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땅 구석구석

[지리산 국립공원]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를 2박 3일 지리산 종주기… “그날 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내였다”

↑ 지리산 천왕봉에서 바라본 일출 장면.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단다.

 

by 김지지

 

■희용의 꼬드김

대학친구 이희용이 꼬드겼다. 2박 3일간 지리산 종주를 해보자고. 꼬드김은 나에게 결단을 요구했고 결과적으로 더없는 행복을 내게 선물했다. 지리산 종주는 나에게 언감생심이었다. 지리산 천왕봉이야 30대까지 몇 번을 올라가긴 했으나 종주는 정말이지 먼나라 얘기였다.

이런 나에게 희용이가 연초에 제안했을 때 걱정은 되었지만 일단 OK로 화답했다. 지금 도전하지 않으면 평생 할 수 없을 것 같고 희용이가 동행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언제나 재미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20~30대 시절 희용의 팬을 자처했을까. 사실 희용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술을 마신 친구들 중 술자리 횟수가 가장 많은 친구다. 물론 늘 명랑쾌활하고 짜증이나 화를 내는 법이 없어 희용은 나보다 술을 더 많이 마신 지인들이 차고 넘칠 것이다.

더구나 희용은 지리산 종주 경험자인데다 체력도 내가 의지해도 좋을만큼 든든했다. 희용은 신혼 때이던 1991년 아내를 모시고 우리가 이번에 했던 코스와 똑같은 길을 다녀왔다. 사실 그때는 지금보다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요즘이야 많은 것을 대피소에서 해결할 수 있지만 당시는 입을 것, 먹을 것, 잠잘 것 모든 것을 바리바리 싸서 배낭에 넣어 가져가야 했다. 더구나 신혼의 아내 대신 자신이 대부분 짐을 지고 갔을테니 얼마나 무거웠을까. 물론 30대 초반이었으니 모든게 가능했으리라.

형제봉에서 벽소령으로 가다가 보이는 능선길 오른쪽(남쪽)의 산등성이들. 첩첩산중인데도 편안하고 부드럽다.

 

출발 당일까지 무릎 걱정

희용의 종주 제안을 이렇게 별 망설임없이 받아들였으나 출발 당일까지 걱정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였다. 어찌어찌 희용을 따라 종주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혹시라도 무릎에 이상이 생겨 60대 때 산에 오르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막연한 걱정이었다. 실제로 주위에 그런 선배들이 많다. 그렇게 산을 좋아하다가도 대략 내 나이 쯤부터 무릎 통증을 호소하기 때문이다.

만반의 준비를 했다. 평소 차지 않던 무릎보호대를 새로 장만하고, 회사 여직원이 알려주어 처음 알게된 근육이완제(경구용)와 마사지 크림을 준비했다. 무릎을 보호하려면 배낭무게를 줄이는 게 관건이라고 생각해 물품은 최소화했다. 이 때문에 꼭 필요한 것을 빠뜨리는 실수도 했다. 새벽에 천왕봉에 올라갔을 때 새벽 추위와 바람을 막아줄 외피를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것이다.

등산 출발일과 도착일만 서로 조율했을 뿐 일정과 계획은 모두 희용이가 홀로 짰다. 매 끼니 식단도, 그에 맞는 가공식품도 모두 희용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몹시 귀찮을 법도 한데 희용은 언제나 적극적이고 이타적이다.

종주 코스 난이도와 해발 고도 변화

 

■자 출발이다

우리의 일정은 성삼재에서 출발해 노고단을 거쳐 능선길을 따라가다가 연하천 대피소와 장터목 대피소에서 각 1박을 하고 천왕봉 일출을 보고 하산하는 것이다. 하산길은 천왕봉과 헤어져 동쪽 대원사로 내려갈지 아니면 다시 장터목 대피소로 되돌아내려와 백무동 계곡으로 내려갈지 현장에서 상황을 봐가며 정하기로 했다.

마침내 2019년 5월 20일의 날이 밝았다. 오전 7시 15분 용산역에서 전라선 KTX를 타고 가다가 9시 39분 구례구역에 도착했다. 요금은 41,500원이다. 구례구역이라고 하면 행정상 전남 구례군에 속할 것 같지만 사실은 전남 순천시에 속한다. 물론 역 바로 앞에 있는 섬진강만 건너면 구례군이다. 그래도 엄밀히 말하면 구례군이 아니어서 ‘입구(口)자’를 써서 구례구역이라고 한 것이다.

구례구역에서 택시를 타고 성삼재(1100m)까지 올라가는데 30~40분 정도 소요된다. 택시 요금은 4만원이다. 1인당 1만원으로 알고 있어 기사에게 물으니 “버스가 없는 새벽에는 등산객을 4명씩 채워 1인당 1만원씩 받고 있지만 보통은 승객 수와 관계없이 4만원을 받는다”고 했다.

 

‘산적 통행료’ 내지 않으니 공짜돈 번 것 같아

알다시피 성삼재로 가려면 861번 지방도로를 이용해야 하는데 성삼재 거의 다가서 지나는 곳이 지리산 천은사 입구다. 그런데 도로에서 1㎞ 정도 떨어진 사찰을 방문하지 않고 그냥 지방도로만 지나는데도 천은사 측이 1600원의 관람료(공원문화유산지구 통행료)를 받아 전국적으로 원성을 샀다. 도로를 지나가기만 해도 돈을 걷는다고 해서 ‘산적 통행료’로 불렸다.

1987년부터 32년 동안 받아온 이 통행료가 지난 4월 29일 폐지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도로를 지나니 마치 공짜돈을 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천은사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과거 정부가 천은사 토지에 군사작전용으로 도로를 만들었다가 나중에 관광도로로 전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부에서 진즉에 대안이나 해결책을 제시해야 했는데 그게 지금까지 미뤄지는 바람에 천은사만 욕을 먹은 꼴이 되었다.

