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북한으로 향한 일본 적군파(赤軍派)의 ‘요도호 하이재킹’ 어느덧 50년… 1970년대 온갖 테러로 일본 열도 경악케 한 적군파의 등장과 소멸 과정

↑ 1970년 4월 3일 요도호 납치 범인들이 평양으로 향하기 전 김포공항에서 승객들을 풀어주고 있는 모습.

 

by 김지지

 

일본 적군파의 결성 배경

일본의 학생운동은 1968년 1월의 베트남 반전운동과 미 항모 엔터프라이즈호 기항 저지 투쟁, 1969년 1월의 도쿄대 야스다 강당 공방전 등을 통해 기세를 떨치는 듯했다. 그러나 일반 학생들이 그들의 과격한 행동에 실망하고 그들을 멀리 하면서 운동권 내부에서 고질적인 내분이 다시 도졌다. 소수화·과격화로 내몰리고 내부 갈등까지 겹쳐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새로운 노선이 운동권 학생들의 주목을 끌었다.

도쿄대 야스다 강당 공방전

 

교토대생 시오미 다카야가 발표한 ‘혁명은 전투적 대중운동이 아니라 조직된 폭력에 의해서만 달성된다’는 ‘국제주의와 조직된 폭력’이라는 장문의 논문이었다. 이 ‘무장투쟁 노선’을 지지하는 관서파(關西派)와 이에 반대하는 관동파(關東派)의 동서 대립 끝에 관서파가 공산당 중앙위에서 제명되자 관서파는 200여 명의 조직원을 기반으로 1969년 9월 ‘공산동(공산주의자 동맹) 적군파’를 결성했다.

의장은 시오미가 맡고 훗날 아랍 적군파의 주춧돌을 놓은 메이지대생 시게노부 후사코는 중앙위원이 되었다. 적군파는 “세계와 일본이 제국주의와 부르주아에 대해 전쟁을 선언하는 단계에 와 있다”는 이른바 ‘전(前)단계 봉기론’을 내걸고 오사카와 도쿄 등지에서 화염병과 폭발물로 경찰 시설을 공격하는 등 과격한 행동을 일삼았다. 그러던 중 산에서 무장훈련 중이던 주력부대원 50여 명이 체포되고 시오미 의장마저 1970년 3월 체포되어 장기수가 되면서 조직은 와해될 위기에 처했다. 요도호 납치가 결정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시오미 다카야 의장

 

한국 정부, 기지 발휘해 공중납치된 요도호를 김포공항으로 유인

1970년 3월 31일 오전 7시 21분, 131명의 승객을 태운 일본항공(JAL)의 보잉 727기 ‘요도호’가 후쿠오카로 가기 위해 하네다 공항을 이륙했다. 비행기가 후지산 상공에 다다른 7시 32분쯤, 갑자기 권총과 칼로 무장한 괴한들이 조종석에 난입해 “항로를 북한으로 돌리라”며 기장을 위협했다. 일본 적군파들로 구성된 9명의 범인 가운데는 16살의 고등학생도 있었다.

기장은 연료가 부족하다며 오전 8시 59분쯤 후쿠오카 이타즈케 공항에 항공기를 착륙시켰다. 범인들은 그곳에서 노인과 어린이 23명을 풀어주고 비행기 급유를 마친 뒤 오후 1시 58분쯤 다시 공항을 이륙했다. 대한해협을 거쳐 동해를 북상하던 요도호가 38도선을 넘은 것은 오후 2시 52분쯤이었다.

그 무렵 우리 정부는 이미 북한의 원산 근처까지 북상한 요도호를 김포공항으로 유인하기 위해 모종의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요도호가 관제 범위 40마일 반경 밖에 있어 관제를 잘못하면 자칫 비행기가 산에 부딪힐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인데도 우리 관제사는 요도호를 김포공항으로 유도하기 위해 기장과 교신을 시도했다. 다행히 남북한 사정에 익숙지 않은 범인들은 북한 공항 관제사로 위장한 우리 관제사의 유도에 순순히 따랐다.

