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김종필·오히라 메모’ 작성… 한일회담의 밑그림이었으나 박정희는 ‘청구권’ 문구 없다며 노발대발 반대

↑ 김종필(왼쪽)과 오히라

 

메모지에 한일 양측이 생각한 액수와 조건을 써서 교환한 게 ‘김종필·오히라 메모’

5·16 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이미 10년 전부터 시작되었으나 가다 말다를 반복하고 있는 한일회담을 서둘렀다. 경제개발을 시작하려면 돈이 필요했는데 이 돈을 ‘청구권’ 명목으로 일본에서 받아내려면 끊어진 양국간 국교를 하루빨리 정상화해야 했다. 그래서 1961년 10월 20일 제6차 한일회담이 재개되자 11월 12일 박 의장이 방미 길에 일본에 들러 이케다 총리와 조속한 국교 정상화에 합의했다.

하지만 이후 1년 동안의 실무회담에도 진전이 없었다. 박정희 의장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특사로 파견해 일본과 담판을 짓게 했다. 1962년 10월 20일, 김종필은 ‘제2의 이완용’이 될 각오로 도쿄에서 오히라 외무장관을 만나 1차 탐색전을 펼쳤다. 하지만 타결을 짓지 못하고 미 CIA 국장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김종필은 딘 러스크 미 국무장관에게 오히라와의 1차 회담에 대해 “오히라가 12년에 걸쳐 총 3억 달러를 제시하면서 ‘배상금’으로 불려선 안 되고 ‘독립 축하금’으로 불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 나는 한국의 반일 감정을 고려해 3억 달러 이상의 청구액을 포함해 최소 6억 달러는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미국에 체류 중이던 김종필은 박 의장의 긴급 훈령을 받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박 의장은 “일본이 주장하는 ‘독립 축하금’이나 ‘경제협력 자금’ 대신 반드시 ‘청구권’이라는 문구가 들어가야 하고 일본이 제공해야 할 자금은 총액이 6억 달러 이상이어야 하며 일본이 독도 문제를 제기할 경우 한일회담의 현안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라”고 김종필에게 지시했다.

김종필은 오히라를 만난 자리에서 “외교적인 기술이나 흥정은 더 이상 거론하지 말고 청구권 금액에 대해 서로가 양보할 수 있는 최저선을 마지막으로 털어놓자”고 제안했다. 오히라도 “서로가 생각하고 있는 금액을 종이에 적어 동시에 교환하자”고 맞장구쳤다. 종이는 두 사람 사이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일본 외무성 메모용지가 사용되었다.

두 사람은 메모지를 한 장씩 찢어 그 위에다 연필로 서로가 최종선이라고 생각했던 액수와 조건을 써서 교환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김종필·오히라 메모’다. 두 장의 메모를 기초로 최종 타협안이 만들어지기까지 총 3시간 30분이 걸렸다. 1962년 11월 12일 오후의 일이었다. 이로써 한일회담의 밑그림은 대충 그려졌다. 그러나 메모를 본 박정희는 ‘청구권’이란 문구가 없는 것을 보고 노발대발했다. 메모에 자금 제공의 명목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다 보니 한국 정부는 ‘청구권 자금’ 혹은 ‘사실상의 배상’으로 설명한 반면, 일본 정부는 ‘경제협력 자금’ 또는 ‘독립 축하금’으로 해석하는 아전인수가 빚어졌다.

김종필 오히라 메모

 

격분한 학생들 데모 벌이자 메모 내용 공개

2년 동안 비밀에 부쳐진 김종필·오히라 메모가 구체화된 것은 1964년 3월 23일이었다. 그날 김종필은 도쿄에서 오히라를 다시 만나 “3월 말까지 어업회담을 타결하고 4월 초에 외무장관 회담을 열어 모든 현안을 일괄 타결한 다음 4월 말까지 조약 초안을 작성하고 5월 초에 한일협정에 조인한다”고 비밀리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 3월 24일자 국내 신문에 보도되고, 이에 격분한 학생들이 그날부터 전국적으로 데모를 벌이면서 공개하는 쪽으로 급선회했다.

정부는 3월 31일 32개대 학생 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 메모 내용을 전격 공개했다. 비록 문서 자체는 공개하지 않았지만 정부가 학생들에게 알려준 내용에 따르면 “청구액으로 한국은 3억5000만 달러, 일본은 2억5000만 달러를 제시했고, 차관액으로 한국은 2억5000만 달러, 일본은 2억 달러를 제시했으며 민간차관은 양쪽 모두 1억 달러 이상”으로 되어있었다. 당시 공개한 이 금액은 2005년에 공개된 우리 측 외교문서(김종필·오히라 메모)에 청구권 금액이 6억 달러(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차관 1억 달러 이상)로 되어있는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한일회담을 타결짓기도 전인 1964년에 외교관례를 어기고 ‘김·오히라 메모’가 외부로 알려지자 일본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구속력 있는 문서 교환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우리 정부는 “문서를 공개한 것은 아니고 내용만 알려준 것”이라며 진화에 나섰다. 그 해 6·3 계엄령 선포로 중단되었던 회담은 1964년 12월 재개되어 1965년 6월 22일 한일조약이 성사되었다. 조약안은 양국 의회의 비준 동의를 거쳐 12월 18일 비준서를 교환함으로써 한일 간의 국교 정상화를 위한 험난했던 긴 여정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한일회담을 시작한 이래 14년 1개월 28일, 을사조약을 체결한 이래 61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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