성삼재(姓三峙) 지명은 2000여 년 전 삼한시대부터 유래했다. 마한군에게 쫓기던 진한왕이 달궁계곡으로 도망쳐 왕궁을 지은 뒤 성(姓)이 다른 세 장수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고 해서 성삼재로 불렸다고 한다. 희용과 나는 10시 35분 성삼재를 출발해 노고산 대피소에서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12시 경 노고단 고개에 도착했다.

 

■노고단은 지리산의 3대 주봉 중 하나

노고단 고개(1440m)는 천왕봉 방향의 왼쪽 주능선과 노고단 방향 오른쪽 고갯길로 나뉘는 삼거리다. 노고단 고개에서 노고단(1507m)까지의 거리는 0.7㎞다. 노고단(老姑壇)은 천왕봉, 반야봉과 함께 지리산의 3대 주봉으로 꼽힌다. 지리산에는 노고단보다 높은 봉우리들이 많지만 노고단이 독립봉이라는 점에서 3대 주봉으로 대우받고 있다.

노고단 고개에서 바라본 노고단 정상

 

‘노고(老姑)’는 할머니란 뜻이므로 노고단을 우리말로 하면 ‘할미단’이다. 할미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일컬는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곳에서 선도성모를 산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이후 언젠가부터 선도성모를 마고할미로 부르면서 노고단 지명이 유래했다. 노고단 정상은 탐방시간이 정해져 있고 탐방예약제로 운영되고 있다. 입장시간은 오전 5시에서 오후 4시까지다. 탐방인원도 제한한다.

노고단은 ‘지리산 10경’ 중 한 곳이다. ‘지리 10경’은 제1경 천왕일출(天王日出), 제2경 반야낙조(般若落照), 제3경 노고운해(老姑雲海), 제4경 직전단풍(稷田丹楓·피아골단풍), 제5경 세석철쭉(細石躑躅), 제6경 벽소명월(碧霄明月), 제7경 불일폭포(佛日瀑布), 제8경 연하선경(煙霞仙境), 제9경 칠선계곡(七仙溪谷), 제10경 섬진청류(蟾津淸流)를 가리킨다.

노고단 고개에서 시선을 사로잡는 또 다른 곳은 반야봉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반야봉은 수시로 구름이 넘나들어 장관을 연출한다. 지리산 10경의 하나다. 반야봉 오른쪽으로 멀리 촛대봉, 천왕봉, 중봉 등 지리산의 크고 작은 골과 능선이 끝간 데 없이 펼쳐진다. 이제 곧 본격적인 지리산 종주가 시작될 터이다. 출발에 앞서 개괄적으로 지리산을 공부하고 떠나자.

노고단 고개에서 바라본 반야봉

 

■지리산은 민족의 영산이자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

지리산은 백두산, 금강산과 더불어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산이다. 크고 웅장하고 품이 넓어 흔히 ‘어머니의 산’으로 불린다. 수백 종의 희귀 동식물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이기도 하다. 1967년 12월 29일 대한민국 국립공원 1호로 지정되었다.

당시 ‘1호’ 자리를 놓고 설악산과 경합했다. ‘국립공원 30년사’에 의하면 그해 공원법이 제정됐고 새해로 넘어가기 전에 국립공원을 지정하기로 했다. ‘우리나라의 풍경을 대표할 수려한 자연 경관지’가 지정 요건이었다. 설악산이 1호가 돼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강원도 수복지역에 있는 설악산 근처에는 지뢰가 매설돼 있고 불발탄이 있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국방부의 이런 의견에 주무부처인 건설부가 1호를 지리산으로 지정했다. 이 와중에 우종수(지리산악회)를 대표로 한 구례군민의 지리산 국립공원 지정 청원 운동도 큰 몫을 했다. 설악산은 1970년 3월에야 ‘5호’ 국립공원에 지정됐다.

행정상으로는 3개도, 5개 시군에 걸쳐 있다. 전남 구례군, 전북 남원시, 경남 하동·산청·함양군이다. 남한에서는 제주 한라산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최고봉인 천왕봉(1915m), 서쪽 끝의 노고단(1507m), 서쪽 중앙의 반야봉(1732m)을 정점으로 동서 50㎞, 남북 32㎞의 거대한 산악군을 형성하고 있다. 둘레는 320㎞에 달한다. 3대 주봉 말고도 1500m급 봉우리가 10여 개, 1000m급 봉우리가 20여 개이고 그밖에 들고나는 봉우리도 80여 개에 이른다. 산봉우리들은 45㎞에 이르는 주능선을 형성하며 첩첩산중을 이룬다.

이 능선들이 한반도 산줄기의 뼈대를 이루는 백두대간의 대미를 장식한다. 백두산 천지에서 시작한 백두대간은 금강산, 설악산, 태백산, 속리산, 덕유산을 거쳐 지리산까지 내려와 천왕봉을 밟으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백두대간에서 내려왔다고 해서 한때는 두류산(頭流山)으로 불렸다. 이름 그대로 백두산(頭)에서 흘러내린(流) 산이란 의미다. 현재 종주가 가능한 남한 쪽 백두대간은 지리산 천왕봉부터 진부령까지 690㎞다. 북한 땅까지 합한다면 백두대간의 길이는 1600㎞가 넘는다. 북진 종주는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에서 시작한다. 천왕봉를 거쳐 계속 서쪽으로 가다가 성삼재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튼다.

지리산의 큰 봉우리에서 발원한 물들은 피아골, 뱀사골, 칠선계곡, 백무동계곡, 연곡골, 밤밭골 등 수많은 계곡을 만들었다. 길이가 10㎞ 이상 되는 계곡만 10여 개 된다. 불일폭포·구룡폭포·칠선폭포·가내소폭포·천령폭포·법천폭포 등 다양한 폭포들도 비경을 연출한다.

