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김은호, 왕의 초상화인 ‘어용’이나 ‘어진’을 그리는 조선의 마지막 ‘어용화사(御用畵師)’로 발탁

↑ 어진을 그리는 김은호

 

전통의 맥을 시대적으로 되살린 근대적 채색화의 개척자

김은호(1892~1979)는 세밀 묘사와 채색 기법으로 산수, 화조, 인물화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주목과 찬사를 받았다. 특히 인물화에 발군의 기량을 보여 우리나라 근대 인물화가의 효시로 꼽힌다. 미술평론가들은 김은호를 가리켜 ‘전통의 맥을 시대적으로 되살린 근대적 채색화의 개척자’(이구열), ‘극채세화(極彩細畵)의 화풍을 고수하면서 진실한 마음으로 제자를 기른 인정미 넘치는 예술가’(이규일)라고 평가했다.

김은호는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의 관립일어학교(1906~1907)를 다니다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흥학교 측량과로 옮겼다. 당시로서는 사실상 신기술인 측량은 재미도 있고 적성에도 맞았다. 특히 각을 재고 선을 긋는 제도에 큰 흥미를 느꼈다. 1908년 12월 졸업 후에는 부친이 죽고 가세가 기울어 서울로 올라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이발소, 도장포, 인쇄소 등을 전전하다가 같은 교회에 다니는 영풍서관이라는 고서점의 주인을 알게 되어 영풍서관에서 고서를 세필로 베끼는 일을 맡았다. 측량과에 다니며 제도를 해 본 경험이 있어 세필로 베끼는 것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서점을 찾은 중추원 참의 김교성이 김은호의 출중한 능력을 발견하고 근대 최초의 미술학교 ‘서화미술회’에 추천한 덕에 김은호는 20세 때이던 1912년 8월 서화미술회에 들어갔다. 서화미술회는 조선 왕조의 붕괴로 화원 제도가 폐지되고 이 때문에 서화 전통을 계승하는 길이 막히자 미술교육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한 문인화가 윤영기가 1911년 3월 설립한 경성서화미술원이 뿌리다. 하지만 경성서화미술원은 발족 단계에서 재정적으로 후원한 이완용이 서화미술회라는 실질적 운영체를 만들면서 주체가 이완용에게 넘어갔고 이완용이 서화미술회 초대 회장이 되었다. 당시 그곳에는 조석진·안중식 등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포진했는데 이들은 김은호에게 천부적인 재능이 있음을 간파하고 김은호가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당대 최고의 실세이자 친일파로 유명한 송병준의 인쇄용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순종·고종의 어진과 태조·세조·원종의 어진도 여벌 그려 그가 그린 어진만 다섯 왕

뒤이어 고종(당시는 이태왕)의 사진도 모사하도록 했는데 고종이 모사 그림에 만족해 하며 순종(당시는 이왕)의 반신상을 그리도록 함으로써 김은호는 왕의 초상화인 ‘어용’이나 ‘어진’을 그리는 조선의 마지막 ‘어용화사(御用畵師)’로 발탁되었다. 김은호는 스승에게서 어진을 그리는 법도와 기술을 배워 창덕궁을 수시로 드나들며 순종의 어진을 그려 4개월 만인 1913년 봄 완성했다. 왕실은 답례로 쌀 1,000가마를 살 수 있는 거금을 하사했다.

이후 김은호가 순종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소문이 퍼져 친일 귀족이나 신흥 자본가들이 너도나도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김은호는 이들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화단의 총아로 부상하고 부와 명성을 얻었다. 다만 이때 그린 순종의 어진은 창덕궁 대조전에 걸려 있다가 1917년 화재로 불타 없어졌다. 김은호는 1917년에도 고종의 어진을 4개월 만에 그렸는데 이 어진 역시 안타깝게도 역대 어진 봉안소에 봉안되었다가 6·25 때 소실되었다. 김은호는 순종과 고종에 이어 태조, 세조, 원종의 어진들도 여벌을 그려 그가 그린 어진만 다섯 왕이나 되었다.

왕실은 창덕궁 대조전을 복원하면서 내벽의 장식화를 김은호·이상범·노수현·오일영 등에게 맡겼다. 이들이 그린 벽화 중에서 가장 유명한 두 그림이 김은호가 그린 서벽의 ‘백학도’와 오일영·이용우가 합작해 그린 동벽의 ‘봉황도’다. 김은호는 ‘백학도’를 1920년 9월에 완성했다. 김은호는 서화미술회 화과 과정은 1915년(제2회), 서과 과정은 1917년(제3회) 졸업했다.

