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청년들의 독립선언은 정당하다” 변론
후세 다쓰지(1880~1953) 변호사가 서울 경성역에 처음 내린 것은 1923년 8월 1일 새벽이었다. 진작부터 오고 싶었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차일피일 미루다 마침내 서울 땅을 밟은 것이다. 후세는 자신이 조선에서 해야 할 3가지 임무를 곰곰이 되뇌었다. 의열단원 김시현을 변호하고 형평사 운동에 힘을 실어주며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의 사상단체 ‘북성회’가 주최하는 순회강연에서 연설하는 것이었다.
오랜 여정에 몸이 파김치였으나 도착 당일 밤 서울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열린 북성회 강연회에 참석해 ‘인간 생활의 개조 운동과 조선 민족의 사명’이라는 제목의 연설로 일제를 비판했다. 연설 도중 단상에 앉아 있는 일본 고등계 형사가 수차례 경고를 보냈지만 개의치 않고 연설을 계속 이어갔다.
후세는 지방 순회 연설을 하면서도 8월 7일 시작된 의열단원 김시현 재판의 변호를 맡았다. 김시현은 김지섭 등 의열단원 등과 함께 총독부, 경찰서, 동양척식회사 등 주요 건물을 1923년 3월 15일 일제히 폭파하기 위해 준비하다가 의열단 안으로 파고든 밀정의 밀고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있었다. “흉계로 포박함은 정치 도덕에 위반하는 것”이라는 후세의 변론에도 김시현은 1923년 8월 21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아 투옥되었다. 그후 5년 5개월 만인 1929년 1월 석방되었다. 후세는 전국적으로 맹렬히 전개되고 있는 형평사 운동 관련자들도 만나 지지·격려한 뒤 1923년 8월 말 착잡한 마음으로 조선을 떠났다.
후세의 조선인 변호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1919년 2월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거행된 2·8 독립선언으로 체포된 조선청년독립단의 변호도 맡았다. 그 전에 일제는 최팔용·백관수·서춘 등 9명을 출판법 위반 혐의로 기소하고 2·8 독립선언 1주일 뒤 최팔용·서춘에게 금고 1년을 선고했다. 조선 청년들은 형량의 경중을 떠나 변호사의 태도가 불만스러워 후세 변호사를 찾아갔다.
후세는 비굴하게 재판관의 선처를 구하지 않았다. 그는 검사에게 “일본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원조한다”며 “시베리아에 출병까지 했으면서 어째서 조선의 독립운동을 원조하지 않는가”라고 따졌다. 그러면서 “조선 청년들의 독립선언은 정당하다”는 변론을 폈다. 변호사 수임료는 한 푼도 받지 않았다. 후세의 활약으로 1심에서 금고 1년이던 형량은 항소심과 상고심을 거쳐 9개월로 줄어들었다.
평생을 인권 변호사로 활동
이처럼 조선인을 위해 무료 변론을 마다하지 않았던 후세 다쓰지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후세는 일본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에서 태어났다. 그가 어렴풋하게나마 조선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 것은 동학농민운동 후였다. 당시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러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귀향 군인들이 “일본도를 한번 날리니까 조선인 두 놈의 목이 떨어졌다”고 늘어놓는 무용담을 들으며 조선인에 대해 동정과 연민을 느꼈다.
후세는 1902년 도쿄의 메이지법률학교(메이지 법대 전신)를 졸업하고 판검사 등용 시험에 합격해 검사 시보로 임용되었으나 생활고로 자녀와 동반 자살을 기도한 여성을 살인미수죄로 기소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뒤 1903년 변호사가 되었다. 이후 각종 소요 사건과 파업 등을 통해 차츰 인권 변호사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조선에 대한 후세 변호사의 관심이 구체적으로 표출된 것은 1911년 ‘조선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한다’라는 제목의 논문이었다. 이 논문으로 후세 변호사는 일본 검찰의 밤샘 조사를 받았다.
후세가 마침내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결심하고 이를 대외에 공표한 것은 마흔 살이던 1920년이었다. 5월 15일 지인들과 언론에 배포한 ‘자기 혁명의 고백’은 “평생을 탄압받고 힘없는 사람들 편에 서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명이었다. 후세는 ‘고백’에서 “앞으로 주요 활동 장소를 법정에서 사회로 옮기겠다”고 선언했다. 구체적으로는 ‘자본가와 부호의 횡포에 시달리는 사건’, ‘인간 차별에 맞서 투쟁하는 사건’ 등 자신이 맡아야 할 변호 활동의 기준을 마련했다. ‘조선인과 대만인의 이익을 위한 투쟁 사건’도 그 기준 속에 있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피해자, 박열 부부도 변호
1923년 8월 한 달 동안 조선에서의 연설과 변호와 격려를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후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9월 1일 일어난 관동대지진이었다. 일본 전체가 공포와 혼란에 휩싸였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조선인들이 시내 곳곳에 불을 질렀다”는 유언비어로 조선인에 대한 악감정은 극에 달했다. 일본도와 죽창으로 무장한 일본인들은 조선인이 발견되면 칼과 창을 휘둘렀다. 군인·경찰들도 일본 정부의 ‘불령조선인(不逞朝鮮人) 단속 공문’을 빌미 삼아 폭력에 가세했다.