 

■지리산 종주가 뭐꼬

지리산 종주는 성삼재에서 시작해 장터목 대피소를 거쳐 천왕봉을 찍고 장터목 대피소로 다시 돌아와 백무동이나 중산리로 내려가 산행을 마치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체력이 좋은 산악 마니아들은 화엄사에서 출발해 노고단과 천왕봉을 지나 동쪽의 대원사까지를 종주로 친다. 화엄사와 대원사의 앞 글자를 딴 이른바 ‘화대종주’다. 총 거리는 약 48㎞다.

화대종주는 엄청난 체력과 인내를 요구한다. 화엄사에서 코가 땅에 닿는다는 급경사의 코재를 지나 노고단 정상까지 7㎞를 올라야 하는데다 천왕봉에서 대원사까지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는 지겹고 짜증나는 긴 구간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밤이고 낮이고 죽어라 전진하는 무박산행으로 화대종주에 도전하는 산악인도 있다. 대단한 사람들이다. 다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땀을 흘리며 지리산의 참맛을 느끼는 게 목적이라면 낮에는 산행을 하고 밤에는 대피소에서 잠을 청하는 종주가 좋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야 지리산의 품에 안겨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충분히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종주 능선이 한 눈에 보인다. 사진 상단 오른쪽 4분의 1지점에 삼각형 모양의 노고단과 그 오른쪽에 엉덩이 모양의 반야봉이 있다. 반야봉 앞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뻗은 능선이 있고 왼쪽 끝지점에서 다시 오른쪽(사진 우측 하단)으로 뻗는다.

 

지리산 종주는 1300~1700m 고지를 오르락내리락 반복한다. 따라서 종주 성공의 관건은 다리 근육과 배낭 무게다. 식단은 가벼운 것 위주로 짜는 게 좋다. 대피소에서 햇반을 판매하므로 코펠, 버너, 밑반찬, 라면 정도만 준비하는 것도 방법이다. 대피소에서 담요와 메트리스도 유료로 빌려주므로 짐을 줄일 수 있다. 다만 온갖 사람들이 깔고 덮고 하는 대피소 담요가 싫으면 개인 침낭과 매트리스를 가져가면 된다. 물은 대피소마다 있다. 대피소는 사전 예약제이고 텐트는 칠 수 없다.

지리산의 능선길은 외길이다. 길을 찾는 게 어렵지 않고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전국의 다른 산에서는 샛길이 많아 때로는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리본이 도움이 될 때도 있으나 지리산에서는 리본이 전혀 필요없다. 그렇기에 지리산 국립공단 측은 수시로 리본을 제거한다.

 

■마침내 종주 시작
▲돼지령 ~ 피아골 삼거리 ~ 임걸령

노고단 고개에서 12시 20분 쯤 종주 능선으로 방향을 정하니 곧바로 내리막길이다. 길은 호젓하고 쾌적하다. 원시자연림 분위기가 나는 곳도 있다. 평지 같은 길을 50분 정도 지나니 오른쪽으로 전망이 열린 돼지령이 나타난다. 멧돼지가 많이 출현해서 돼지령이다. 성삼재에서 7.5㎞, 노고단 고개에서 2.8㎞ 거리인 피아골 삼거리(1336m)에 도착하니 1시 28분이다. 팻말에는 천왕봉까지 22.7㎞로 되어 있다.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2㎞ 내려가면 피아골 대피소가 있다.

피아골 대피소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함태식(1928~2013)씨다. 그는 지리산의 전설이자 한국 산악계의 거목이었다. 전남 구례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그가 본격적으로 지리산을 찾은 것은 29살이던 1957년이었다. 1971년 지리산에 노고단 산장이 설치되자 이듬해 44세로 노고단 산장 관리인을 맡아 이후 16년 간 노고단 주변에서 산사람으로 지냈다. 그 시절은 등산객들이 노고단 산장 주변에 야영을 하며 모닥불을 피워 놓고 밤새 술을 마실 때였다. 함태식은 그들에게 따끔하게 호통을 쳐 ‘지리산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함태식 선생이 1995년에 펴낸 <단 한번이라도 이곳을 거쳐간 사람이라면>의 2002년도 개정판 <그곳에 가면 따뜻한 사람이 있다> 표지

 

1988년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산장 직영화 조치 이후 노고단에서 피아골 대피소 관리인으로 자리를 옮겨 2011년까지 23년을 피아골에서 보냈다. 그 기간 산중에 머물며 환경보존 운동과 인명구조 활동에 투신했다. 구조한 사람만 100명이 넘는다. 지리산 종주길을 처음 열고 지리산이 1967년 국립공원 1호로 지정되는데 열과 성을 다했다. 2009년 5월에는 팔순의 나이에 천왕봉 정상에서 케이블카 설치 반대 1인 시위를 벌였다. 산악인들은 턱수염이 많은 그를 가리켜 ‘털보 아저씨’라고 불렀다.

 

함태식은 지리산의 전설

그가 피아골 대피소 관리를 그만두고 일선에서 물러난 것은 2009년 4월이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건강이 염려되고 조난 등의 긴급상황에 대비해야 하는 대피소 관리인의 구실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다”며 대피소 관리를 다른 사람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를 안타까워한 산악인들이 피아골 대피소로 몰려가 “지리산 호랑이가 지리산에서 죽어야지, 어디로 가란 말이냐”며 국립공원을 성토했다. 이후 함태식은 지리산 숲해설사로 활동하다가 2011년 12월 지리산 생활을 완전히 접고 속세로 하산했다.

피아골 삼거리에서 다시 평탄한 길을 10분(0.4㎞) 정도 지나니 임걸령(1320m)이다. 그곳에는 다듬어지지 않은 화강암이 넓게 퍼져 있고 군데군데 휴식할만한 공간이 있다. 등산로 옆에는 물이 콸콸 쏟아지는 옹달샘이 지나가는 등산객을 반긴다. 임걸령 샘터다. 능선에 샘물이 있다는 게 신기하지만 정면에 우뚝한 반야봉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다. 임걸령은 조선조 선조 때 지리산 일대에서 도적질을 한 임걸(혹은 임걸년)이라는 도적의 이름에서 왔다. 지리산은 설악산과 달리 이렇듯 요소요소에 비교적 샘이 많은 편이다. 흙산이어서 그럴 것이다.