요도호가 우리 관제사의 지시에 따라 동해에서 좌회전한 뒤 북한 상공을 가로질러 황해도 남포를 지나 서해안으로 빠져나가고 있을 무렵, 북한의 해주 근처에서 고사포가 발사되어 일촉즉발의 상황이 전개되었다. 다행히 요도호는 서해로 무사히 빠져나갔고 그곳에서 다시 인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때까지도 범인들은 비행기가 평양으로 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기장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지금까지도 명확지 않다.

요도호 항로

 

김포공항을 평양공항으로 위장

요도호가 유인되는 동안 김포공항에서는 평양공항으로 위장하기 위한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원색의 치마저고리를 입고 꽃다발을 든 20여 명의 여인과 인민군 복장에 따발총을 든 군인을 공항에 배치했으나 1시간 만에 평양공항처럼 꾸민다는 것은 역시 무리였다. 이런 상황에서 오후 3시 15분 요도호가 김포공항에 내렸다. 공중납치된 요도호를 우리 정부가 기지를 발휘해 다시 공중납치한 것이다.

요도호가 착륙하자 평양공항으로 위장하기 위해 인민군 복장을 한 우리 군이 북한의 따발총을 들고 이동하고 있다.

 

곧 비행기에 트랩이 설치되고 문이 열리려는 순간 갑자기 범인들 입에서 “이곳은 평양이 아니다”라는 비명이 터져나왔다. 조종석 밖으로 노스웨스트항공기 마크가 보인 데다 미제 지프와 흑인 병사들의 모습까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이튿날 일본의 운수성 정무차관이 서울로 왔고, 그가 인질로 붙잡히는 조건으로 99명의 승객과 스튜어디스는 풀려났다. 요도호는 4월 3일 오후 6시 정무차관을 인질로 삼아 김포공항을 떠났다. 평양에 도착한 범인들은 북한에 그대로 눌러 앉았고 기체와 승무원들은 4월 5일 무사히 하네다 공항으로 귀환했다.

군인들이 김포공항의 요도호를 감시하고 있다.

 

자아비판 명목으로 조직원 12명 처형한 잔인성에 경악

요도호 납치를 전후 한 시기에 일본 적군파의 주요 지도자들이 잇달아 검거되고 수사망이 점점 좁혀오자 적군파는 1971년 7월 공산당계 지하조직인 ‘혁명좌파’와 연합해 ‘연합적군‘을 결성한 뒤 산악지대로 숨어들었다. 경찰이 이들의 아지트를 급습한 것은 1972년 2월 16일이었다. 그러나 포위망을 뚫고 도주한 5명은 2월 19일 도쿄 북쪽의 피서지인 미나미 가루이자와의 아사마 산장에 침입해 관리인의 아내를 인질로 삼고 경찰과 인질극을 벌였다.

일본 경찰은 9일 동안 이들을 설득했으나 별 효과가 없자 2월 28일 오전 10시, 200여 명의 특공대를 산장에 투입했다. 특공대는 8시간 동안 총격전을 벌인 끝에 오후 6시 15분 인질범 5명을 모두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 내 적군파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그런데 경찰 조사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져 일본 열도를 들끓게 했다. 그해 초 산악지대에 모였던 29명 가운데 12명이 같은 조직원들에 의해 살해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시신들은 동상에 걸리거나 구타당하거나 칼에 찔리거나 목이 졸린 모습이었다. 경찰 조사 결과 살해 이유도 거창한 사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소한 트집에 있었다. 자아비판(적군파 표현은 ‘총괄’) 과정에서 혁명에 어울리지 않는 머리 모양을 했다거나 연애 경력 등을 이유로 동료를 간단히 죽음으로 내몰고 임신부까지 처형한 극한적 잔혹상에 일본 국민이 치를 떨었다.

경찰이 아사미 산장을 감시하고 있다.

 

납치범들의 북한 정착 후 삶

북한에 정착한 납치범들은 1980년대까지도 혁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9명 중 8명은 북한에서 일본 여성과 결혼하고 자녀를 낳았다. 그러나 부인과 자녀들은 모두 나중에 일본으로 귀국했다. 고교생 납치범은 1985년 일본에 밀입국해 활동하다 체포되었다. 그는 경찰에서 “나의 직업은 혁명가이다. 혁명을 위해 자금과 동지 규합을 목적으로 일본에 입국했다”고 진술했다. 결국 5년 형을 살고 출옥했으나 가족과 연락을 끊고 외로운 생활을 하다 2011년 병사했다. 1명은 1996년 캄보디아에서 체포되어 위조달러 사용 혐의로 태국 경찰에 넘겨졌다가 2000년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3명은 북한에서 사망하고 4명만이 현재 북한에 체류 중이다.

