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연인과 부부 ③-3] 일제 하에서 공산 혁명을 꿈 꾼 세 남자·세 여자의 사랑과 이별과 배신, 투쟁과 고난 이야기 : 박헌영·김단야·임원근·허정숙·주세죽·고명자를 중심으로 / 6-③

 ↑ 박헌영이 공식적으로 결혼한 두 여성과 딸들. 왼쪽이 1921년 결혼한 주세죽과 딸 비비안나이고 오른쪽이 해방 후인 1949년 북한에서 결혼한 윤레나와 딸

 

by 金知知

 

■세 남자·세 여자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투쟁

 

▲‘조선의 콜론타이’ 허정숙과 최창익

임원근이 구속된 사이 허정숙은 다른 남자와 동거에 들어갔다. 수감 중인 임원근을 찾아가 이혼을 요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허정숙이 동거하는 남자는 자신의 화요회와 앙숙인 북풍회 소속 송봉우였다. 송봉우는 경상도 하동 사람이라는 것말고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었다. 고아라고도 하고 스님의 사생아라고도 하고 불가에서 계를 받은 스님이라고 하는 등 소문만 무성했다.

송봉우

 

허정숙의 자유분방함과 연애 행각은 당시 공산주의 활동가들뿐만 아니라 세간에서도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이에 대해 허정숙은 “남자들은 여러 여자를 첩으로 두고 술집 여자와도 놀아나면서 왜 여자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느냐”며 “성적 해방과 경제적 해방이 극히 적은 조선여성에게 사회가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여성의 본능을 무시하는 행위”라고 당당하게 맞섰다.

허정숙은 1926년 봄 임원근과의 둘째 아들을 낳았으나 다른 남자 아이라는 소문이 돌아 ‘스캔들 메이커’로 언론지상에 오르내렸다. 한 잡지가 자유연애를 주창한 소련의 공산혁명가이자 급진적인 여성해방론자인 콜론타이를 빗대 허정숙을 “조선의 콜론타이”라고 칭하면서 그것이 별명이 되었다. 허정숙이 “조선의 콜론타이”로 불린 것은 자유분방한 연애행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공산주의 사상에 입각해 여성의 지위향상과 조선의 독립을 위해 맹렬히 활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콜론타이

 

허정숙의 자유분방함과 연애 행각, 세간에서도 입방아에 오르내려

허정숙은 둘째 아들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26년 5월 부친 허헌과 함께 부산에서 일본행 배를 탔다. 허헌이 미국, 유럽, 소련, 중국으로 이어지는 세계일주를 하는데 딸을 데리고 간 것이다. 부녀는 일본에서 배를 타고 미국의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뉴욕에 도착했다. 허헌은 미국에서 유럽으로 건너가 아일랜드·영국·프랑스·독일·벨기에 등 유럽의 여러나라를 두루 돌아보고 러시아와 중국을 거쳐 조선공산당 사건 재판이 시작되기 전 귀국했다.

허헌의 구미 만유(漫遊)를 축하하기 위해 1926년 5월 28일 모임을 가진 동아일보 임직원. 김성수 사장, 송진우 주필 겸 편집국장 등이 참석했다. 원(圓) 안은 허헌이다.

 

허정숙은 허헌의 유럽행을 따르지 않고 미국의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했으나 조선공산당 사건 재판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고 출국 1년 5개월만인 1927년 10월 말 귀국했다. 이후 신간회의 자매기관인 ‘근우회’에서 활동하다가 1930년 1월 이른바 ‘근우회 사건’(서울여학생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투옥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일제가 작성한 허정숙의 신상기록카드. 당시 허정숙은 ‘근우회 사건’으로 투옥 중이었다.

 

체포 당시 허정숙은 셋째를 임신 중이어서 형 집행정지로 풀려나 아이를 낳고 1년 뒤인 1931년 6월 재수감되었다. 셋째 아이는 의사이면서 조선일보 논설위원이던 신일룡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1931년 7월호 ‘삼천리’지는 ‘붉은 연애의 주인공들’이라는 특집에서 허정숙, 주세죽, 황신덕, 정종명 등 여성인사들의 사랑이야기를 신파조로 소개하고 있다. 특히 허정숙에 대해서는 ‘성이 다른 세 아들을 두고 아미리가(아메리카)를 방랑’하고 돌아온 인사라며 요란하게 다뤘다.