임걸령 샘터

 

▲노루목 ~ 반야봉

임걸령에서 1.3㎞ 떨어진 노루목(1480m)까지의 길은 원시림 초록터널 일색이다. 노루가 다니는 길목이라고 해서 붙여진 노루목은 삼거리다. 직진하면 삼도봉을 거쳐 천왕봉으로 향하는 주능선이고 왼쪽 길로 올라가면 주릉에서 벗어나 있는 반야봉이다. 그러다보니 등산객들은 철계단과 암석길을 거쳐 1㎞ 정도 올라가야 하는 반야봉 아래에서 늘 갈등한다. 올라가자니 종주 시간이 빠듯하고 안오르자니 찜찜해서다.

우리의 당초 일정에도 반야봉은 없었다. 혹시라도 무리하게 되면 전체 일정에 차질을 빚기 때문이다. 실제로 반야봉에 오르면 예정된 거리보다 1.3㎞ 더 늘어난다. 해발 고도 역시 200m나 올라가므로 체력도 소진한다. 그래서 우리도 한동안 갈등했으나 결국에는 반야봉에 오르기로 했다. “반야봉에 반드시 오르세요”고 한 희용의 대학 후배가 해준 조언이 결정적이었다. 결국 일몰 후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했지만 반야봉은 오를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지리산의 3대 주봉인데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종줏길의 경관이 워낙에 빼어나기 때문이다.

반야봉은 기암괴석의 웅장함과 야생나무와 구상나무 등 독특한 식생을 간직하고 있다. 한 여름에는 한폭의 천상화원이라 할 만큼 야생화가 무리지어 핀다. 특히 신비로운 낙조(落照)의 장관을 연출해 반야낙조는 지리산 10경 중 하나다. 전북 남원과 전남 구례의 경계 지점에 있다.

 

“반야봉에 반드시 오르세요”

반야봉은 지리산의 독립 봉우리다. 독립봉으로는 전국 유일의 1700m 대다. 원만한 두 봉우리가 절묘하게 하나를 이루고 있어 멀리서보면 영락없이 하트나 엉덩이 모양이다. 그래서 반야봉은 남부지방 어느 산을 가더라도 쉽게 식별할 수 있다. 천왕봉에 중봉이 있듯이 반야봉에도 중봉이 있다. 차이는 천왕봉과 달리 쌍봉이라는 것이고 남성처럼 드센 천왕봉과 달리 여인의 엉덩이처럼 부드럽다는 것이다.

반야봉 정상의 표지석

 

사실 희용과 나는 반야봉이 처음은 아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구례군의 심원마을 쪽에서 십수년 전 “올라가지 말라”는 금지선을 뚫고 반야봉으로 올라가 노고단으로 내려온 적이 있다. 당시 심원마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마을(750m)이라고 해서 하늘 아래 첫 동네로 불렸다. 2017년 11월 건물과 포장도로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수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지금은 풀과 나무가 우거지고 야생동물이 사는 생태로 복원되었다.

노루목에서 반야봉 방향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반야봉 삼거리(1550m)가 나온다. 그곳에서 왼쪽으로 치고 올라가면 반야봉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노루목에서 직진하는 종주 능선과 만나 삼도봉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노루목에서 1㎞ 거리인 반야봉(1732m)에 도착한 시간은 3시 23분이었다. 반야봉 삼거리 숲 속에 배낭을 놓고 올라가 발걸음이 비교적 가벼웠다. 정상에 다다랐을 즈음 고교 동창인 남근이가 마치 CCTV로 확인한 것처럼 “지금쯤 반야봉 정상에 있거나 내려오겠군”이라고 전화를 걸어왔다. 반야봉에 오르지 않았다면 남근이를 실망시켰을지 모를 일이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내”

반야봉에 오르니 노고단에서 반야봉까지, 반야봉에서 천왕봉까지의 길고긴 능선길이 그림처럼 펼쳐있다. 멀리 노고단 위에 멈춰있는 구름을 보고 희용이가 “충남 계룡산 관음봉의 한운(閑雲)같다”고 한마디 한다. 그러면서 관음봉의 한운은 계룡산 천왕봉의 일출, 삼불봉 설화(雪花), 연천봉 낙조, 동학계곡의 신록, 갑사계곡의 단풍, 은선폭포의 운무(雲霧), 오뉘탑의 명월과 더불어 ‘계룡 8경’이라고 덧붙인다. 걸어다니는 백과사전 답다.

반야봉에서 바라본 노고단. 그 위로 구름이 한가롭다.

 

반야봉에서 바라보는 산의 등줄기가 선명하고 평화롭다. 그 모습을 찍은 사진과 반야봉 표지석을 배경으로 찍은 인물 사진을 고교·대학 친구들의 단톡방에 올리면서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내”라는 문자를 날렸더니 응원 문자가 쇄도한다. 이미 전날에는 고교 동창인 달호가 오늘 오전에는 영일이가 격려 전화를 한 터다.

몇몇 응원 문자를 소개하면 “엄청 행복해 보인다. 멋져부러” “모습이 죽이네. 천진한 모습” “대단하구나 성취감 맘껏 즐기기를” “그대의 산행 능력으로 완주는 걱정없겠지만 무엇보다도 건강 조심하시게. 안산해야 즐산이네” “너무너무 멋지다. 나도 그 옆에 서고 싶다” “무지 부럽네. 좋은 산행 고이 간직하길” “보내준 사진만으로도 이미 취하고 남음이오. 우리나라 특급수 임걸령 샘물에 취하면 매년 찾을거요” “덕분에 아침부터 눈이 호강하는구려” “지리산 가고픈 맴이 훅 드네. 인생 뭐있어” “풍경좋고 날씨좋고 지리산 소식에 안구가 정화되네” 등이다.

