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서울시가 한말(韓末)의 중심지역인 ‘정동(貞洞)’을 근대 역사의 상징 공간으로 재조성한다는데… 당시 정동은 열강 외교의 거점, 근대적 의료·교육의 산실, 신문화의 요람, 개신교 포교의 출발지였다

↑  하늘에서 촬영한 정동 일대. 덕수궁(중앙) 석조전 왼쪽 하단에 미 대사관저가 있고 그 바로 아래에 중명전과 예원학교가 보인다. 덕수궁 왼쪽 숲 옆에 덕수초등학교와 영국 대사관이 있고 덕수초등학교 앞 공터는 옛 경기여고 땅이다. 사진 하단에 정동제일교회가 있고 사진 중앙 우측에 서울시립미술관이 있다. (출처 서울연구원)

 

by 김지지

 

서울시가 한말(韓末)의 중심지역인 정동(貞洞)을 우리나라 근대 역사의 상징 공간으로 재조성할 계획이다. 대한제국 황궁이었던 덕수궁을 중심으로 외국 공사관들 사이에 공원을 만들고 역사적 의미를 담은 보행광장과 시민 휴식 공간을 2022년까지 곳곳에 조성한다. 서울시 계획에 따르면, 현재 옛 러시아공사관 부지에 조성되어 있는 정동공원은 ‘근대 외교 마을’을 상징하는 외교역사공원으로 바뀐다. ‘공사관 거리’라고도 불리는 정동 일대에는 미국, 프랑스, 영국 등 19세기 세계열강이 잇따라 들어와 공사관을 지었다. 지금도 러시아, 영국, 네덜란드 대사관 등이 몰려 있다.

 

한말(韓末), 정동의 중심은 경운궁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조약 이후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될 때까지 우리나라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국가는 일본을 포함해 미국(1882), 영국(1883), 독일(1883), 이탈리아(1884), 러시아(1884), 프랑스(1886) 등 11개국에 이른다. 이 가운데 조선에 공사관이나 영사관을 개설한 나라는 9개국으로 대부분 서울 정동에 둥지를 틀어 정동은 외교가의 거점으로 자리잡았다. 정동은 또한 의료·교육 분야에서 이뤄진 우리나라 근대화와 개신교 선교를 동시에 체험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서울 정동의 중심지인 경운궁(현재 덕수궁)의 한말(韓末) 모습. 멀리 왼쪽부터 러시아공사관, 중명전, 미국공사관, 망대, 돈덕전, 영국공사관, 구성헌 등이 보인다. 뒤의 산은 인왕산(왼쪽)과 북악산이고 저 멀리 보이는 산이 북한산이다.

 

‘정동’이라는 지명은 태조 이성계의 둘째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 ‘정릉(貞陵)’에서 유래한다. 신덕왕후는 이성계가 고려의 장군이었을 때 만나 1392년 조선이 건국되었을 때 왕후로 책봉되었으나 4년 후 세상을 떠나 영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당시 도성 안에 묘지를 쓰는게 금지되었지만 태조는 왕비를 애틋하게 생각해 왕비의 묘를 사대문 안에 들여놓게 하고 묘 이름을 ‘정릉’으로 명명했다.

그러나 첫째부인의 소생인 이방원(태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평온하던 정릉에 소용돌이가 쳤다. 이방원이 정적관계이자 눈엣가시였던 새어머니 신덕왕후의 묘를 파헤쳐 1409년 양주 사을한록(현재 성북구의 정릉)으로 이장했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이장 후 남아있는 건물 자재는 다른 건물을 짓는데 사용하도록 하고 정릉을 지키던 신장석(왕이나 왕비의 능 앞에 세우는 입석상)은 이듬해 홍수로 청계천 광통교의 흙다리가 무너졌을 때 돌다리의 교대석(다리의 양쪽 끝을 받치는 기둥)으로 사용하게 했다. 이후 신장석은 600년 가까이 광통교 다리 밑에 묻혀있다가 2005년 청계천 복원공사로 햇볕을 보게되었다. 이 신장석은 세련된 당초문양과 구름문양이 새겨져 고려말 조선초기 전통문양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2005년 다리의 교대석을 발견했을 때 거꾸로 놓여 있어 전문가들의 이런저런 추측을 낳고 있다. 즉 신덕왕후와 정적 관계에 있던 이방원의 의도적인 복수심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한말(韓末), 정동의 중심은 경운궁으로 불렸던 지금의 덕수궁이다. 월산대군(성종의 형)의 민간 저택을 궁으로 승격시킨 왕은 조선 제14대왕 선조다. 선조는 임진왜란 후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경복궁과 창덕궁이 파괴되어 마땅한 거처가 없었다. 그래서 창덕궁을 복원하는 동안 월산대군의 저택을 임시 거처인 행궁으로 삼았다. 선조는 점차 행궁의 경계를 넓혀가면서 15년 동안 생활하다가 1608년 행궁에서 눈을 감았다. 선조의 뒤를 이어 왕에 오른 광해군은 이 행궁에서 즉위하고 생활하다가 창덕궁이 복원되자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부터 행궁에 ‘경운궁’이라는 정식 궁호가 내려졌다. 그런데 말이 궁이지 규모는 여전히 대감집의 저택 수준에 불과했다. 더구나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이곳에 유폐시키고 ‘서궁’으로 격하해 사실상 궁의 기능을 정지시켰다.

참고로 서울에는 조선 궁궐이 다섯 있다. 조선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경복궁을 세웠다. 태종이 다시 한양으로 옮겨오면서 창덕궁을 세웠다. 세종이 즉위하자 태종이 상왕이 되어 살던 궁궐은 성종 대에 창경궁으로 거듭났다. 선조는 의주에서 한양으로 환도한 후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옛집에 행궁을 차렸다. 지금의 덕수궁이다. 인조는 이괄의 난을 만나 광해군이 세운 경덕궁에 잠시 거처했다. 영조는 경덕궁을 경희궁이라 개명하고 새 주인이 됐다. 정조와 고종은 세 궁궐의 주인이었다. 정조는 창경궁(출생)·경희궁(동궁)·창덕궁(국왕)으로, 고종은 창덕궁(즉위)·경복궁(친정)·경운궁(황제정)을 거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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