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연인과 부부 ③-2] 일제 하에서 공산 혁명을 꿈 꾼 세 남자·세 여자의 사랑과 이별과 배신, 투쟁과 고난 이야기 : 박헌영·김단야·임원근·허정숙·주세죽·고명자를 중심으로 / 6-②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관련자에 대한 재판 내용을 보도한 신문 지면(동아일보, 1927년 4월 3일자)

 

☞ [연인과 부부] 시리즈 전체가 궁금하다면 클릭!!

 

by 김지지

 

■조선공산당 창당과 해외에서 결성된 공산단체들

 

▲조선공산당, 마침내 조선에서 첫 발을 떼다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이 서울 황금정 1정목(현재 을지로1가)의 중국음식점 아서원 2층에서 창당했다. 이날을 창당일로 선택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전조선기자대회(4.15~17)와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4.20~21)가 연속적이고 대대적으로 서울에서 열려 일본 경찰의 감시가 그곳으로 집중된 틈을 노린 것이다.

각 도를 대표한 20여 명의 참석자들 중 김재봉·김찬·조봉암·박헌영 등은 코민테른 파견원이 주축인 화요회에 속하고 김약수·송봉우 등은 일본 유학생들이 주축인 북풍회 소속이었다. 초기 한국 공산주의운동을 이끈 김재봉(1891~1944)이 책임비서로 선출되고 박헌영은 7명의 중앙집행위원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조선공산당 창당 장소인 중국음식점 ‘아서원’

 

다음날 4월 18일에는 박헌영의 서울 훈정동 집에서 조선공산당의 청년전위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공청) 창립식이 열렸다. 집주인인 박헌영을 비롯해 조봉암, 홍증식, 권오설 등 모두 18명이 참석한 창립식에서 박헌영은 책임비서 겸 중앙집행위 비서부를 맡고, 김단야는 연락부, 임원근은 교양부를 맡았다. 자신의 집에서 창립식이 열린 터라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참석한 주세죽은 중앙위원 7인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처럼 30대는 주로 조선공산당을 무대로, 20대는 청년조직인 공청을 매개로 활동했다. 마치 장년층이 수레의 앞을 끌고 청년층이 그 뒤를 미는 형국으로 역할 분담이 이뤄졌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조선공산당을 창당하던 그 무렵 일본 정부는 치안유지법을 준비했다. 공산주의를 불법화하고 주의자들을 중범죄로 간주하는 법이었다. 사상범을 전문으로 다루는 그 유명한 고등계 형사가 생겨난 것도 이 법에 의해서였다. 치안유지법은 1925년 5월 12일 시행에 들어갔다. 이로써 총독부의 문화정치도 시효를 다했다. 그 무렵 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을 승인했다는 소식이 상해의 여운형을 통해 국내로 전달되었다. 조선공산당의 청년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는 첫 사업으로 모스크바에 유학생을 파견하기로 했다. 김단야는 유학생 명단에 자신이 사랑하는 고명자를 집어넣었다. 고명자는 1925년 10월 서울을 떠나 모스크바로 갔다.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 #조선공산당 #조선공산당사건 #공산주의 #상해

 

☞ 전문(全文)을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 클릭!!

error: Content is protected !!