 

▲삼도봉 ~ 화개재 ~ 토끼봉 ~ 명선봉

반야봉(1732m)에서 삼도봉(1449m)까지의 2㎞는 고도를 283m나 낮춰야 해서 계속 내리막길이다. 50분 정도 걸렸다. 삼도봉은 1998년 전북 남원시, 전남 구례군, 경남 하동군을 관할하는 3명의 도지사가 이곳에 모여 표지석을 세운 뒤부터 삼도봉으로 불리고 있다. 그전에는 낫의 날처럼 생겼다는 뜻으로 낫날봉, 날라리봉으로 불렸다고 한다.

삼도봉

 

삼도봉은 주름진 암릉이다. 전망 좋은 바위에 앉아 첩첩산중의 산등성이와 계곡을 감상하니 신선이 따로 없다. 삼도봉 아래 산비탈면은 비단을 깔아 놓은 듯 편하고 부드럽다. 불무장등 능선이 발 아래 펼쳐지고, 코 앞에 반야봉과 노고단이 한눈에 보인다. 삼도봉(1449m)에서 화개재(1316m)까지 0.8㎞도 내리막길이다. 그 사이에 마의 550여 계단이 있다.

종주 능선에서 가장 낮은 화개재에 도착하니 5시 3분이다. 화개재에 설치된 안내판이 ‘경남에서 연동골을 따라 올라오는 소금과 해산물, 전북에서 뱀사골로 올라오는 삼베와 산나물 등을 물물교환한 장소’라고 설명하고 있다. 화개재라는 명칭이 연동골이 소재한 섬진강변의 하동군 화개면에서 연유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유명한 화개장터는 화개면에 있다. 그런데 지리산국원공원의 지도에는 화개장터에서 쌍계사와 칠불사를 지나 화개재로 오르는 길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길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국립공원 측이 폐쇄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화개재를 떠나 토끼봉(1534m)으로 향했다.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1.2㎞를 걷고 고도를 218m나 높이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엄청 가파르진 않지만 쉼터 없는 오름길의 연속이다. 배낭이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내 배낭 무게는 13㎏이고 희용의 배낭은 16㎏다. 그런데도 얼굴에 땀이 흐르거나 주먹을 쥔 손아귀에서 강한 악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산행시 힘들다 싶을 때 나오는 콧물도 소식이 없다.

화개재(왼쪽)와 토끼봉

 

내 배낭 무게는 13㎏, 희용은 16㎏

나는 산행이 힘들고 얼굴에서 땀이 많이 나면 어김없이 콧물이 나온다. 약간 힘들 때는 한쪽 코에서만 많이 힘들 때는 양쪽 코에서 콧물이 나온다. 몸이 힘든지 아닌지는 손의 악력이 알려준다. 기준은 군대 훈련병 시절 훈련을 마쳤을 때 느꼈던 악력이다. 생각해보니 배낭이 무거워 속도를 내지 못하고 그래서 얼굴에 땀이 많지 않다보니 콧물도 악력도 소식이 없는 것이다.

토끼봉에는 1시간 정도 올라가 도착했다. 말만 봉우리일 뿐 정상다운 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헬기장만 덩그렇다. 토끼봉은 반야봉을 기준할 때 방위가 묘향(卯向·동향)이라고 해서 묘봉으로 불리다가 묘(卯)를 뜻하는 토끼봉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해가 기울면서 바람 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마치 큰 계곡이 내지르는 물소리 같다. 추울 정도는 아니지만 한기가 느껴져 겉옷을 하나 더 꺼내 입었다. 토끼봉에서 2.4㎞ 떨어진 명선봉(1588m)을 향해 걷는데 서쪽 숲 사이로 일몰의 순간이 포착된다. 스마트폰으로 그 장면을 찍으며 걷고 있는데 서산의 해가 능선너머로 꼴까닥 사라졌다. 명선봉에 도착했으나 해가 진 터라 쉬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했더니 쉼터가 나타난다. 명선봉에서 0.6㎞ 떨어진 연하천대피소다.

 

▲연하천 대피소

대피소에 도착하니 7시 43분이다. 해가 진 뒤여서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연하천(烟霞川)은 ‘구름 속에 물줄기가 연기처럼 흐른다’는 뜻이다. 이곳은 전북 남원군에 속한다. 이렇듯 지리산의 봉들은 저마다 소속된 행정지명이 다르다.

지리산 종주 첫 날은 다소 힘들었다. 거리가 멀고 시간도 많이 걸려 그랬겠지만 아직 몸이 지리산 구조에 체적화(體適化·내가 지은 조어)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인 것은 걱정했던 무릎이 아프지 않다는 것이다. 다음날 일어났을 때 다리는 물론 온몸이 멀쩡한 게 신기할 정도다. 보통은 다소 험하거나 주행거리가 긴 산에 올라가면 다음날 종아리와 허벅지가 뻑적지근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근육이완제 덕이 아닌가 싶다.

연하천 대피소

 

서둘러 잠자리를 정하려고 희용이가 대피소 관리인에게 예약자 이름을 알려주었더니 “숙소 예약이 취소되었다”고 해 순간 우리를 당황게 했다. 희용이가 과거 국립공원관리공단에 회원가입 했을 때 등록한 전화번호가 바뀌었는데도 이번에 숙소를 예약할 때 전화번호를 바꿔 기재하지 않아 관리소 직원이 대피소 도착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걸거나 문자를 보내도 답이 없어 ‘노쇼’ 고객으로 판단해 예약을 취소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월요일이라 숙소에 여유가 있고 관리인의 배려 덕에 잠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우리는 밤 9시에 소등을 한다는 관리인의 말을 듣고 급하게 저녁을 지어 먹은 뒤 씻지도 않은 채 잠자리에 들었다. 그날 밤 기온은 1도로 떨어졌다. 대피소에서는 비누도 치약도 샴푸도 사용할 수 없다. 그릇을 설거지할 때는 휴지만 사용해야 하고 쓰레기는 차곡차곡 모아 모두 가지고 내려가야 한다. 잠자리는 어깨길이로 1m도 안되는 공간만 주어져 뒤척일 때 불편하지만 가급적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니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

저녁 6시에 잠자리를 배정하고 9시에 일괄 소등한다. 문제는 새벽이다. 일찍 일어나 산행을 준비하려해도 불을 켜거나 부스럭 거리면 옆 사람의 수면에 방해될까봐 조심하게 되니 여간 답답한 게 아니다. 대피소 잠자리는 1인당 1만 3000원이고 모포는 개당 4000원이다. 햇반은 3000원이다.

