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김종필·오히라 메모 작성 후 교환

↑ 김종필(왼쪽)과 오히라

 

5·16 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의 의장은 한일회담을 서둘렀다. 산업을 일으키려면 돈이 필요했고, 돈은 ‘청구권’ 명목으로 일본에서 받아낼 요량이었다. 회담은 1951년부터 진행됐지만 10년이 지나도록 좀처럼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혁명 후인 1961년 6월 20일 제6차 회담을 재개했으나 양국 간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박정희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특사로 파견, 조기타결을 지시했다.

1962년 10월 20일, 일본을 방문한 김종필은 오히라 외무장관과 이케다 총리를 만나 1차 탐색전을 펼쳤으나 일본은 여전히 3억 달러 제공을 고집했다. 박정희는 잠시 방미 중인 김종필에게 “반드시 청구권이라는 문구가 들어가야 하고, 6억 달러 이하는 양보할 수 없다”는 긴급훈령을 다시 내렸다.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이 오히라를 다시 만나 3시간 반 동안의 실랑이 끝에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를 작성함으로써 한일회담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타결지었다. 2년간 비밀에 부쳐졌다가 나중에 밝혀진 금액은 6억 달러(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차관 1억 달러)였으나 박정희가 그토록 원했던 ‘청구권’이란 문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곳곳에서 졸속타결이라며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으나 김종필 측도 할말은 있었다. 어떻게든 6억 달러를 받아내려다보니 일부 문구에 소홀하게 됐지만 일본의 외환보유고가 18억 달러였을 때 6억 달러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라는 것이다. 김종필이 그 회담에서 독도문제 해결방안으로 독도 파괴를 일본 측에 제안했다고 알려져 한동안 비난을 샀으나 이는 훗날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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