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경의 문법 이론을 체계화한 문법책
오늘날 남북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원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어휘면에서는 이질적인 점이 많아도 문법적인 면에서는 크게 보아 동질적이다. 이는 해방 후 남북 양쪽에서 한글 정책을 주도한 김두봉(1889~1961)과 최현배(1894~1970) 두 한글학자 덕분이다.
김두봉은 경남 동래에서 태어나 1908년 보성고보를 졸업한 뒤 모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최남선이 1910년 설립한 ‘조선광문회’ 활동에 참여했다. 당시 광문회는 조선어사전을 편찬하면서 조선어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한자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한자대역사전도 편찬했다.
김두봉은 스승 주시경과 함께 한자대역사전인 ‘신자전’의 편집과 국어 훈석에도 관여했지만 특히 그가 주력한 것은 주시경이 1911년 시작한 최초의 조선어사전 ‘말모이’ 편찬 사업이었다. 말을 모은다는 뜻의 ‘말모이’ 사전은 4년 동안의 작업 끝에 원고 집필이 거의 마무리되었으나 1914년 7월 27일 주시경이 3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말모이’는 비록 출간되지 못한 원고본이지만 우리말을 우리말로 풀이한 사전으로는 최초로 편찬된 것이어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현재 남아 있는 원고는 240자 원고지 231장인데 ‘알기’(범례), 본문, ‘찾기’(색인), 한자어 자획 색인인 ‘자획 찾기’로 구성되어 있다. 표제어를 가나다순으로 배열하고, 비슷한 말의 경우 가장 흔히 쓰이는 말에 뜻풀이를 했고, 다의어는 그 뜻을 구분해 풀이하는 등 국어사전의 원형적 모습을 보인다.
김두봉은 스승의 유지를 계승하기 위해 ‘말모이’ 사전 대신 주시경의 문법 이론을 체계화한 문법책을 만들었다. 1916년 4월 신문관에서 출판된 ‘조선말본’이었다. 조선말본이 특이했던 것은 속표지에 ‘경성 신문관’이라는 출판사 이름 대신 ‘서울 새글집’으로 표기한 것이다. ‘서울’이라는 말을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때 ‘서울’과 ‘새글집’이라는 순수 우리말을 사용한 것은 누가 보아도 혁신적인 발상이었다.
김두봉은 1919년 3·1 운동 시위에 참가했다가 일제의 탄압과 추적을 피해 그해 4월 중국으로 망명했다. 상해에서 그는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관련을 맺는 한편 신채호가 주필로 있는 순한문신문 ‘신대한신보’ 편집을 맡았다. 특히 한글 연구에 정진해 1922년 4월 상해에서 ‘깁더 조선말본’을 펴냈다. ‘깁더’는 깁고 더한다는 뜻이므로 요즘 말로 수정 증보나 개정판에 해당한다. ‘깁더 조선말본’은 ‘조선말본’에 비해 규격이 작고 활자 상태도 고르지 않았으나 출판 사정이 좋지 않은 이국 땅에서 출판되었다는 데 그 의의가 적지 않다.
김두봉은 1924년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고 교포들이 상해에 세운 ‘인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는 등 교육 문화 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1929년 한국독립당 비서장으로 정치에 뛰어들면서 교육 문화 활동은 더 이상 지속하지 못했다. 1935년 7월에는 중국 남경에서 김원봉과 함께 민족주의적이거나 사회주의적 색채를 띤 9개 단체의 통일전선 정당인 ‘조선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해 서기부장(총서기)을 맡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41년 초에는 중국 국민당의 점령지인 한구에서 결성(1938.10)한 조선인들의 군사 조직인 조선의용대 주력이 북쪽의 화북 지역으로 이동할 때 함께 이동하고, 1942년 7월 항일 투쟁의 최전선이던 화북의 태항산에서 결성된 ‘화북조선독립동맹’의 주석으로 선출됨으로써 중국 공산당에 기울었다. 당시 화북조선독립동맹의 군사조직인 조선의용군의 총사령은 김무정이었다. 조선의용군은 중국 공산당 팔로군과 함께 대일전에 적극 참가했다.
북한 언어 정책 자리잡는 데 초석 놓아
해방 후인 1945년 12월에는 이른바 ‘연안파’로 불리는 정치 세력의 최고 지도자가 되어 평양으로 귀국해 북한 정권의 2인자가 되었다. 당시 북한에는 김두봉·김무정의 연안파, 김일성의 빨치산(갑산)파, 허가이의 소련파, 남로당파, 국내파 등이 혼재해 있었으나 그중 최대 세력은 연안파와 빨치산파였다.
김두봉은 북한에서 승승장구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부위원장(1946.2), 조선독립동맹을 개편한 조선신민당 위원장(1946.3), 조선신민당과 북조선공산당을 합친 북조선노동당 위원장(1946.6)을 거쳐 김일성종합대의 초대 총장(1946.10)이 되었으며 1947년 2월 북조선인민회의 위원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북한에서 김두봉은 정치 활동을 계속하면서도 북한 언어 정책이 자리를 잡는 데 초석을 놓았다. 1948년 1월 제정된 ‘조선어 신철자법’도 김두봉이 주장한 한자 폐지와 글자 개혁을 전제로 한 것이다. 신철자법의 내용을 보면 조선어학회의 맞춤법과 차이보다는 공통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는 김두봉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였다. 한편 김두봉이 북한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남한에서는 최현배가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의 노력 덕분에 남북에서 언어 혁명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6·25 후 김두봉의 정치적 위상은 서서히 추락했다. 사실 김두봉의 승승장구는 김일성이 정치 전면에 ‘등장하기 전까지’라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1957년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에서 쫓겨나고 1958년 3월 종파주의자로 몰려 숙청당했다. 다행히 고령이라는 이유로 사형은 모면했으나 산골 오지의 지방협동농장에서 농사일을 하다가 1961년 전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숙청 후 북한 언어학계가 김두봉을 비판하기 시작했으나 북한의 언어 생활이 이미 정착된 상태였기 때문에 김두봉의 언어 이론을 모두 부정하지는 못했다. 1966년 발간한 ‘조선말 규범집’에서도 김두봉 이론의 중요한 원칙 즉 가로쓰기, 한글 쓰기, 한자어의 경우 두음법칙을 인정하지 않는 것 등은 그대로 계승되었다. 김두봉과 최현배가 각각 북한과 남한을 선택한 것이 결과적으로는 남북 모두에 한글의 세계가 열리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