 

▲형제봉 ~ 벽소령 대피소 ~ 선비샘 ~ 덕평봉 ~ 칠선봉 ~ 영신봉

5월 21일 새벽에 일어나 급하게 아침을 해결하고 6시 6분 연하천 대피소를 떠났다. 오늘의 일정은 어제보다는 여유가 있다. 아침 일찍 출발하는데다 13.3㎞만 이동하면 되기 때문이다. 어제는 10시 넘어서 출발했는데도 이동거리가 14㎞였다. 오늘의 최종 목적지는 장터목 대피소다.

삼각고지를 거쳐 2.1㎞ 떨어진 형제봉(1452m)에 도착하니 오전 7시 24분이다. 형제봉은 언뜻 보기에는 한 개의 큰 석상처럼 보이나 자세히 보면 서로 등을 맞대고 서 있는 두 개의 석상이다. 우뚝 솟은 봉우리가 우애 깊은 형제와 비슷하다 해서 형제봉으로 불리지만 19세기 초에 제작된 지도에는 부자바위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서 웅장한 모습으로 자태를 뽐내고 있는 천왕봉이 보이고, 남부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백운산까지 조망이 된다.

형제봉에서 다음 코스는 벽소령 대피소(1350m)다. 1.5㎞의 짧은 거리인데도 고도를 100m 정도 낮추는 것이어서 내리막이 가파르다. 능선길 오른쪽(남쪽)으로 펼쳐진 산등성이들이 지리산이 왜 웅장하다고 하는지를 여실히 알려준다. 산너머 산의 연속인데도 편안하고 부드럽다. 가다쉬다 하며 쉬엄쉬엄 이동하다보니 어느덧 벽소령 대피소다.

 

“고지가 멀지 않았다”

벽소령은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지리산 종주 코스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고개다. 지리상으로는 경남 하동과 함양을 연결한다. 벽소령 아래 첫 마을은 6.5㎞ 떨어진 하동의 의신마을이다. 벽소령의 벽소(碧宵)는 ‘푸른 밤’이란 뜻이다. 벽소령에서 달밤이면 푸른 숲 위로 떠오르는 달빛이 너무나 희고 맑아서 오히려 푸르게 보인다고 해 ‘벽소(碧嶺)’ 즉 ‘푸른 밤’으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벽소명월 역시 지리산 10경의 하나다. 벽소령 대피소에서 장터목 대피소로 가는 능선길도 남쪽으로 탁 트여있어 전망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

벽소령 대피소(왼쪽)와 벽소령에서 덕평봉으로 가다가 전망 좋은 쉼터에서 쉬고 있는 우리

 

선비샘에 도착하니 국립공원 직원이 마셔도 되는지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가져갈 샘물을 용기에 담고 있었다. 직원은 이렇게 매일 올라와 물을 가져간다고 한다. 성삼재에서 선비샘까지 GPS는 20.3㎞를 표시하고 있다. 왜 선비샘인지는 그곳 안내판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특별한 내용은 없어 생략한다. 선비샘은 콸콸 흐르는 임걸령과 달리 쫄쫄 흐른다. 선비샘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있는 선비샘 쉼터에서 축복받은 5월의 햇살과 신록을 만끽하며 남쪽 저멀리 펼쳐지는 지리산의 웅장함을 눈과 가슴에 담았다.

뒤이어 도착한 덕평봉(1522m)에서 바라보니 천왕봉, 중봉, 연하봉, 장터목, 촛대봉 등의 모습이 비교적 뚜렷하다. 노고단과 반야봉도 선명하다. 천왕봉까지는 7.8㎞만 남았다. 고지가 멀지 않았다. 덕평봉은 정상부가 각이 지지 않고 평평한 것이 덕스러워 보인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칠선봉(1558m)은 7개의 바위가 오밀조밀 모여서 정상을 이룬 모습이 마치 일곱 선녀가 한자리에 모여 노는 형상과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봉우리는 암장(돌담)이어서 오르지는 못한다.

칠선봉을 지나 세석평전 부근에 다다르면 영신봉(1651m)이 주변에 있다. 그런데 대부분 영신봉에 오르지 못하고 지나치기 십상이다. 영신봉이라고 적힌 방향목 옆에 줄이 쳐있는데 그 줄을 넘어 50m 정도 가야 영신봉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우리 역시 영신봉을 지나치고 말았다. 영신봉이 유명한 것은 영신봉 남사면 암벽 아래 해발 1500m 고지대에 자리하고 있는 영신대 때문이다.

지리산에는 많은 기도처가 있는데 그중 가장 기가 세고 영험한 곳이 영신대이다. 잡풀이 무성한 영신대 주변에는 제단과 수행자들의 좌대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병풍 같은 바위자락에 남향으로 터를 잡고, 앞에는 큰 조망, 옆에는 청류가 흐르니 누가 봐도 명당이다. 앞의 조망바위에 오르면 골과 능이 넘실대는 초록의 바다다. 지형지세가 지리 10대 중 당연 최고라 부를 만하다고 한다.

 

▲세석 평전과 세석 대피소

벽소령 대피소에서 6.3㎞ 떨어진 세석 대피소에 도착하니 오후 1시다. 세석 대피소는 1500m 정도 높이에 위치한 세석 평전에 자리잡고 있다. 세석 평전은 우리나라 고원평원 가운데 가장 넓다. 이름은 잔돌이 많은 평야 같다고 한 데서 유래한다. 주위가 12㎞나 되고 면적은 30여 만 평에 달해 남녘의 개마고원이라고도 불린다.

