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하되 평등하면 된다.” 1896년 미 연방 대법원이 ‘플레시 대(對) 퍼거슨’ 소송을 통해 공공시설에서의 흑백분리를 당연한 것으로 판결함으로써 미국의 인종차별은 새 국면을 맞는다. 판결 전 남부지역에서는 ‘짐 크로우 법’을 제정, 흑인의 레스토랑, 호텔, 병원 등의 출입을 금하고 모든 공공장소를 ‘Colored’와 ‘WhiteOnly’로 분리해 비난을 사고 있었다. 20세기 흑인운동사는 이 ‘짐 크로우 법’이라는 괴물과의 싸움이었다.
모순된 현실을 타파하고자 두 인물이 나섰다. 1895년 9월, 애틀랜타 면화박람회 개막연설에서 확신에 찬 연설로 참석자의 주목을 끌었던 부커 워싱턴. “흑인·백인은 손가락처럼 분리될 수는 없지만 서로의 발전을 위해서는 하나로 합칠 수 있다”고 한 그의 ‘손가락 연설’은 백인에게는 감동이었으나 흑인에게는 인내가 필요했다. 인종차별을 받아들이면서 백인과의 화해와 조정을 강조한 그의 주장에 흑인 최초의 하버드대 역사학 박사 두 보이스가 반기를 들었다. 그 역시 다른 흑인운동가처럼 워싱턴을 ‘백인 얼굴을 한 흑인’ 즉 ‘엉클 톰’이라고 경멸했다.
흑인·프랑스인·독일인·인디언의 피가 두루 섞인 두 보이스는 “앵글로 색슨의 피가 섞이지 않아 신에게 감사한다”고 할 정도로 백인과의 타협을 거부했다. 1905년 여름, 두 보이스는 몇몇 흑인 지도자와 나이애가라 폭포에서 회합을 가졌다. 21세기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의 탄생을 알리는 만남이었다. 1909년, 주요 민권운동가들에게 ‘전미흑인협회’ 명의의 초대장이 날아들었다. “링컨 대통령 탄생 100주년이 되는 1909년 2월 12일에 전국적인 회합을 가질 예정”이라는 초대장에는 두 보이스를 포함해 수십 명의 흑백 지도자들이 서명했다. 이듬해 5월 두 번째 모임에서 비로소 ‘NAACP’라는 이름이 붙여지면서 NAACP는 20세기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초창기 주요 간부 대부분이 백인이고 1975년까지의 역대 회장이 유대계 미국인이었다는 점이 의외였다.
출범 후 인종차별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NAACP가 모습을 드러냈다. 1915년 3월 영화 ‘국가의 탄생’이 “KKK단을 호의적으로 묘사하고 흑인을 모욕했다”며 연일 수천 명의 흑인이 항의시위를 벌인 것도 NAACP였고, 1954년 연방 대법원이 ‘분리된 시설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고 판결을 내리도록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 소송을 이끌어낸 것도 NAACP였다. 1955년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사건’을 일으켰던 로사 파크스 부인도 NAACP 몽고메리 지부의 간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