 

동양화의 전통적 기법에 근대 서양 회화의 기법을 절충한 화법 추구

1918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창설한 ‘조선서화협회’에 이상범·노수현 등과 함께 가입하고 1921년 시작된 ‘서화협회전’(협전)에도 열심히 출품했다. 1919년 3·1 만세운동 때는 등사판으로 만든 독립신문을 돌리다가 1년형을 선고받고 5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김은호가 젊은 나이에 왕실은 물론 세인들로부터 실력을 인정받게 된 결정적 요인은 타고난 재능이었다. 여기에 김은호 특유의 새로운 기법이 더해지면서 김은호만의 독자적인 화풍이 정립되었다. 새로운 기법이란 동양화의 전통적 기법에 근대 서양 회화의 기법을 절충한 이른바 ‘김은호식 절충주의’였다. 김은호의 인물화는 이전의 화가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짜임새가 있었다. 시점, 비례, 원근, 구도 등이 일정한 논리적 연관성 위에 흐트러짐 없이 제자리를 틀었다. 그의 정밀한 세필채화의 기교는 지금도 인정받을 만큼 정밀하고 세밀한 것으로 정평이 났다.

김은호는 1922년 6월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 동양화부에 ‘미인 승무’로 4등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제3회(1924) 선전에서 ‘부활 후’로 3등상을, 제7회(1928) 선전에서 ‘북경 소견’으로 특선을 수상했다. 제8회(1929) 선전에 낙선한 후에는 더 이상 선전에 출품하지 않았다. 1925년 대부호인 이용문의 후원으로 변관식과 함께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3년간 도쿄미술학교 일본화과의 청강생으로 있으면서 일본식의 채색화풍을 연마했다. 1926년 도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제국미술원전람회’(제전)에 조선의 동양화가로는 최초로 입선하는 영예도 누렸다.

 

해방 후에는 문화 권력의 정점이자 화단의 총수로 군림

김은호는 평생 술을 입에 대지 않고 담배 한 모금 피워본 적이 없을 정도로 자기 관리에 철저했다. 매주 교회에 나가고 여자도 멀리 했다. 후배 양성에도 관심이 많고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어 제자가 많았다. 1930년대 들어 김은호의 집에는 적게는 4~5명 많게는 10여 명이 묵으며 그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제자들 중 백윤문·장우성·김기창·조중현 등은 1936년 6월 김은호의 뜻을 계승한다는 취지로 ‘후소회’를 발족했다. 이후 후소회는 이상범의 ‘청전화숙’, 광주 허백련의 ‘연진회’와 더불어 당시 동양화 분야의 후진 양성 통로 역할을 하며 선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제21회(1942) 선전에서는 동양화부 입선작 60점 가운데 특선작 2점을 포함한 21점이 후소회 회원의 작품이었을 정도로 후소회는 화단에 만만치 않은 세력을 형성했다. 김은호는 허백련·박광진·김복진과도 수묵채색화와 유채화, 조소를 가르치는 전문 미술교육기관인 ‘조선미술원’을 1936년 10월 개설해 다수 제자들을 양성했다.

오늘날 김은호는 대표적인 친일 화가로 분류되고 있다. 그 첫 번째 그림이 1937년 11월 완성해 미나미 조선 총독에게 증정한 ‘금차봉납도’이다. 이 그림은 국방헌금 조달과 황군 원호에 앞장선 ‘애국금차회’의 1937년 8월 결성 순간을 그린 것이다. 김은호는 ‘금차봉납도’를 그린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친일 활동에 나섰다. 1941년에는 일제의 관변 단체로 결성된 ‘경성미술가협회’에 창립 회원으로 참여하고 1942년부터 1944년까지는 친일미술전람회의 총화격인 ‘반도총후미술전’의 심사위원을 맡는 등 다양한 친일 활동을 벌였다.

이 때문에 해방 후 미술인들의 총합적 단체로 결성된 ‘조선미술건설본부’가 김기창·이상범·김인승 등과 함께 김은호를 배제했으나 그 자신의 탄탄한 실력에다 제자들까지 화단을 주도하는 정치력을 갖게 되면서 김은호는 미술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화 권력의 정점이자 화단의 총수로 군림했다.

김은호는 해방 후에도 많은 주요 인물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순신과 세종대왕을 비롯해 남원의 ‘춘향상’, 진주의 ‘논개상’, 강릉 오죽헌의 ‘신사임당상’, 안중근의사기념관의 영정, 정몽주, 서재필, 이승만 등 역사적인 주요 인물 상당수가 그의 손을 거쳤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 존 무초 주한 미국 대사 등 외국 명사의 초상도 그려 주목을 받았다. 1979년 2월 7일 87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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