세석 평전. 세석 대피소의 지붕이 보인다.

 

야영이 허락되던 1990년대 중반 경에는 등산객과 야영객들의 무분별한 훼손과 군부대의 산악 훈련 등으로 완전히 황폐화되었으나 이후 야영이 금지되고 산악인들이 자제하고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적극적으로 노력해 현재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이곳에서 점심을 준비하는데 사달이 났다. 희용이가 관리사무소에 햇반을 사러 가면서 편의점에서 사온 마파두부덮밥과 짜장덮밥을 나에게 만들라면서 물은 코펠 중간 정도로 하라고 한 것을 내가 잘못 들은 게 사달의 시작이었지만 진짜 이유는 마파두부덮밥과 짜장덮밥에 대한 나의 무지와 몰이해였다.

나는 코펠에 물을 중간 정도 넣어 끓인 뒤 마파두부덮밥과 짜장덮밥 비닐을 뜯어 내용물을 물에 넣었다. 10분쯤 지나 간을 보니 맹탕이었다. “맛이 왜 이러지” 하면서 원래 맛이 그런가보다 하고 희용이가 있는 식탁으로 가져갔다. 그것을 본 희용의 얼굴에서 실망과 당혹과 어이없음이 교차한다. 끓은 물에 덮밥을 비닐봉지 채 넣어 끓인 후에 비닐봉지를 뜯어 햇반의 밥 위에 부어 먹는 것인데 비닐을 뜯어 맹탕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먹는 것에 내가 얼마나 무지하고 생각이 없는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대목이다. 더구나 식성 좋은 희용이가 배가 고픈 상태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쏟아지는 핀잔은 피할 수 없다. 희용은 “왜 내 얘기를 대충 듣느냐”고 타박한다. 할 말이 없다.

 

▲촛대봉 ~ 연하봉

세석 대피소와 작별한 후의 코스는 오르막길이다. 첫 고비는 200m 정도 올라가야 하는 촛대봉(1703m)이다. 체력 저하로 힘이 드니 잡념조차 끼어들 여지가 없다. 희용은 체력이 좋아 유유자적 가다서다하며 뒤쳐진 나를 기다린다. 촛대봉에는 3시 조금 지나 도착했다. 꼭대기에 오르니 사방이 한 눈에 들어온다. 천왕봉은 4.4㎞만 가면 된다. 촛대봉은 어떤 여인이 산신령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촛대를 켜고 천왕봉을 향해 빌다가 돌로 굳어버렸다고 해서 붙여졌다. 다음은 연하봉(1710m)이다. 종주 능선에서 천왕봉을 가장 가깝게 볼 수 있는 봉우리다. 촛대봉에서 연하봉으로 향하는 구간은 지리산꾼들 사이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길로 통하는 연하선경이다. 지리산 10경 중 하나다.

촛대봉에서 연하봉으로 가는 길. 지리산꾼들 사이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길로 통하는 연하선경이다. 가장 멀리 보이는 봉이 천왕봉이다.

 

지리산 종주는 행복의 연속이었다. 9월 초의 가을과 흡사한 날씨 덕분이다. 며칠 전부터 내렸던 비가 종주 첫날 새벽에 그쳐 종주 내내 따사로운 햇살과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감싸주었다. 봄과 가을의 절묘한 조화 속으로 뛰어들었으니 누군들 행복하지 않으랴.

나를 행복하게 한 두 번째 이유는 등산객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노고단에서 연하천 대피소까지 우리가 만난 팀은 서너팀에 불과했다. 물론 둘째날 연하천 대피소에서 장터목 대피소까지는 여러 사람을 만났다. 대부분 백무동이나 중산리에서 올라온 사람들이다. 등산객도 홀로 산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평일이어서 그런 것일텐데 우리도 젊었을 때는 여름 휴가철이 아니고서는 평일에 지리산을 오르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장터목 대피소

연하봉을 넘어 조금 지나니 장터목 대피소(1670m)가 짠 하며 모습을 드러낸다. 오후 5시 10분이다. 오늘은 일찌감치 쉬고 내일 새벽에 천왕봉만 오르면 종주가 사실상 끝난다고 생각하니 괜히 흐뭇하고 나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장터목 대피소

 

장터목은 천왕봉 남쪽 기슭의 하동군 시천면 주민과 북쪽 함양군 마천면 주민들이 봄가을마다 이곳에 모여 장(場)을 세우고 서로의 생산물을 물물교환한 데서 이름 붙여졌다. 장터목 대피소는 1971년 지리산 최초로 지어졌다. 당시에는 ‘지리산 산장’으로 불렸다가 1986년 재건축하면서 ‘장터목 산장’으로 개명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장터목 대피소로 불리고 있다.

장터목 대피소는 지리산 대피소 중 천왕봉에서 가장 가깝다. 이곳에서 1시간이면 천왕봉에 오를 수 있어 천왕봉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워낙에 조망이 뛰어나고 운해가 지나는 길목이라 신비로운 광경이 펼쳐질 때도 있다. 이곳에서 감상하는 일몰 장면도 멋지다. 우리도 7시 31분에 일몰 순간을 스마트폰에 담았다.

오늘은 어제와 달리 대피소에 너무 일찍 도착한 게 문제가 되었다. 관리인이 6시부터 잠자리를 배정하는데 우리는 5시 15분에 도착한 것이다. 결국 1시간 이상 할 일 없이 기다리다가 6시 반에 잠자리를 배정받았다. 일찍 도착했는데도 잠자리를 늦게 배정받는 바람에 식사와 설거지를 마치고 나니 피곤도 하고 기온도 내려가 세안을 또 포기했다. 대피소 관리인이 5시부터 자리를 배정하면 식사도 일찌감치 하고 씻기도 할 텐데 왜 6시를 고집하는 지는 알 수 없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이유가 타성에 젖어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볼 문제다.