생존자 4명은 2014년 트위터를 개설, “일본에 돌아가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 “일본이라는 국가와 민족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는 글을 올렸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이들의 트위터 개설을 허용한 것은 납치 문제에 대한 일본의 반감을 줄이기 위한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현재 이들의 꿈은 ‘혁명’이 아니라 ‘일본 귀국’이다. 이들이 귀국을 원하는 것은 자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그러나 아직 북한은 이들의 귀국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레바논에서 아랍 적군파 결성하고 크고 작은 국제테러 자행

요도호 피랍은 ‘세계 혁명을 위해 해외에 근거지를 만들고 그 힘을 배경으로 다시 일본에서도 혁명을 일으킨다’는 적군파 의장 시오미 다카야의 ‘국제 근거지론’에 따라 해외를 무대로 한 첫 무장투쟁이었다. 뒤이어 중동 지역이 새로운 후보지로 떠오르자 시게노부 후사코, 교토파르티잔의 핵심 멤버인 오쿠다이라 쓰요시 등 19명은 “해외에 운동거점과 동맹군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1971년 2월 레바논으로 날아갔다.

시게노부 후사코

 

이들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가장 급진적 단체인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과 연대했다. 레바논의 베카 고원을 거점으로 삼아 ‘적군파 아랍지부’를 발족하고 군사훈련과 이스라엘 투쟁에 나섰다. 시게노부 등은 중동에서 일본 내 적군파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아랍 적군’을 자칭했다.

아랍 적군 소속 3명은 1972년 5월 30일,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로드 국제공항(현 벤구리온 국제공항)에 난입해 수류탄을 던지고 자동소총으로 무차별 난사했다. 그 결과 여행객 26명이 숨지고 80여 명이 다쳤다. 민간인 사망자 26명 가운데 17명은 푸에르토리코 성지순례단이었고 8명은 이스라엘인, 1명은 캐나다인이었다. 특히 이스라엘 사망자 중에는 1973년부터 1979년까지 이스라엘 대통령을 지낸 에브라임 카치르의 형 아론 카치르도 포함되어 있었다. 테러범 3명 중 2명은 현장에서 자폭하고, 오카모토 코조(24세)는 생포되었다. 오카모토는 이스라엘 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85년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에 포로로 잡힌 이스라엘 군인과 맞교환하는 형식으로 석방된 후 2000년 레바논으로 망명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적군은 반이스라엘 정서가 강했던 당시 아랍 국가들로부터 영웅 취급을 받았다.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오카모토 코조

 

아랍 적군은 이후에도 JAL기 납치(1974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주재 미 영사관 점거(1975년) 등 크고 작은 국제테러를 자행했다. 긴 생머리를 날리는 미모의 시게노부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동료들의 석방을 위해 주로 항공기 납치나 대사관 점거 등 죽음을 무릅쓴 이들의 과격한 행동 방식은 국제테러의 원형으로 불릴 정도였다. 그러나 냉전 종식과 중동평화 회담 등 국제적 상황 변화는 중동에서의 이들의 지위를 흔들었다.

1997년 국제적 압력에 타협한 레바논 정부가 베이루트에 잠복한 ‘아랍 적군’ 5명을 체포해 일본에 송환하면서 ‘아랍 적군’ 버리기에 나서자 이들은 중남미나 동남아로 흩어져 새로운 거점을 찾았다. 그러나 대부분이 검거되면서 아랍 적군파는 사실상 종말을 고했다.

시게노부는 1991년 일본으로 잠입한 후 인민혁명당이란 명칭의 새 무장혁명 조직을 만들기 위한 준비를 하다가 2000년 11월 오사카에서 체포되었다. 법정에서 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2001년 4월 감옥에서 지지자들에게 보낸 옥중성명을 통해 적군파 해체를 선언함으로써 한 시대를 폭력으로 물들게 한 테러의 시대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일본적군 3명이 수류탄을 던지고 자동소총을 난사한 이스라엘 텔아비브 로드 국제공항(현 벤구리온 국제공항) 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