허정숙이 1932년 3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출감했을 때 어머니는 오랜 병고 끝에 이미 세상을 등지고 둘째 아들도 세상을 떠나 그의 옆에 없었다. 송봉우가 한때 자신의 집에 들어와 살았지만 송봉우가 또다시 잡혀 들어가 전향서를 쓰고 나온 뒤에는 송봉우를 멀리 했다.

허정숙은 신간회도 근우회도 해체되어 딱히 할 일이 없는 데다 아버지 허헌까지 변호사 자격을 빼앗겨 생계 대책을 세워야 했다. 그래서 삼청동에 마련한 사업이 태양광선치료원이었다. 허정숙은 송봉우가 떠난 뒤 남자에 대해 시들해졌다. 대신 투옥과 상처를 잇따라 겪어 의기소침해 있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친구를 소개했다. 여성동우회와 근우회 활동을 함께 했던 동갑내기 친구 유덕희였다. 친구는 곧 새어머니가 되어 아버지와 사이에 두 딸을 낳았다.

 

최창익,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돼 6년간 투옥

그러던 중 중국 남경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이 결성(1935년 7월)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민족혁명당은 김원봉의 의열단, 이동녕·안창호의 한국독립당 등 5개 단체가 통합한 정당이었다. 민족해방군까지 창설한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그러던 어느날 최창익(1896~1957)이 치료원에 찾아왔다. 허정숙은 최창익에게 조선민족혁명당이 결성된 중국 남경으로 함께 떠나자고 청했다. 반대로 최창익이 제안했을 수도 있다.

두 사람은 이후 동거에 들어갔다. 당연히 말들이 많았다. 혹자는 최창익이 5번째 남편이라고도 했다. 더구나 최창익은 허정숙이 속한 화요파와는 앙숙인 서울청년회 소속이었다. 과거 남자 송봉우까지 북풍회 소속이다보니 “지조도 없고 의리도 없는 년”이라며 쑥덕대고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정숙은 1936년 아버지와 12살, 6살의 두 아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최창익과 함께 만주 봉천행 열차를 탔다. 목적지는 남경이었다.

최창익은 1896년 함경북도 온성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7년 서울로 올라와 20살도 넘은 1918년 중앙고보에 입학했으나 1919년 3·1 만세 운동에 참가했다가 퇴학을 당하고 그해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코쿠 영어학교를 거쳐 와세다대 정경학부에 입학했다. 일본 유학 중에는 학우회를 조직해 활동하고 국내에서는 학우회 이름으로 순회 강연을 했다. 1923년 조선노동공제회에 가입하고 1924년 만주에서 조직된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최창익

 

국내에서는 1924년 12월 경성공산주의청년회의 별동조직인 사회주의자동맹을 결성하고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25년 2월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한 후에는 국내에서 활동하며 잡혀가고 풀려나기를 반복했다. 1928년 제3차 조선공산당에 연루되어 6년간 투옥되었다가 1934년 석방되었다.

 

▲김단야와 코민테른의 12월 테제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국내 공산당원들은 1차부터 4차까지 수 백명이 체포·투옥되고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이처럼 조선공산당이 좀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하자 코민테른이 1928년 12월 조선공산당의 해체와 당 재건을 지시하는 이른바 ‘12월 테제’를 공식 채택했다. ‘조선 농민과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테제’라는 제목의 ‘12월 테제’는 그때까지 진행된 조선 공산당 운동의 기조를 바꿀 것을 요구했다. 즉 인텔리들의 결사체인 조선공산당을 해체하고 공장과 농촌으로 들어가 노동자와 빈농을 조직해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주도하는 계급정당으로 재건하라는 지시였다.

모스크바에 있던 김단야와 고명자는 ‘12월 테제’의 임무를 받고 1929년 1월 모스크바를 떠났다. 고명자는 1929년 2월 조선으로 귀국하고 김단야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코민테른 비서부에서 당 재건 작업에 전념했다. 그러다가 1929년 7월 국내로 잠행, 1929년 11월 박민영·권오직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조직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1930년 2월 일제 경찰의 검거령이 내려지자, 검거망을 피해 다시 국내를 떠나 모스크바로 갔다가 상해로 돌아왔다.

 

▲박헌영의 탈출과 모스크바 체류

박헌영은 1927년 11월 병 보석으로 풀려났다. 출감했을 때 몰골은 처참했다. 그와 경성고보 동창이자 기자로 함께 근무했던 심훈은 박헌영의 모습을 보고 ‘朴君(박군)의 얼굴’이라는 시를 지어 울분을 토로했다.