장터목에서 바라본 일몰 순간

 

둘째날은 첫째날보다 덜 피곤해 밤 9시에 소등을 해도 바로 잠이 오지 않았다. 겨우 눈을 붙였는데 새벽 1시쯤 옆에 누워있는 사람이 갑자기 콧물감기 재채기를 해 잠에서 깼다. 곧 나까지 콧물이 나와 불안해서 복도로 나가 하릴없이 스마트폰만 검색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40여분 정도 있다가 2시쯤 숙소 안으로 들어가니 옆자리 사람이 코를 골고 자고 있었다. 시끄러워 잠은 오지 않았으나 감기 바이러스가 내게 오지 않은 것 같아 안도했다. 천왕봉 일출을 보려면 새벽같이 일어나 올라가야 한다. 요즘 천왕봉 일출 시간은 5시 10~20분이다.

 

▲천왕봉 일출,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

5월 22일 새벽 3시 쯤부터 대피소 곳곳이 부산하다. 등산객들이 천왕봉(1915m) 일출을 보기위해 준비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일어나 등정을 준비했다. 그리고 새벽 3시 40분 쯤 1.7㎞ 떨어진 천왕봉을 향해 헤드 렌턴에 의지한 채 어둠 속을 헤쳐나갔다. 일출을 보고 대피소로 내려와 아침을 먹고 백무동으로 하산할 계획이기 때문에 배낭은 숙소에 두고 주요 물품만 챙겨 천왕봉으로 향했다.

해가 뜨기 전 암흑 속에서 우리 앞뒤로 흔들거리는 헤드 랜턴 빛이 마치 함께 거사를 도모하는 동지들처럼 느껴졌다. 밤인데도 진파랑 하늘에서는 휘영청 밝은 달이 우리의 거사를 응원하고 있다. 달 옆의 별도 크고 선명했다.

휘영청 밝은 달이 우리의 천왕봉 등정을 지켜보고 있다.

 

천왕봉에 오르기 전 반드시 거쳐야할 곳이 있다. 천왕봉의 자매봉인 제석봉(1806m)이다. 어둠 속이라 보이지 않았지만 밝았다면 제석봉을 넘어서 고색창연한 고사목을 지날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는 천왕봉을 지키며 하늘과 통한다는 마지막 관문인 통천문(通天門)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제석봉이든 고사목 지대든 통천문이든 무엇하나 볼 수 없었다.

천왕봉에 오르니 시간이 5시를 가리켰다. 바람이 강할 뿐 춥지는 않았다. 멀리 동쪽 하늘이 조금씩 밝아지더니 5시 15분 무렵 운해 사이로 펼쳐진 산줄기 위로 붉은 덩어리가 서서히 알몸을 드러냈다. 장엄했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이 마침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천왕봉 일출은 생애 처음이다. 일출 장면만 찍지 않고 그것을 촬영하는 사람들까지 함께 넣어 사진을 찍으니 생동감이 넘친다. 설악산 대청봉이 바다에서 떠오르는 일출의 진수를 보여 준다면, 지리산 천왕봉은 내륙 첩첩산중 일출의 진수를 보여 준다. 어느 봉우리가 더 우월하다기보다 장르가 다르다.

일출 순간

 

천왕봉에서 내려 통천문을 지난다. 속계로 내려서는 셈이다. 통천문을 지나 몇 개의 바위 봉우리를 지나면 올라올 때는 보지 못했던 고사목 지대가 보인다. 그 지점에서 바라본 지리산이 나를 흥분시켰다. 멀리 노고단에서 반야봉을 거쳐 지금 내가 서있는 곳까지 지난 3일간 지나온 모든 능선이 한 눈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 모든 코스가 한 장의 사진에 모두 담겼다는 것도 신기했다.

 

▲이제 하산이다

천왕봉에서 장터목 대피소로 내려오니 6시 43분이다. 아침을 해결한 뒤 8시 15분에 하산을 시작했다. 5.8㎞의 백무동 하산길은 처음에는 순탄하다가 급경사 돌길로 이어진다. 배낭 무게에 내 몸무게가 더해져 조심조심 내려갔다. 연초록의 싱그러움에 눈이 호강한다.

계곡은 2시간 정도 내려가야 나온다. 계곡의 물소리가 멀리서 들리는가 싶더니 곧 계곡 옆에 자리잡고 있는 참샘이 나타났다. 대피소에서 3.2㎞ 지나서였다. 우리가 10시 20분 쯤 참샘에 도착하자 우리와 같은 코스로 지리산을 종주한 두 여성이 자리를 비켜준다. 양치질도 하고 세수도 해 속세로 내려갈 준비를 마쳤다.

백무동 입구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36분이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내려오다보니 대피소에서 먼거리가 아닌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희용이가 짠 일정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은 것이 감사했다. 백무동의 음식점에서 파전, 산채비빔밥, 막걸리로 배를 채우니 속세로 돌아온 것이 실감났다. 1시 30분 백무동에서 서울행 직행버스를 타고 올라오면서 한가롭고 나른한 봄날 오후를 만끽했다. 종주 거리를 계산해보니 39.4㎞다. 반야봉을 포함하면 40.7㎞다. 사실 성삼재에서 천왕봉까지의 순수 거리는 28.1㎞다. 천왕봉에서 백무동까지 하산한 거리, 반야봉 왕복 거리를 합치니 40㎞가 넘은 것이다.

이번 종주 산행에서 얻은 게 많다. 먼저 허벅지와 종아리가 실해졌다. 덕분에 당장 내일이라도 설악산 대청봉에 오를 수 있을 것처럼 자신감이 넘쳤다. 주말 근교 산행을 즐기는 나 정도의 체력이면 누구나 지리산 종주를 할 수 있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수확 중 하나다. 어쩌면 다시 도전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지리산 종주를 무난히 마쳤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소득일 것이다. 지리산의 구조를 어느정도 알게된 것도 수확 중 하나다. 처음부터 끝까지 도와준 희용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고맙다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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