후세는 겁에 질린 100여 명의 조선인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한편 유언비어를 날조한 계엄 당국과 경찰서를 항의 방문해 그들의 야만적 행위를 따져 물으며 일본 정부에 진상 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촉구했다. 대지진 이듬해인 1924년 9월에는 독자적인 조사를 통해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서 후세는 “조선인이 살해당한 상황은 말과 글로 차마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다”며 “쇠갈고리·죽창·철사·권총·일본도 등을 사용한 방법에 몸서리가 쳐진다”고 밝혔다. 후세는 스스로 조선인 학살에 대한 사죄문을 써서 조선 언론사에 보내기도 했다.
관동대지진을 계기로 인연을 맺은 인물 중에는 박열도 있다. 박열은 9월 3일 검속되어 애인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1924년 1월 ‘대역죄’로 기소되었다. 후세는 법정에서 “조선인 학살이라는 범죄 행위를 감추기 위해 조선인의 범죄를 조작해낸 것”이라며 무죄를 주장했으나 박열과 가네코는 1926년 3월 25일 사형을 선고받고 4월 5일 무기형으로 감형되었다.
사형 선고가 있기 전인 3월 1일, 후세는 박열과 가네코가 옥중 결혼을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가네코는 1926년 7월 23일 창살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 후세는 박열의 동지들과 함께 야밤에 가네코가 묻혀 있는 곳을 찾아가 시신을 발굴·화장해 유골을 자기 집에 안치했다가 박열의 친형에게 전해주었다. 유골은 1926년 8월 박열의 고향인 경북 문경 팔령산에 묻혔다.
후세는 1924년 1월 5일 황궁과 가까운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을 투척한 후 체포된 김지섭도 변호했다. 김지섭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복역 중 단식투쟁으로 일제에 항거하다 1928년 2월 20일 일본 땅에서 순국했다. 후세는 1925년 7월 조선에서 을축대홍수가 일어났을 때도 ‘조선 수재민 구호 운동, 구호 금품 전달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며 조선인을 돕는 데 앞장섰다.
후세 방문에 “왔소! 왔소! 후세 씨 우릴 살리러 또 왔소!” 환영 벽보 붙어
후세가 다시 조선을 방문한 것은 1926년 3월이었다. 동양척식회사의 토지 수탈에 항의하는 전남 나주군 궁삼면 농민들이 직접 일본으로 찾아와 혈서와 소송의뢰서를 건네며 도와줄 것을 부탁한 게 방문의 계기가 되었다. 당시 궁삼면에 “왔소! 왔소! 후세 씨 우릴 살리러 또 왔소!”라는 환영 벽보가 붙을 정도로 후세에 대한 기대가 컸다. 후세는 토지 수탈 현장을 조사했으나 총독부 고등계 형사들의 방해로 큰 성과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조사 후 “동양척식회사의 합법적 사기 사건”이라고 거세게 항의해 총독부와의 협상을 끌어냈다.
후세는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을 변론하기 위해 1927년 10월과 12월 두 차례 더 조선을 방문했다. 그의 변론에도 1928년 2월 13일 김재봉과 강달영은 6년형을 선고받았다. 수십 명의 다른 동지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후세는 1927년 12월의 방한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조선 땅을 밟지 않았다. 대신 전시 체제로 전환된 1930년대 일본에서 일본 정부에 맞서다 변호사 자격을 세 차례 박탈당하고 1933년과 1939년 각각 3개월, 400일씩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
1944년 2월 후세가 깊은 슬픔에 빠졌다. 교토대학생이던 셋째 아들이 전쟁에 반대하다 치안유지법에 걸려 교토형무소에서 옥사한 것이다. 평소 아버지의 활동을 반대하던 장남이 “동생까지 죽이고?”라며 아버지를 원망해 이중으로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래도 그는 “내 아들이 전쟁터에서 죽은 것보다 전쟁을 반대하면서 감옥에서 죽은 것이 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떳떳이 말했다.
해방 후인 1949년 4월에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박열 등에게 자신이 작성한 ‘조선건국헌법초안사고(私考)’를 선물로 건네주며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하도록 기원했다.
일본인 중 처음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949년 11월 12일 메이지대 대강당에서 ‘후세 다쓰지 탄생 70년 축하 인권 옹호 선언대회’가 열렸다. 3.000여 명의 청중 가운데 재일 한국인은 800여 명이나 되었다. 한국인과 후세는 이미 정서적으로 하나였다. 1953년 9월 13일 타계한 그의 도쿄 이케부쿠로 상재사 묘비에는 ‘살아서 민중과 함께, 죽음도 민중을 위해서’라는 생전의 좌우명이 새겨졌다.
해방 후 오랫동안 ‘후세 다쓰지’라는 이름은 우리나라 일반 대중의 ‘상식’이 아니고 특정 전문가의 ‘지식’에 머물렀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해방 후 좌파 변호사라는 이념적 굴레와 국민의 반일감정이 상승작용해 조명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오늘날 그에 대한 평가는 “톨스토이에 심취한 인도주의자로서 사람마다 인격적으로 평등하듯이 국가 또한 평등하다고 생각한 사람”이라는 게 일반적이다.
실제로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조선건국헌법초안사고’가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대통령중심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후세 자신도 한 법정에서 ‘나는 약한 자를 변호하는 해방운동가이지 결코 마르크스나 레닌을 표방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못을 박았다. 이런 점이 인정되어 후세는 2004년 10월 우리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그때까지 건국훈장을 받은 40여 명의 외국인 독립유공자 중 첫 일본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