“이게 자네의 얼굴인가? / 여보게 박 군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 / ‘알콜’ 병에 담가 논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蒼白(창백)하고 / 마르다 못해 海綿(해면)같이 부풀어오른 두 뺨 / 頭蓋骨(두개골)이 드러나도록 바싹 말라 버린 머리털 / 아아 이것이 果然(과연) 자네의 얼굴이던가?

(중략)

오냐 박 군아 / 눈은 눈을 빼어서 갚고(신문에는 XX) / 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XX)주마! / 너와 같이 모든 X를 잊을 때까지 / 우리들의 심장의 고동(XX)이 끊길 때(XXX)까지” <조선일보 1927년 12월 2일>

심훈의 시 ‘朴君의 얼굴’. 조선일보 1927년 12월 2일자에 실렸다.

 

심훈은 1930년 10~12월 박헌영을 모델로 해 상해에서 혁명의 열정을 불태우는 젊은이를 그린 소설 ‘동방의 애인’을 조선일보에 연재하기도 했다. 이 소설은 39회까지 연재되다 일제의 압력으로 중단되었다.

조선일보에 연재된 심훈의 소설 ‘동방의 愛人’ 첫 회(1930년 10월 29일). 39회까지만 연재되다가 중단되었다.

 

박헌영은 출감 후 정신병원에 다니고 고향 등에서 요양에 전념했다. 첫 아이는 결혼 6년만인 이 무렵 들어섰다. 박헌영과 주세죽 부부는 해산을 앞두고 국경지대인 함경도로 거주지를 옮겼다. 처가가 함경남도 함흥에 있어 일본 경찰의 의심은 사지 않았다. 그 틈을 타 박헌영은 1928년 8월 만삭의 주세죽과 함께 몰래 배를 타고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에 안착했다. 일본 경찰이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부산을 떨었으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거리 공원 벤치에서 만삭의 주세죽과 박헌영이 나란히 앉아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후인 1928년 9월 블라디보스토크 거리 공원 벤치에 앉아있는 박헌영과 주세죽의 모습. 당시 주세죽은 만삭이었다.

 

박헌영, 주세죽과 함께 소련으로 탈출했으나 상해에서 또다시 체포돼

주세죽은 소련 정부의 도움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딸 비비안나(한국명 박영)를 낳았다. 부부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1928년 11월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박헌영은 망명 혁명가로 인정을 받아 1929년 2월 소련공산당에 입당하고 그해 9월, 김단야가 1년 전 졸업한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했다. 주세죽도 고명자가 다닌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1929년 입학했다.

그런데 훗날 박헌영의 아들 원경 스님이 자신의 후견인이었던 한산 스님에게서 들었다는 그의 증언에 따르면 1929년 모스크바로 피신한 박헌영 부부가 방이 하나뿐인 하숙집에서 김단야와 함께 숙식했는데 이때 주세죽이 김단야의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다. 원경 스님에 따르면 박헌영은 이 사실을 알았지만 김단야와 친구이자 혁명동지로서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주세죽과도 형식적인 부부관계를 지속했다. 아이는 몇 년 뒤 죽었다.

부부는 1931년 각각의 학교를 졸업한 뒤 그해 말 모스크바를 떠나 1932년 1월 상해에 도착했다.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국내 혁명조직과 연계를 맺는 것이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임무가 워낙에 막중한 터라 4살의 딸은 모스크바 보육원에 맡기고 떠났다. 홀로 남은 딸은 소련 정부의 보호 속에서 전문 발레리나로 성장했다. 부부는 상해에서 오랜 친구이자 동지인 김단야를 만나 고려공산당 기관지 ‘콤뮤니스트’를 함께 발행했다.

그러던 중 1933년 7월 5일 박헌영이 상해에서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는 일이 벌어졌다. 박헌영이 시간을 끈 덕에 김단야와 주세죽은 체포를 면했다. 박헌영은 5년 전 재판 도중 병보석 상태에서 탈출한 전력이 있는 데다 그동안 무슨 활동을 했는지 밝혀지면 중형을 피할 수 없었다. 박헌영은 살인적인 고문을 받으면서도 과거 행적을 감추기 위해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결국 일본 경찰이 증거를 찾지 못해 1934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았다.

