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희생자가 생길 것을 우려해 중국 음식점 명월관의 지점인 태화관으로 장소를 바꿨다.
민족 대표들이 태화관에 모인 것은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였다. 지방에 있던 길선주(평양)·유여대(의주)·정춘수(원산) 3명은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고 김병조는 상해로 탈출해 참석자는 모두 29명이었다. 한용운의 사회로 3시쯤 시작된 선언식은 독립선언서의 낭독 없이 한용운의 간단한 연설과 선창으로 독립만세를 삼창하는 것으로 끝났다. 만세 소리를 듣고 놀라서 달려온 태화관 주인에게는 일제 경찰에 신고하도록 함으로써 피해가 가지 않도록 했다. 곧 연락을 받은 일제 경찰이 들이닥쳐 민족 대표 전원을 연행해갔다. 그날 지방에서 뒤늦게 상경한 3명도 경찰에 자진 출두했다.
그런데 그 무렵 발표된 독립선언서에는 2·8 독립선언서와 3·1 독립선언서 말고 또 하나가 있다. 대한독립선언서가 그것인데 현행 고교 국사 교과서나 각종 백과사전 등은 ‘만주·러시아·미국 등 해외에 나가 있는 김규식·김약연·김좌진·이동녕·이동휘·이승만·이시영·박용만·박은식·신채호·안창호 등 지도자급 인사 39명이 1918년 음력 11월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글로, 1918년 무오년에 선포되었다고 해 무오독립선언서라고도 하며 작성자는 조소앙으로 알려져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 2·8 독립선언서와 3·1 독립선언서보다 빨리 발표된 최초의 독립선언서이자 항일 독립선언의 효시라며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문제는 선언서에 명시된 발표 시기가 구체적인 일자 없이 ‘단기 4252년 2월’로만 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대한독립선언서를 ‘무오독립선언서’라고 칭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라는 지적이 있다. ‘단기 4252년 2월’을 음력으로 환산하면 무오년인 1918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음력으로 무오년의 마지막 날인 1918년 12월 30일이 양력으로는 1919년 1월 31일이므로 양력 1919년 2월은 음력으로 결코 1918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역사소설가 송우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중국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서 발표에 결정적 역할을 한 대한독립의군부의 구성원들은 대종교인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양력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며 “단기 4252년 2월은 양력이 아니라 음력”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된 시점인 4252년 2월을 가장 빠르게 잡아 2월 1일로 치더라도 양력으로는 1919년 3월 2일이기 때문에 2·8 독립선언서와 3·1 독립선언서보다 시기상 늦게 된다.
송우혜는 당시 발간된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을 근거로 제시해 이런 주장을 폈다. 독립신문 1919년 10월 7일자에 ‘대한독립선언은 1919년 3월 중순에 이뤄졌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길림에서’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독립신문 특파원이 대한독립선언의 현장인 길림을 찾아가 참가자들로부터 독립선언이 1919년 3월 중순에 이뤄졌다는 증언을 듣고 기사화한 것이다. 송우혜는 독립신문 다른 날짜 기사에도 2·8 독립선언서가 최초의 독립운동 관계 선언이라고 기술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전 세계 피압박 민족의 대표적인 독립 투쟁
한편 민족 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준비하고 있을 때 파고다공원에 운집한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들은 민족 대표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민족 대표들이 태화관에서 별도의 독립선언식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학생 대표들이 태화관으로 달려가 갑작스러운 장소 변경에 항의하는 한편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학생들은 2시 30분쯤 독자적으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한 학생이 단상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두 손을 들어 큰소리로 만세를 부른 것을 신호탄으로 수 천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뒤이어 동대문·남대문·서대문을 향해 시가행진에 돌입했다. 고종의 인산을 참관하러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까지 시위에 참여해 인파는 삽시간에 수만 명으로 늘어났다. 만세 시위는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서울에서 독립만세 시위가 있던 3월 1일 평양·의주·선천·원산 등 이북 지역의 6개 주요 도시에서도 독립만세 함성이 하늘을 덮었다. 3월 2일에는 함흥·해주·개성 등으로까지 시위가 확산되어 북한 전역이 시위대의 물결로 휩싸였다. 3월 3일부터는 만세 소리가 충청·전라·경상·강원도 등 남한 전역으로 퍼지고 3월 중순경에는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 방방곡곡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3월 하순부터는 노동자·농민·학생·여성 등 계층을 초월한 전 민족적인 항일운동으로 발전했다. 상인은 철시하고 노동자는 파업하고 농민은 봉기했다. 이 과정에서 관공서를 파괴하는 폭력적인 양상도 일부 지역에서 나타났다. 5월 말까지 계속된 만세시위운동은 만주, 러시아령, 미주 지역에서도 거세게 전개되었다.
박은식의 ‘조선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5월 말까지 3개월 동안 전국에서 집회 횟수 1,542회, 참가 인원 202만 명,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만 5,961명, 피체포자 4만 6,948명에 이르렀고 교회 47개소, 학교 2곳, 민가 715채가 불에 탔다.
3·1 운동이 미친 여파는 엄청났다.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만주와 러시아령 등에서 독립군의 무장투쟁이 본격화했으며 10년간 지속된 조선총독부의 무단통치를 문화정치로 변화시켰다. 3·1 운동 전까지만 해도 소수의 선각자나 혁명가가 담당했던 독립운동이었지만 학생·여성·농민·노동자들이 본격적으로 합류하면서 독립운동의 기반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다는 점에서도 3·1 운동이 갖는 의미는 컸다.
3·1 운동은 중국은 물론 아시아·중동 등 다른 피압박 민족에도 선구자 역할을 했다. 중국의 1919년 5·4 운동과 1919년 4월 시작된 인도 국민회의파의 비폭력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1919년 6월 미국의 식민지 필리핀 마닐라대와 영국의 식민지 이집트의 카이로대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에도 나침반 역할을 하며 전 세계 피압박 민족의 대표적인 독립 투쟁으로 평가받았다.
이처럼 3·1 운동은 조선 역사상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는 대규모 독립시위운동이자 조선 역사를 민주주의의 길로 전환시킨 대혁명이었다. 또한 1차대전 후 세계 피압박민족의 독립운동 가운데 첫 봉화였고 정의, 인도, 인류 평화의 새로운 세계상을 그리며 용감하게 나아간 세계사적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