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지그문트 프로이트 ‘꿈의 해석’ 발간

무의식, 인류에게 새로운 지평 열어주어

20세기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무의식’의 존재를 학문적으로 규명하고 담론화한 것은 20세기의 가장 큰 지적 혁명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무의식의 규명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다윈의 진화론과 비교될 정도로 인류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지동설이 인류를 우주의 중심에서 끌어내렸다면, 진화론은 인류가 굳게 믿어온 불가침의 신성을 부정한 것이고 무의식은 인간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음을 만천하에 고백한 것이다.

무의식 하면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인물이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다. 그가 무의식을 토대로 쌓아올린 정신분석학을 빼놓고는 20세기를 논할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20세기를 ‘프로이트의 세기’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모라비아(현 체코공화국 영토)의 작은 도시 프라이베르크에서 유대인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가 1873년 빈대 의과대에 입학하고 1881년 생리학으로 학위를 받을 무렵 유럽 지성계의 화두는 병리학이었다. 의학과 철학은 물론이고 신생 학문인 심리학 연구자들까지도 병리학에 관심을 집중했다.

프로이트는 종합병원에서 몇 년간 근무하다가 1885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최면술을 활용한 히스테리 환자 치료로 유명한 프랑스 신경병리학자 장 마르탱 샤르코에게 5개월간 강의를 들었다. 샤르코는 신경증과 기질적 질병을 구분하고, 최면술의 암시요법을 능수능란하게 이용해 히스테리성 환자를 치료했다. 샤르코의 강의는 프로이트가 평생 정신분석에 매달리고 매진케 한 길잡이 역할을 했다.

프로이트는 1886년 빈으로 돌아와 신경질환 전문병원을 개원하고 최면술을 이용해 히스테리 환자를 치료했다. 당시 프로이트가 주목한 것은 환자가 최면 상태에서 받은 의사의 지시를 최면에서 깨어난 뒤에도 무의식적으로 따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샤르코에게서 배운 지식을 동료 의사들에게 전하려고 했다. 그러나 빈대의 외과의사 요제프 브로이어를 제외한 대부분은 무관심하거나 적대감을 보였다. 프로이트와 브로이어는 10년 가까이 히스테리의 원인과 치료법을 연구한 끝에 1895년 ‘히스테리 연구’를 공저로 출간했다. 이 책은 오늘날 정신분석학의 본격적인 출발점으로 평가받을 만큼 중요한 저작물로 꼽힌다.

프로이트는 다양한 임상실험을 통해 최면요법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고 효과도 지속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에는 최면술을 포기하고 ‘자유연상 기법’을 개발해 임상에 적용했다. 이 기법은 환자를 편안하게 한 뒤 마음 속에 떠오르는 욕망을 간접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으로, 이때의 ‘자유연상’은 프로이트가 평생의 연구 테마로 삼은 ‘무의식’을 파악하는 주요 단서가 되었다.

 

1896년 자신의 방법을 ‘정신분석’으로 명명

프로이트는 인간 행동의 저변에는 무의식이 깊게 잠재되어 있고 이 무의식이 개인의 의식적인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고 이해했다. 가장 덜 논리적인 사고와 행동 요소들이 무의식을 살펴볼 수 있는 주요 단서라고 간주해 자유연상, 꿈, 실수 등을 파고들었다. 프로이트는 환자들에게 자유연상을 유도하면 주로 꿈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에 주목해 꿈속에 잠재한 의미를 끌어내고, 본질적인 것을 추출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것은 실증할 수 없는 것, 보이지 않는 것, 무의미한 것, 비합리적인 것을 실증할 수 있고 보이고 의미 있고 합리적인 세계 속으로 편입하는 작업이었다.