 

▲주세죽과 김단야

박헌영이 상해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되자 주세죽은 박헌영이 일본 경찰의 가혹한 고문을 견뎌낼지 자신하지 못해 모든걸 체념했다. 그 무렵 김단야가 함께 모스크바로 가자고 주세죽에게 제안했다. 주세죽은 1934년 김단야를 따라 모스크바로 가 부부로 함께 살았다. 이로써 주세죽은 고향의 본처와 고명자에 이어 김단야의 세 번째 아내가 되었다.

김단야(왼쪽)와 주세죽

 

주세죽이 김단야와 부부가 된 데는 모든 것을 포기한 심리적 상태가 작용했다며 동정하는 의견이 많다. 즉 박헌영의 생환을 전혀 기대하지 못하는 암울한 상황에서 주세죽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해주고 살갑게 대해주는 김단야에게 자연스럽게 의지하게 되었을 거라는 동정이었다.

김단야는 1934년 2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의 학국학부장 직책을 맡아 2년 6개월간 조선인 공산 혁명가를 육성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러다가 1936년 8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의 한국학부가 폐지되어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의기소침해졌다. 이런 김단야에게 1937년 진짜 고통이 엄습했다. 당시는 스탈린의 이름으로 대대적인 숙청의 광풍이 소련 전역에 몰아칠 때였다. 과거 러시아혁명에 참가했던 구 볼셰비키들이 “인민의 적”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둘씩 처형되었다. 숙청의 회오리는 소련에 망명한 외국인 혁명가들에게도 몰아쳤다. 진정서와 투서 한 장으로 수십 년간 혁명운동에 헌신한 고참 공산주의자들이 거꾸러지곤 했다. 김단야도 그랬다.

 

김단야, 주세죽과 새 살림 차렸으나 곧 소련 비밀경찰에게 처형당해

김단야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것은 한국인 공산주의자가 작성한 한 통의 투서였다. 결국 김단야는 1937년 11월 소련 비밀경찰에 체포되었다. 혐의는 ‘반혁명 스파이, 테러단체 결성’이었다. 객관적 물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의심스러워 보였을 뿐이다. 소련의 군사법정은 1938년 2월 김단야에게 재산 몰수와 총살형을 선고했다. 김단야는 선고 당일 바로 처형되었다.

주세죽도 범죄자의 아내였기 때문에 ‘사회적 위험분자’라는 혐의로 체포되어 1938년 5월 5년간의 카자흐스탄 유배형을 받았다. 주세죽은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김단야와 사이에 낳은 어린 아들은 이 와중에 병으로 죽었다. 주세죽은 박헌영과 사이에 낳은 딸 비비안나와도 함께 살 수 없었다. 주세죽은 1943년 5월 형기가 만료되었으나 소련이 독일과 전쟁 중이어서 유배지를 떠나지 못했다.

주세죽(왼쪽)과 20대 초반의 박 비비안나

 

1945년 일제가 패망했을 때도 소련 정부에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탄원서를 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주세죽은 해방된 조국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죽은 죽 알았던 박헌영과도 재회하지 못한 채 1953년 소련에 눈을 감았다. 김단야는 2005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아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았다.

 

▲고명자 일제에 전향하다

고명자는 1929년 2월 귀국 후 노농계급 중심의 당 재건 임무를 수행하던 중 조선공산당 재건 사건으로 1930년 3월 체포되었다. 그후 1년 7개월 남짓 수감되었다가 1931년 10월 징역2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그러자 동지들이 고명자를 의심했다. 조선공산당 재건사업의 피고 23명 중 모두 실형을 선고받았는데 고명자만 집행유예를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동지들 중 일부는 “전향서를 쓰고 밀정 노릇을 하겠다고 하지 않는 한 어떻게 실형을 피할 수 있겠느냐”면서 고명자를 혁명 사업에서 배제하자고 주장했다.

고명자

 

고명자는 1932년 5월 ‘메이데이 사건’으로 수백명이 체포되었을 때도 잡혀들어갔다. 일경은 김단야의 소재지를 실토하라면서 고명자에게 끔찍한 고문을 가했다. 결국 고명자는 고문을 참지못하고 전향서를 쓰고 말았다. 일본 검사는 고명자에게 김단야와 계속 교신하고, 김단야를 국내로 유인하고, 코민테른의 지령을 보고할 것 등을 주문하고는 1932년 8월 다른 관련자 17명과 함께 풀어주었다. 고명자는 석방된 후 일제의 강압에 따라 일어판 친일잡지 ‘동양지광’에 근무했다. 잡지의 다른 구성원들도 사장과 편집부장을 포함해 모두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가 감옥살이를 한 전향자들이었다.

 

▲박헌영 석방 후 만난 두 여성… 정순년과 이순금

박헌영은 상해에서 체포되고 6년 2개월만인 1939년 9월 대전형무소에서 석방되었다. 그후 청주 비밀 아지트를 중심으로 서울 비밀 아지트를 오가며 지하활동을 했다. 당시 박헌영의 핵심 조직은 박헌영이 석방된 후 결성한 경성콤그룹이었다. 청주 비밀 아지트에는 아직 20살이 안된 정순년이라는 앳된 여성이 있었다. 1922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난 정순년은 옷가지와 음식을 준비하고 집안을 정리하는 하우스키퍼 역할을 하며 박헌영의 잠행 활동을 도왔다. 경성콤그룹의 구성원이자 해방 후 해방일보 주필을 지낸 정태식이 5촌 당숙이었다.

정순년은 박헌영을 보필하면서 잠자리도 같이 했다. 그래서 1941년 3월 청주에서 낳은 사내 아이가 훗날 원경 스님으로 알려진 박병삼이다. 정순년의 부모는 혼례도 치르지 않은 딸의 임신에 분노했다. 결국 정순년은 1941년 여름 핏덩이 아이를 버려둔 채 부모의 손에 끌려 귀향해야 했다. 정순년은 그때부터 박헌영과는 인연이 끊기고 어린아들과는 생이별했다. 집으로 끌려간 그녀는 1년 가량 집에 갇혀 지내다 1942년 인근 목수와 결혼했다.

10대 후반의 원경 스님(왼쪽)과 그의 어머니 정순년

 

박병삼은 경성콤그룹의 멤버인 이순금을 거쳐 친할머니 손에 키워졌다. 하지만 친할머니 역시 1943년 세상을 떠나 큰아버지 밑에서 생활했다. 아버지 박헌영은 5살 때이던 1946년까지 6차례만 만나고 그 후로는 만나지 못했다. 얼음과자 장수, 막노동꾼, 식당 종업원 등을 거치며 부랑자처럼 전국을 떠돌다가 19살이던 1960년 출가해 원경 스님이 되고 몇몇 사찰의 주지를 역임했다. 어렸을 때 헤어져 얼굴도 모르던 어머니는 1963년 만났다. 호적에 올라 있지 않아 살아도 산 사람이 아니었던 그는 28살 때이던 1969년 아는 스님을 앞세워 가호적을 만들었다.

 

원경 스님은 정순년과 사이에 낳은 아들

박헌영은 1941년 1월 경성콤그룹 제1차 검거사건을 피해 대구로 피신했다가 1942년 12월 다시 일제 경찰의 검거망을 피해 전라남도 광주로 피신, 벽돌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그때 박헌영과 경성콤그룹 구성원 간의 연락책을 맡고 정순년의 아들을 돌본 인물이 이순금이었다. 해방 후인 1946년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미군정에 검거되어 1950년 6월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 처형된 이관술이 친오빠다.

이순금은 1912년 경남 울산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제 하에서 감옥을 드나든 공산주의자였다. 첫 남편은 역시 공산주의자이면서 고향에 본처가 있는 이재유였다. 이순금은 이재유와 헤어진 후 노동운동을 하면서 감옥소를 계속 드나들어 남녀간의 사랑을 느낄 기회가 없었다. 그럴 때 나타난 인물이 역시 본처가 있는 김삼룡이었다. 이순금은 독립운동을 하는 동안 3명의 남자와 동거했지만 이중 김삼룡과 가장 가까운 부부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가 작성한 이순금 신상기록카드. 1933년 2월 동대문서가 작성했다.

 

이순금은 박헌영이 지하 활동을 하는 동안 그의 지시를 조직에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때 두 사람은 동지애를 넘어 남녀 사이로 발전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공산주의 운동을 한 사람들은 이순금과 박헌영을 부부 사이로 보고 공식석상에 나타나면 부부 예우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해방 후에는 이순금이 박헌영을 배신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6·25 전쟁 후 김일성이 박헌영을 숙청하려 할 때 이순금이 재판정에서 “박헌영이 해방 전 남한에 있을 때 미국을 도왔다”는 불리한 증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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