프로이트는 1896년 자신의 방법을 ‘정신분석’으로 명명한 후 1899년 11월 무의식과 꿈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꿈의 해석’을 출간했다. 그러나 이 생소한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인류사에 중대한 변혁을 몰고 올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다만 출판사가 발행 연도를 세기가 저물어 가는 1899년이 아니라 신세기의 개막에 맞춰 1900년으로 잡은 덕에 20세기를 열어젖힌 대표 저작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유명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처음 도입한 개념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아들이 아버지를 시기하고 어머니에게 갖는 성적인 사랑의 감정을 말한다. 프로이트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꿈을 인용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있는 무의식적 소망과 오이디푸스 신화를 연결했다. 그는 인간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같은 성적인 정념의 지배를 받지만, 의식은 이런 정념을 아주 희미하게만 알 뿐이라고 파악했다. 그는 그런 성적 활동의 기본 동력을 ‘리비도’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야말로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여겼다. 아들이 아버지를 넘어서지 않으면 아들은 아버지의 세계에 머물고 말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형태를 알아보는 또 다른 방법으로 사소한 실수나 농담이나 실언 등에 주목했다.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무의식적 소망의 한 표현이고 무의식적 태도를 상징하고 있다고 생각한 실수나 실언의 예들을 해석해 놓은 것이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1901)이다. 그는 이런 일련의 저작을 통해 의식은 빙산의 일부분이고 물속에 잠겨 있는 거대한 부분은 충분히 지각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부분이라고 보았다. 결국 대부분의 생각, 희망, 기억, 느낌을 포함하는 무의식은 감춰져 있다는 것이다.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1905)에서는 성적 충동은 태어날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항상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며 모든 인간의 행동, 관계, 반응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에세이’는 아이들까지도 성적 충동을 가진 존재라는 개념을 담고 있어 일반인에게서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프로이트 영향 받지 않은 분야 거의 없어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기본 개념을 ‘원초아(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로 구분·설명했다. ‘원초아(id)’는 무의식적이고 생물학적인 욕망으로, 충동을 충족시키는 것이 존재 목적이기 때문에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하려 한다. 성적 본능과 공격적 본능이 이에 속한다. ‘자아(ego)’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격’과 같은 것으로, 환경에 합리적으로 기능하게 하는 정신의 한 부분이다. 양심의 일반적 개념과 흡사한 ‘초자아(superego)’는 충족 수단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을 때 충동의 충족을 억누르는 기능을 한다. 쾌락을 좇는 원초아와 평화를 바라는 자아 모두를 제어하는 게 ‘초자아’이다.

프로이트가 이렇게 다양한 저술을 통해 전통의 가치와 인습을 과감히 무너뜨리자 그의 주변으로 알프레트 아들러, 카를 융 등 당대 최고의 정신분석학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1908년 4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제1회 국제정신분석학회를 열어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하지만 일반인에게 억압된 욕망, 아동의 성욕, 거세된 공포 등은 여전히 낯설고 혐오스러웠다. 아들러와 융도 결국에는 프로이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해 결별을 선언했다.

유럽 학계에서도 크게 환영을 받지 못하던 프로이트의 이론과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차대전 후였다. 참호전이 장기화하면서 흔히 ‘포탄 쇼크’로 불리는 스트레스성 정신장애로 죽거나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하자 1920년 오스트리아 정부가 그에게 자문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유대인이던 그의 저서들도 화형에 처해졌다.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된 후에는 영국 런던으로 망명해 1939년 9월 23일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

프로이트가 전 생애에 걸쳐 정신분석학을 개척하고 탐구하고 수정하는 동안 프로이트의 이론은 초창기의 종교처럼 빠르게 확산되고 전파되었다. 지식인이나 예술가들도 알게 모르게 프로이트주의자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오늘날까지도 한쪽에서는 열렬한 찬사를, 다른 한쪽에서는 강한 비판을 받고 있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20세기의 퇴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프로이트의 이론이 당초 목표로 내세웠던 과학성과 거리가 멀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아무런 근거가 없는데도 정신의학계는 물론 학계와 문화계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에 분개한다. 실증주의자들은 “유사종교만큼이나 무가치한 사이비 과학”이라며 혹평하기까지 한다. 반면 추종자들은 “프로이트의 이론이야말로 인간의 내적 욕망과 숨겨진 동기들을 파헤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한 틀”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중요한 것은 그를 추종하든 반대하든, 그의 주장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20세기 전 분야에서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지 않은 분야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코페르니쿠스 이후 우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었고, 마르크스 이후 우리는 역사의 중심이 아니었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그 인간의 중심이 아님을 보여주었다”는 명언으로 극찬했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20세기에 영향을 끼친 인물 50명 가운데 프로이트를 맨 앞자리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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